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사적 제206호인 화성 융릉과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소재한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 역시 사후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다. 이 융릉은 합장 능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후에 의황제로 추존한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한 능이다.

 

융릉은 조선 후기의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 또한 매우 아름답다.

 

 

여러 번 명칭이 바뀐 융릉

 

1762년 윤 5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12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3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1112,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뛰어난 융릉의 석물과 곤신지

 

77일 오후 융건릉을 찾아 나섰다. 융건릉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 융릉의 석물을 보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에 대해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어서였다. 동행한 지인이 문화재에 대해서는 남다르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융릉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재실 안 마당에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된 개비자나무며 각종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융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릉으로 들어가는 숲은 이 계절이 되면 천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다. 노송이 우거지고 잘 닦여진 숲길에는 까치와 청설모 등이 길손을 맞이한다.

 

숲길을 지나 융릉 가까이가면 좌측에 곤신지가 나타난다.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이며 이곳이 길지이기 때문에 조성했다고 한다. 원형의 곤신지에는 각종 색을 띤 물고기들이 유영을 하고 있다.

 

천천히 융릉으로 향한다. 융릉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들을 보다가 옛 이야기 하나를 떠올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 주변 소나무를 송충이들이 갉아먹자 정조는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송충이를 바라보다가 "아버님이 잠드신 수풀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이 불효자식의 오장육부를 갉아먹으라"며 송충이를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때문인가?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와 송충이들을 모두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융릉 주변의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색이 곱고 생육이 좋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사적 융릉. 길은 자연적인 흙길 그대로이.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