요즈음은 답사를 나가면 해가 일찍 떨어져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이야 많이 해가 길어졌지만, 한 달 전만해도 정말 답사를 다니려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곳을 돌아보고 난 뒤 다음 답사지를 가급적이면 가까이 잡는 것도 그런 이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짙은 안개로 오전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한 곳을 답사하고 난 시간이 벌써 5시가 넘고, 주변은 어두컴컴해진다. 서둘러서 다음 답사지인 감곡면 오향리를 찾아 길을 재촉한다.

 

음성군 감곡면 선돌을 찾아 나서다

 

오향리는 이천에서 제천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청미천을 건넌 후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있는 마을이다. 감곡에서 생극을 거쳐 음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몇 곳을 돌면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오늘 찾아야 할 선돌 위치를 모른다. 한 곳에 들어가니 중학교 뒤편 논에 서 있다고 한다. 감곡중학교 뒤편으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보니, 저편 논둑에 돌이 서있다. 찾아보아야 할 선돌이다.

 

거대한 선돌. 제작연대까지 밝혀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선돌.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재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돌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선돌 중에서 큰 편에 속한다. 높이가 3m 정도에 너비가 194cm, 폭이 60cm이다. 이 선돌이 서 있는 곳을 '선돌바위들'이라고 부른단다.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인 신표와,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 등의 역할을 한다. 이 선돌은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의 수호신은 아니다. 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다. 다만 돌을 절개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바위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오향리 선돌이 중요한 민속자료로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선돌을 세운 날자가 기록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남쪽을 향한 선돌의 아랫부분 절개면에 「숭정 13년 경진 10월 22일 입석(崇禎 十三年 庚辰 十月 二十二日 立石)」이라고 얇게 음각하였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1640년에 이 선돌을 이곳에 세웠으니, 370년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선돌의 기능은 무엇일까? 앞에는 청미천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입석의 기능은 수해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는 생각이다. 혹은 이곳이 도계지역이므로, 그러한 경계의 표시였을 가능성도 있다.

 

끝내 암돌은 못 찾고, 마음만 아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이 선돌의 안내판을 보니 이 돌이 암수 한 쌍으로 되어있고, 암돌은 남성선돌에서 북쪽으로 35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선돌의 절개지가 남쪽이라면 그 반대쪽이 된다. 남성 선돌에서 바라보면 청미천 쪽 둑이 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안성방향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 남쪽 언덕에 있다고 적혀 있다. 날이 컴컴해지고 있으니 서둘러 찾아보기로 했다. 좁은 농로를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선돌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벌써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끝내 여성선돌은 찾지를 못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돌아보리라고 마음을 먹는다. 농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학생들이 한 떼 몰려온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적어도 학교에서 주변에 있는 문화재 정도는 한번이라도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생들 이 근처에 선돌이 어디 있는지 알아?"

"선돌요. 모르는데요. 선돌이 무엇인데요?"

"저기 앞에 저 돌처럼 세워 좋은 돌인데. 저것보다 조금 작은 것"

“몰라요."

 

어이가 없다. 도대체 요즈음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학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선돌, 그 정도쯤은 단 한번이라도 학생들에게 알려 줄만도 한데. 몇 번이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답답하다.

 

"이놈들 담배 피웠냐?"

"담배 피우지마라 뼈 삭는다."

 

차가오니 미처 끄지 못하고 버린 담배에서 연기가 나온다. 대답을 하는데도 담배 냄새가 난다. 교육이 점점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찾고자 하는 선돌은 보이지를 않고, 학생들은 선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차를 돌려 나오면서 갑자기 울화가 치민다.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그런 학교생활.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선돌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그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는 교육 현실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남들은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하면 대뜸 '좋겠다.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재미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하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국을 수 십차례나 돌았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본 문화재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문화재를 마구 훼손한다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이렇게 무관심한 세태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바람은 하나밖에 없다. 전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바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말이다.

여주읍에서 점동면으로 나가는 도로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한 기 서 있다. <처리선돌>이라고 쓴 안내판에는, 안내판에서 30m 근처에 선돌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콘크리트 회사의 축대 밑에 서 있어, 선돌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30m 이내에 선돌 비슷한 것도 발견을 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공장의 축대 밑이고, 그곳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안내판에 적힌 선돌이 그 공장 안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문화재

몇 번 주위를 돌아보다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공장 안은 콘크리트 공장답게 주변에 제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안쪽에 돌로 축대를 쌓은 곳이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선돌이 보인다. 이렇게 선돌이 있으면 안내판에 공장안이라고 표기를 하든지, 아니면 축대에서 외부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아무런 설명도 없이 30m 표시만 있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주군 점동면 처리 88 - 6에 소재하는 이 선돌은 경기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선돌은 높이가 2.1m에 넓이는 1.35m 이다. 돌의 두께는 30cm 정도로 직사각형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돌은 위 부분을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문화재

‘입석(立石)’이라고 하는 이 선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선돌은 고인돌과는 달리 근대화가 되는 과정이나, 도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돌이 왜 세워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거나, 경계표시, 권위의 상징 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리선돌이 서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그 앞에 청미천이 흐른다. 이곳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아마 마을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리 선돌 앞에는 길게 누운 돌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 같이 세운 것이 아니고, 후에 갖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선돌의 앞에 누운 돌은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처리의 선돌은 풍년을 구가하는 거석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마을의 신앙물로 추정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작은 문화재 하나라도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문화재의 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가나, 논밭 아무 곳이나 서 있는 것보다 관리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선돌을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안내판에서 바로 들어가는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콘크리트 공장 안에 갇힌 선돌의 바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방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괴어 놓기 때문이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지석묘들도 있다.

2월 26일 의정부, 남양주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갔다. 마을 제의식을 지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보인다. ‘자작리 지석묘’라는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큰 지석묘 한기가 보호철책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포천시 자작동 251-2에 소재하며,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다.


보존 잘되고, 거대한 지석묘가 향토유적?

이렇게 큰 지석묘는 이 인근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석묘 1기가, 한편의 굄돌 벽이 반쯤 파손이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석묘가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향토유적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향토유적은 자치단체에서 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리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을 사방으로 굄돌을 놓아 받쳤다. 탁자식인 이 지석묘는 하부 돌방이 약간 땅속에 묻혀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420cm × 347cm 정도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두께는 45~50c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은 위가 평평하게 조성이 된 것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굄돌)은 사방이 모두 남아있다. 다만 남쪽을 받치고 있는 돌이 반쯤 잘려나갔을 뿐이다. 굄돌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 144cm ×33cm이며, 반대편인 동쪽의 굄돌은 220cm × 144cm × 31cm로 이 돌 역시 화강암의 판석으로 조성하였다.

짧은 단벽의 길이는 북쪽벽이 105cm × 144cm × 28cm이며 장벽 사이에 끼어져 있다. 남쪽의 단벽은 110cm × 85cm × 20cm 의 규모이다. 이 남쪽의 단벽은 15cm 정도만 땅위에 올라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 신경을 써야

이 고인돌은 사방에 벽을 대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이다. 사방의 벽면 안에는 묘실이 되는데, 현재 묘실 바닥에서 덮개석의 하단부까지는 144cm 이고,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 정도이다. 묘실의 넓이는 180cm × 122cm이며, 묘실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지석묘라면 그 부장품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고 해도, 그 지석묘만 갖고도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 가정집의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의 주변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이 지석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지석묘 앞에는 ‘자작리 유적지’가 있다고 안내판이 있으나,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유적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바퀴를 주변을 돌았을 것이다.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형태에 따라 국보가 되었거나 보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향토자료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요즘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를 하지 않은 이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를 관계자들이, 제대로 그 기치를 알고 평가를 할 것인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56번지에 소재한 <충주조동리지석묘>.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이 지석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이 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인돌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인돌이 충주 조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불교와의 접목으로 탑과 같은 형태

충주 조동리의 지석묘는, 조동리 탑평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며 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이 고인돌은 3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여러 개의 자연석을 고임돌로 사용하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조동리 고인돌은 인근에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조동리 선사시대 생활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중원지방의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이 고인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3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형태의 모습은 후에 어떤 계기에 의해서 또 디른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지방의 고인돌과 달리 덮개돌 위에 평면 타원형의 돌을 올려놓아 3층의 탑과 같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조동리 지적묘.



아랫단의 덮개석은 그 크기가 450×350×100cm의 커다란 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굄돌을 이용하고 또 다시 2층을 더 올려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은 본래 고인돌 축조와는 시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고인돌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희한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워

조동리 지석묘가 언제 이렇게 변형된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는 정확히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을을 ‘탑골’ 또는 ‘탑평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의 이름도 이 고인돌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식 고인돌로서 3층 구조의 특이한 외부구조를 갖추고 있는 조동리 고인돌.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청동기시대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는 이 고인돌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처럼 3층으로 올려쌓은 특이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탑골마을 고인돌. 문화재답사는 이런 재미가 있어, 늘 설레게 만든다.

문화재 답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보면 참으로 희한한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주로 넘녀의 성을 상징하는 것들은 민속자료로 지정이 되는데, 그런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자락쯤은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재미를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충북 단양군 적성면 각기리. 이름부터가 유별나다. 이 마을에 가면 마을 입구에 돌이 서 있다. 흔히 ‘입석’ 혹은 ‘선돌’이라고 하는 이 돌은, 청동기시대부터 전해진 것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입구에 세워진 선돌은 두 개의 선돌이 성을 상징하고 있어 특이하다.


남녀를 상징하고 있는 두 기의 선돌

꽃이 피는 철이나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꽃구경이나 단풍구경이다 하면서 여행을 간다고 하면서 난리들을 피는데, 혼자 떠나는 문화재 답사는 늘 쓸쓸하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정리한다는 것 또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재미가 있기도 하다.


 


각기리의 선돌을 보고 한참을 고민을 했다. 왜 두 개의 선돌을 멀찍이 떨어트려, 그 선돌을 금줄로 연결을 했을까? 정월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정성껏 제를 지낸 듯, 암돌과 숫돌을 연결한 금줄에 길지도 남아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개의 돌을 짚으로 이엉을 엮어 둘러쳤다는 것이다.

남성을 상징하는 숫돌은 서쪽에 서 있는데 끝이 뾰족하고 높이가 높다. 높이 275cm 너비 220cm, 두께 60cm 정도로 세모꼴 형태에 가깝다. 이 숫돌의 둘레에는 높이 65~70cm 정도의 단을 쌓아 놓았다. 넓이는 4m 정도에 길이는 3.5m 정도이다. 이런 단을 쌓은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마을의 신표로 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숫돌에 비해 동쪽에 서 있는 암돌은 넙적한 것이 특징이다. 높이는 180cm, 너비는 171cm, 두께 37cm 정도 규모의 자연석이다. 이 두 개의 돌은 17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 돌을 각각 숫바위와 암바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암바위는 이엉을 엮어 치마처럼 밑 부분을 둘렀고, 숫바위는 머리 부분에 씌워놓았다.


둘러친 이엉이 성을 상징하고 있어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이 두개의 선돌이 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돌을 두른 짚으로 만든 이엉 때문이다. 숫돌은 모자를 씌우듯 했고, 암돌은 치마를 둘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린 것이다. 그 이엉으로 인해 양편 돌의 성별이 확연해진다.

마을이름인 <각기리>는 이 선돌의 모습이 뿔처럼 생겼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각기리의 선돌은 도로변 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작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여러 주변 상황을 살펴볼 때 각기리에는 선사시대부터 주변에 집단으로 사람들이 주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각기리에 세워진 두 개의 선돌은 왜 남녀의 성을 상징하는 모습일까? 그것은 아마 이 마을의 여건으로 볼 때 풍농과 다산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마주 봄 두 개의 돌. 그 두 개의 돌을 금줄로 연결을 해 놓았다. 끈끈한 정으로 하나가 되는 부부와 같은 모습이다.

어느 곳에 있던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부부를 상징하는 암바위와 숫바위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것 하나에도 해학을 알고 멋을 아는 선조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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