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성은 대개 산 위에 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쉽다. 그러나 성의 종류를 보면,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자리를 잡은 산성과, 수원 화성과 같이 평지와 산을 이용해 쌓은 성곽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홍주성과 같이 평지에 성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명칭을 보아 ‘○○산성’이란 명칭이면 산을 이용해 성을 쌓은 것이고, ‘○○성’이면 평지에 쌓은 성으로 볼 수가 있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가 사라지고, 성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동문이었던 조양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곳까지 성이 연결이 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8월 29일이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왜 하필 많은 성 가운데 홍주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홍주성이 국치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항일의 성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과 홍주성 전투그림. 칼과 죽창을 든 의병들이
신식무기인 총을 가진 일본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을사보호 조약을 반대한 의병들의 항거

국치의 시작이기도 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한 의병들이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다. 홍주성에는 의병장인 민종식과 이세영,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들을 섬멸하고 3일간 항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홍산에 의병을 집결시킨 뒤, 충청남도 서부지역인 서천과 보령, 청양 등 충남의 요지를 점령한 후,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이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게 되자, 일본군은 이해 5월 31일 홍주성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죽고, 145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홍주성.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 견고하게 쌓았다.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돌출이 된 치가 보인다(가운데와 아래)

의병장 이세영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산에서 민종식을 도와 참모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붙잡혀, 종신유형을 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의병장 안병찬은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변호사가 된 안병찬은 1909년 안중근의사 공판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발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비록 의병들이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홍주성에 머물면서 신식화기를 가진 일본군과 3일간이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홍주성이 언제 축성이 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초기 문종 원년인 1451년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홍주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터인 듯하다. 성벽이 트여있는 안으로 들어가니 와편이 보인다. 전각이 이곳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초기 성 쌓기 방법을 충실히 따른 성곽

홍주성은 문종 때 성 주위가 4,856척에 높이가 11척이라고 적고 있다. 일부가 사라진 홍주성은 홍성군에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중이라고 한다. 성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네모난 돌들을 가지런히 맞춘 성벽에는 담장이가 타고 오른다. 성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성은 지형을 이용해 쌓았으며, 지리적으로 비워져 허전한 곳에는 치를 내어 보강을 하였다. 잠시 걸어가니 성벽이 트인 곳이 나온다. 아마 성문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터진 곳으로 들어가니 한편에 와편이 쌓여있다.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주성에는 모두 세 곳의 문이 있었다. 동문인 조양문과 북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위치로 보아 이곳이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몇 기의 비들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의 비는 충남 지정 문화재자료 제166호인 ‘홍주성 수성비’이다.


홍주성을 보수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한 수성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고 볼품없는 비 하나. 이 비는 순조 24년인 1824년 황폐된 홍주성을 보수하면서 세운비로, 내용을 보면 순조 23년 이곳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상을 수리하기로 하고, 그 해 8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고 기록을 했다. 완성된 성의 길이는 7리이고, 공사시간은 100일이라는 것이다.

한양을 지키는 길목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홍주성. 오늘 이 성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픈 기억이라고 해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아픔을 거울삼아, 다시는 가슴 찢기는 또 다른 형태의‘국치’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성벽 위에 난 길과 담장이로 인해 아름다운 성벽. 이 아름다움은 수많은 선조들의 피로 지켜진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피로 지켜지는 역사는 없어야 한다.

고사부리성, 이름까지도 생소하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성이기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을까? 정읍을 답사하면서 내심 고사부리성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성은 고부리의 한 편 산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성을 들어서는 입구에 안내판이 없어, 몇 번이고 길을 물어 길을 찾았다. 좁은 길목으로 올라가니 대나무 밭이 보인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일원에 있는 고사부리성은 해발 132m의 성황산 정상부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이다.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축성이 되어 통일신라 때 개축되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영조 41년인 1765년 읍치가 이전되기까지 계속적으로 활용되었던 성곽이라고 한다.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
 

토성으로 남아있는 고사부리성

고사부리성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만 해도 돌로 쌓은 석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후기에 토성으로 개축이 된 성곽으로 둘레는 1,050m이며, 지표조사 및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문지 3개소, 집수정, 조선시대 건물지 12개소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상부상항인’이라는 인각와, 기마병의 선각와편, 통일신라시대의 <本彼官> 명문와 등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고사부리성은 잔존상태가 양호한 다양한 유구와 유물 등이 발굴이 되어, 우리나라 고대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북문 터에서 출토된 '상부상항(上部上巷)' 명의 도장이 찍힌 기와는, 공주, 부여지역의 백제유적이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인각와 등과는 다르게, 수도를 5부로 나누고 각 부를 다시 오항으로 나눈 '오부오항‘의 표시를 한 장방형 모양의 도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는 고사부리성 길

마을 입구에 차를 대고 천천히 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위로 올라가니, 해발 132m의 산이라고 해도 한 여름 더위에는 숨이 차다. 길은 비로 인해 여기저기 파여 있고, 길가에는 누군가 대를 잘라 놓았는지 대나무가 길을 막는다.

백제의 한 축이었을 고사부리성

숲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을 지나니 갑자기 앞이 환하게 트인다. 앞에는 석성임을 알 수 있는 비탈진 곳이 보인다. 좌측으로는 성을 관리하는 듯한 건물 한 동이 보이고 안내판이 서 있다. 사적 제494호로 지정이 된 성이다. 그 위 성곽의 가운데가 잘록한 것을 보니 이곳에 문지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곽 위로 오르니 저 아래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성 위에 오르면 밑으로 마을이 보인다. 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 높지 않은 것만 같았던 성이다. 그런데도 시야가 확 트여 있는 것이, 이곳이 성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여기저기에는 주추로 쓰였을 돌들이 흩어져 있다. 북문지에는 석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나, 성을 돌기에는 넝쿨로 인해 불가능 하다.

백제 때 처음으로 축성을 한 후 조선조 영조 때까지 기능을 다했다는 고사부리성. 그저 어느 마을 뒤편 동산에 쌓여진 흙더미 정도로 보이는 이 성은 학술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어디를 가나 수많은 문화재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말로만 하는 문화사랑과 문화민족이기 보다는, 단 하나의 정신적인 행동으로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인지. 고사부리성을 내려오면서 입구정비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건물의 주추였을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 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67년 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토기조각, 청자조각,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절터가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 문화재의 가치를 보아 보물로 지정을 했다고 하지만, 석불과 불대좌, 광배 등을 보면 많은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걸리를 찾아 나선 길은 정말 한 낮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로부터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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