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로 된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수덕사라는 고찰의 일주문 곁에 자리하고 있는 이 고택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인 이응로선생사적지’. 이 집은 한 때 여관으로 사용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이라는 간판을 아직도 달고 있다.

 

이 수덕여관은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은 이응로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이다. 또한 이응로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택이다.

 

 

수많은 고초를 받은 이응로화백

 

1904112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한 이응로화백은, 향년 84세인 19891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최종국적은 프랑스였다. 이응로화백은 동양화, 서양화는 물론 판화까지도 두루 재능이 뛰어났다. 홍성에서 출생을 하였지만 어린 시절은 예산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이응로화백은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2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었다. 1965년에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 화단과는 단절되다시피 했으며, 주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이 되었다.

 

 

여류화가 나혜석도 살다간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1988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이응로 화백은 집 앞에 있는 바위에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추상화하여 표현한 작품 두 점이 남아있다.

 

이 수덕여관은 수원출신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덕사의 경내가 아닌 이 수덕여관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수덕여관이야말로 우리 미술사에 남녀 거장이 묵었던 곳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곳이다

 

 

방이 많은 것은 여관으로 운영했기 때문

 

수덕여관은 자형의 초가집이다. 정면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들였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듯하다.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은 한편은 6.5, 또 한편은 4칸으로 꾸며졌다.

 

집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측의 날개채는 모두 6개의 방을 드렸다. 아마 이곳에서 손님들이 묵었을 것이다. 객방의 방문 앞에는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으며, 중앙에도 방이 있다. 정자마루를 올라갈 수 있는 이 방은 사랑채 대용으로 사용이 된 듯하다. 좌측 날개채는 안채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좌측은 넓은 툇마루를 놓았으며, 뒤편으로는 장독과 우물이 있다. 이 고택의 앞으로는 덕숭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시원하게 소리를 낸다.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마 이응로 화백이 이 집을 사들인 것도, 주변의 경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수복여관 앞에 더덕구이 집들이 즐비했어요. 그 때만 해도 상당이 싼 값에 더덕구이를 먹을 수 있었죠. 개천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더덕구이에 동동주 한 잔하면, 세상시름을 다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오랜만에 수덕사를 찾아왔더니 입구에 늘어선 점포들로 인해 절의 분위기까지 달라졌다는 관광객의 푸념이다. 수덕여관을 한 바퀴 돌면서 찬찬히 살펴본다. 대문 앞에 꽃을 피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초가집과 딱 어울린다.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간 노화백의 시름도 모르는 체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 그리고 이곳이 수원출신 비운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다는 것을 모르고 무심하게 흐르고 있는 개울의 물. 세월은 그렇게 잊히는 것인가 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일. 언젠가 찾아갔던 유관순 열사 생가지. 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보고 유관순 누나라고 호칭을 했다. 아마 당시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불러대던 유관순 열사의 노랫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운동을 주도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열사의 죽음이 모든 국민 전체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마음이 아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는 했다. 그런 유관순 열사를 다시금 기억하게 만든 것은 201931일이 바로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제 230호 생가지를 돌아보다.

 

열사의 생가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에 소재한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있다. 생가가 아닌 생가지라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임을 의미한다. 집은 그 당시의 것으로 복원을 했지만 당시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여름이 시작되는 날 찾아간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초가 담장 밖에 서 있고, 사립문 안으로는 자형의 안채와 맞은편에 헛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광과 부엌,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집이라야 모두 5칸 남짓하다. 맞은편에는 2칸의 헛간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집에서 어린 한 소녀가 나라를 위해 홀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우내 장터에서 목청을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차마 우산을 쓰기도 죄스럽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죄스럽기만 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열사의 집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야

 

천안은 독립을 상징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한 가운데에 유관순이라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숨져간 충혼이 있다. 19021216일 이곳에서 태어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19193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 온 열사는 유림들과 학교, 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41, 아우내 장터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은 일경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되었고 열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고문에 못 이겨 19209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다.

 

19021117(음력)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로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했다고 한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열사는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4월에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받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19183월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8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어 행복한 시기였다.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 명 사람들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조인원이 한성에서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렇게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런 열사의 모습이 곳곳에서 열린 것이다.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를 가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31일은 3.1만세운동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천안 목천 동리에서 태어났다. 이동년 선생의 생가는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뒤로하고 길을 나선다. 갈 곳은 많고 걸어야할 길도 멀다. 그리고 하루 만에 돌아본 3.1절을 되새길 수 있는 여행지. 3월 한 달은 이렇게 의미있는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명당

 

명당이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吉地)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명당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집터가 명당이기 때문에 그 집안의 자손들이 출세를 했다거나 조상의 묘를 명당에 써 후손들이 고거에 급제하고 입신양명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집안에 재물이 많이 쌓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고로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에서 살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땅의 기운을 얻어 영원히 살기를 원했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가 논리화된 것이 바로 풍수지리설이다. 풍수는 그만큼 자신은 물론 후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명당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런 명당에 대한 집착은 비단 나라의 큰 인물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선호하고 자신의 집을 명당에 세우기를 원했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유계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인 정순왕후 생가는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정순왕후 생가를 찾아갔던 때는 시간이 괘 흘렀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초였으니 말이다.

 

 

서산시 김기흥 전 민선시장 소유

 

정순왕후가 태어났다는 서산 정순왕후 생가. 잡 앞에는 수령 400여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정순왕후가 어린 시절 꿈을 키워주던 나무라도 한다. 현재 보호스로 지정되어 있는 느티나무를 마주하고 솟을 대문이 서 있다. 마침 앞마당에는 정순왕후의 16대손인 민선 1, 2기 서산시장을 지냈던 김기흥 전 시장이 마당에 늘어놓은 화분을 손질하고 있다.

 

이 앞쪽이 다 이집 땅이었어요. 지금은 다 딴 용도로 사용하고 이 터만 남았지만요

꽃을 손질하고 있던 김기흥 전 시장은 자신이 이 집에서 16대를 살아온 후손이라고 말하면서 집은을 돌아보아도 좋다고 승낙을 한다. 솟을 대문을 마주하고 사랑채가 서 있고 측면에 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를 만날 수 있다.

 

 

자 집으로 꾸며진 안채와 사랑채가 잇대어 잇어 전체적은 규모는 자 형의 가옥이다. 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다락방이 있고 그 밑에 아궁이가 있다. 부엌을 지나 안방이 자리하고 있고 세 컨 대청이 중앙에 있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상당히 아늑하고 운치가 있는 집이다. 이곳이 명당터라는 것은 후손들이 입신양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이곳을 아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본관은 경주이다. 정순왕후 조선 영조 21년인 1745 11월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오흥부원군 김한구이고, 어머니는 원주 원씨 원명직의 딸 원풍부부인이다. 김한구의 가문은 효종시대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의 후손으로 충청도 서산에 세거하였다.

 

정순왕후는 정성왕후의 사망 뒤인 영조35년인 1735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서산에 세거하면서 산림 가문답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있었던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국혼 후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필두로 정계로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였으며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남당을 이루어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과 대립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서진, 한지민 등이 출연한 MBC 77부작 대하드라마 이산을 보면 정순왕후는 이상 정조와 많은 갈등을 빚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축성하고 강한 왕권과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면서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모두를 포용했던 현군이다. 그런 이산에서 보이듯 정순왕후는 그저 영조의 계비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정조의 승하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정도로 여장부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순왕후가 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살았다는 서산 정순왕후 생가. 마당 한 가운데 자라고 있는 향나무 한 그루가 그 때이 역사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듯하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9호 서산 김기현가옥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9호 김기현 가옥은 살아있는 집이다. 현지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서산버스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중간 유계리 입구에서 하차 도보로 5분정도가 소요된다.

 

승용차로 찾아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 해미 유계리 입구 서산 김기현가옥을 이용하거나, 경부고속도로 천안I.C 아산 예산 덕산 해미 유계리입구 서산 김기현가옥으로 찾아갈 수가 있다.

 

 

전체적으로 자 형의 고택

 

서산 김기현가옥은 한다리라 부르는 평지 마을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동향한 전통 목조 한와가로 건축의 기법과 목부재의 상태, 가옥의 배치 등으로 보아 19세기 중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래 이집은 태안에 살던 이씨가 건립했는데, 풍수지리설에 이씨가 살터가 아니고 김씨가 살아야 할 터라고 하여, 경주김씨인 김기현의 선조가 이 가옥을 사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가옥은 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자형의 평면을 이룬 가옥이다.

 

 

평야마을에 자리잡아 북동향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중, 상류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한편에 안채를 두었다는 것이 이 집의 색다른 구조이다. 아마도 이는 일조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차양지붕이 특징인 김기현 가옥

 

사랑채는 안채보다 간결한 구조를 한 3칸 집으로, 사랑채 남쪽에 단 차양지붕이 돋보인다. 차양지붕은 사랑채 1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다.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더 길게 처리하였다.

 

안채의 뒷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일종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도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김기현 가옥은 정말 사람이 살고 싶은 그런 집이었다. 보기만 해도 여기저기 소박함이 배어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전국의 많은 고택들을 돌아보았지만 서산 김기현 가옥만큼 정갈한 집은 그리 많지가 않았던 것 같다. 안채며 사랑채의 구성이나 행랑채의 소박함. 그리고 팔모기둥 위에 놓은 차양지붕 등. 올 가을에 단풍이 들 무렵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68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1신경섭 가옥(申慶燮 家屋)’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사랑채 중간에 마루를 두어서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의 결과 단청의 색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집이다. 대문채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며, 신석붕의 효자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경섭 가옥을 들려온 것은 꽤 나 시간이 지났다. 은행의 열매가 떨어져 냄새가 코를 진동할 때였으니. 문화재 답사를 마치면 바로 글을 써야 감을 잊지 않지만, 한꺼번에 많은 문화재를 답사하고 나면, 그렇게 바로 글을 적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이렇게 철지난 글을 적어야할 때가 있다.

 

 

자 형의 사랑채가 돋보이는 집

 

신경섭 가옥을 찾았을 때 후원 담장 한편이 트여있다. 앞으로 돌아가니 대문인 듯 효자정려가 걸려있는 문은 잠겨 있다. 담 밖을 돌면서 집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저 편으로 돌면 문이 열려 있으니, 그쪽으로 돌아가 보라고 하신다. 그럴 때면 정말 안내를 해 준 분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신경섭 가옥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집으로 자 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자 형으로 자리를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자 형으로 구성이 된 충청도의 양반가옥이다. 이 가옥은 안채에 안방, 건넌방, 대청, 고방, 부엌을 들였고, 사랑채의 상량문에는 승정기원후사계묘라고 적고 있어, 184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한편 끝에는 높임 누마루 방을 두어 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 곁으로 돌아가니 후원 앞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 누마루 정자 방에서 바라보는 후원을 바라보는 정취가 일품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와 안채 중간에는 돌우물이 자리하고 있어, 자칫 무료한 안마당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양반가옥의 기품을 지키는 집

 

효자정려가 걸려있는 대문은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동선을 마련한 듯하다. 열려있는 또 한편의 문은 들어가면서 좌측에 4칸의 광채를 달아냈고, 우측으로는 5칸의 안채가 있다. 안채는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의 순으로 조성을 했는데, 건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두었다.

 

 

안채 부엌의 앞에로는 돌우물을 마련해, 부엌을 사용하는 주부들의 이용에 편리할 수 있도록 동선에 신경을 쓴 듯하다. 안채 뒤편에는 장독대를 두었으며, 마당 가운데에는 작은 화원을 마련하였다. 집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양반가옥의 기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집이다. 신경섭 가옥을 찾았던 날이 106일 보령시 답사 때였으니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 쪽문으로 출입을 했을까?

 

집안을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와 굴뚝을 찍고 있는데, 곁에 작은 쪽문 하나가 보인다. 마침 문이 열려있기에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또 하나의 쪽문이 있다. 문에는 모정문(母情門)’이라고 쓴 작은 나무패가 걸려있다. 어머니의 정을 그리는 문일까? 그 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문의 명칭을 정한 것일까?

 

 

이렇게 작은 문 하나에는 많은 사연이 있을 듯도 한데, 물을 사람이 없으니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그 모정문 밖에 효자정려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으로 사랑채로 드나들면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택을 찾아다니면서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기만 하다. 그래서 더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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