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둘러 길을 나섰다. 2013년의 첫 답사지역을 일부러 강원도 최북단이라는 고성군으로 정했다. 이곳에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곳이기에,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이다. 5일 저녁 무렵 심하게 바람이 분다. 옷깃을 아무리 여미어도 살을 에일 듯 파고드는 바람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119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 금강산 법보정사(주지 진관스님)라는 인법당을 모신 암자였다. 인법당이란 법당과 살림살이를 하는 요사가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붙어있는 작은 법당을 말한다. 이곳에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준 아기장수 이야기

 

법보정사가 있는 뒤편 산을 노인봉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강한 바람과 심한 경사로 나무들이 살지 못하고 벌거숭이 인데다가 돌바위가 영을 덮어 그 모양이 마치 늙은 노인의 머리처럼 보인다해서 노인산(老人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에 옛 절터라는 곳을 돌아보았다.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 탄압으로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 절터에도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찾아 기도하며 소원성취 되기를 빌어 왔다고 하는데, 어느 해 이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노총각이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 백일동안 노인산과 절터를 찾아 기도 끝에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는 것.

 

 

 

마침 법보정사에는 이 마을에 사신다는 신도 한 분이 와 계셨다. 박기선(, 70) 할머니는 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중에 아기장수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법보정사 건너 편 앞에 옛날에 절이 있었데요. 그곳을 마을에서는 절터라고 불러요. 그 절에서 자식이 없는 한 부부가 열심히 치성을 드려 아이를 하나 점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니 양편 어깨 밑에 날개가 있었데요, 나중에 크면 큰 인물이 될 아이죠.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장수가 나면 바로 죽여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걱정을 하다가 아기장수의 아버지가 날개를 인두로 지져버렸다고 하네요. 아이가 뜨거우나 당연히 온 동네가 떠날 듯 울어 젖혔겠죠. 그때 화진포 바닷물 속에서 천마가 한 마리 튀어나오더니, 아기장수를 태우고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 절이 퇴락해 버렸단다. 그리고 한 3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기도생활을 했는데, 이상하게 오래들 있지 못하고 자주 떠났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이 절이 있는 인근의 지기가 상당히 세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

 

 

전설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법보정사 뒤편에 보면 산신각 터라고 시멘으로 조성을 해 놓은 곳이 있어요. 그 뒤로는 쪼개진 바위덩어리가 있고요. 이 마을분들 중 많은 분들이 그곳을 올라가면 괜히 넘어지고는 한답니다. 그래서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질 않아요.”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보고 그 뒤편 노인봉과 일직선으로 자리한 산신각 터를 돌아본다. 이곳에 옛날에 산신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세를 보아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노인봉을 배산으로 하고 지어진 산신각. 그 산신각이 바라다보는 곳은 동해안 화진포 방향에 솟아있는 고성산이라고 부른다.

 

 

날개를 가진 아기장수가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태어났다는 현내면 산학리. 이곳은 금강산으로 왕래를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던 곳이다. 이 산학리 논 자락에 서 있는 커다란 노송 한 그루와 불망비 1석이 있어,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소나무와 불망비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전설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전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곳 노인봉 아래 옛 절터와 산신각터,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돌아보면서, 이곳에는 아기장수 이야기 외에도 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할 것만 같아 쉽게 길을 떠나지 못한다. 숨은 이야기들은 늘 신비롭기 때문이지만.

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대원사는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이 지난 사찰이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인 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는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을 보수하였고,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설교를 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소된 대원사를 중창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殿), 누(樓), 당(當), 각(閣),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 이후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집 부근에는 옛적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과 군자정이 있다.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의 천왕사 성모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들린 대원사는, 한창 관람을 위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대원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방장산 대원사라는 일주문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것을 둘러보고 싶어서인가 보다.

 

 

대원사와 인근 지리산 일원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만큼 자연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새로 깔아 놓은 아스팔트가 발목을 마구 잡아끈다. 아마 너무 수려한 절경이라는 대원사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가는 길을 택해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내리는 잔비로 길이 푹푹 빠져버리니 이래저래 대원사를 찾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아름다운 계곡과 어우러진 대원사

 

절이 보이는 입구에 다다르니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계곡이 보인다. 대원사의 계곡은 대원사입구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 약2km에 이르는데, 산이 높고 물이 맑을 뿐 아니라 바위틈 사이로 뿜어내는 물과 괴암은 절경이다. 용이 100년간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소, 가락국 마지막 구형왕이 이곳으로 와서 소와 말의먹이를 먹였다고 하는 소막골 등이 위치하고 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대원사 앞에 이르니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짙은 신록을 자랑하고 있다. 빗줄기가 거세지더니 급기야는 소나기로 변했다. 우산도 없이 여정을 재촉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그래도 어찌하랴 다만 몇 장이라도 사진을 담아야겠다고 작정을 한다.

 

손으로 카메라는 덮고 사진을 몇 장 찍는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다. 빗방울이 금방 렌즈에 떨어져 얼룩이 져 버린다. 지난 번 대원사를 찾던 날도 봄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져 사진을 찍지 못하고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번에도 또 비가 온다. 대원사와 나와는 아무래도 비로 맺어진 인연인가 보다.

 

 

초겨울에 달려가고 싶은 대원사

 

대원사는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아담하고 가지런한 가람이다. 이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절집이 1,500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지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행승들이 이 절집을 찾았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거쳤겠는가? 지리산이라는 지명도 알고 보면 이곳에 머물면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하여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대원(大源)이니 계곡에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듯 뜻을 세운 일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오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몇 장인가 더 사진을 찍은 후 대원사를 떠난다. 오늘 갑자기 방장산 대원사로 달려가고 싶다. 아마 그 절경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비로 인해 맺어졌던 인연이 또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이다.

홍천에 있는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한데, 홍천읍에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작산은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우며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락, 그리고 눈 덮인 겨울산이 일품이다.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까지 약12km에 이르는 수타사 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沼)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고,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이 우거진 숲이 있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을 정도다.

 

 

명산 중 명산 공작산

 

한국 100대 명산 중 한 곳인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 고찰 수타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7년(서기 708년)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적광전의 팔작지붕과 1364년 만든 사인비구의 동종,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를 비롯한 대적광전, 범종, 후불탱화, 홍우당부도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고찰이다

 

수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효시는 신라 성덕왕 7년인 708년에 원효가 우적산에 창건한 일월사로부터 전한다. 그 뒤 영서지방의 명찰로 꼽혔으며, 세조 3년인 145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뒤 ‘수타사(水墮寺)’라고 칭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에 공잠이 재건을 하였으며, 1644년 학준이 당우를 확장한 이래, 계철·도전·승해·천읍 등이 불사를 꾸준히 계속하여 1683년(숙종 9)에는 옛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와 같은 절 이름이 된 것은 1811년(순조 11)이며, 1861년(철종 12) 윤치가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빗속에 운치있는 수타사

 

지난 달 오후 비가 추적이는 날 수타사를 찾았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났지만 비가 와서인가 날이 어둡다. 홍천에서 양평으로 가는 왕복 4차선 도로에서 10km 정도를 공작산 쪽으로 향해 가면 수타사가 나온다. 오래된 천년고찰답게 수타사는 고풍스럽다.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대적광전은 보수가 끝이 난 듯 새로운 목재를 이용한 부분이 오히려 신선함이 감돌게 한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수타사 사인비구 동종이다. 사인비구 동종은 모두 8개가 모두 보불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 제11호로 지정이 된 수타사의 사인비구 동종은 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주성동종인 사인비구 동종은 단조롭기는 하나 그 주조법이 뛰어나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새롭게 조성이 된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 참례를 하고 주변을 살펴본다. 마음에 염원하는 바를 지극히 빌어보고 옆을 보니 새로 조성된 탱화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탱화를 그대로 새로 그렸는데 하단 부분을 보니 우리 풍물이 그려져 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앞에 놓인 기물로 보아 지장탱화인 듯하다. 불과 30여분 동안 정신없이 돌아 본 수타사. 천년고찰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듯하다. 다시 한 번 시간을 내어 한낮에 찬찬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산문을 나선다.

 

 

나오는 길에 들린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소조사천왕상이 모셔진 전각 안에는 사천왕이 세상에 따라붙는 온갖 사귀를 막아준다는 듯 미소를 보인다. 그래서 절집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마음 편히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장안사는 수려한 불광산 도시자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장안사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서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원효대사가 척판암과 함께 창건하여 쌍계사라 했는데, 신라 애장왕 때인 809년에 장안사라 고쳤다 한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인조 8년인 1631년에 의월대사가 다시 중창하였고 1941년 각현스님이 중수하였다. 1987년 종각을 새로 세우고 요사를 중창하고 단장하였다. 사천왕이 버티고 있는 대문을 지나, 정면에 석가여래삼존불과 후불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는 응진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인도 등지에서 3차례에 걸쳐 들여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7기를 모시고 있는 3층 석탑과, 뒤편으로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싼 산신각이 있다.


눈을 부라린 사천왕이 객을 맞이해


장안사 입구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다. 절문 앞에는 각종 석불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달마대사를 커다랗게 조성을 해 놓은 것이다. 불광산 장안사라 쓴 현판이 걸린 문루 아래에는 사천왕이 양각이 되어 눈을 부라리고 있다. 사악한 잡귀들을 물리친다니 저런 표정이 딱 어울릴듯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석탑과 그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절집 안은 오밀조밀하니 좁은 공간에 누각들이 정리가 되어 있다. 대웅전 좌편 명부전 뒤에는 극락전이 있는데 극락전 안에는 와불이 모셔져 있고. 이 와불 역시 부처님의 사라가 복장이 되어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장전이나 명부전, 혹은 극락전에 주불이 지장보살님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와불은 부처님의 열반 당시 모습이라고 하여 일부 국가에서는 와불을 모신 곳이 바로 명부전이 되기도 한단다.

 

 


척판구중의 전설은 곳곳에 전해

 

장안사를 돌아보고 나서 좀 더 위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척판암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척판암은 원효사대가 수도생활 도중 천안통으로 중국 종남산 운제사 대웅전이 무너지는 것을 알고, 소반을 던져 대웅전에 있던 1천 여 명의 중국승려를 구했다는 전설에서 척판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소반을 던진 것일까? 어릴 적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 들렸을 때 스님 한분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척판암에 계시던 원효대사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번 만행 길에 깨달았으니 벌써 40년이 훌쩍 지난 뒤라 감개가 무량하다.


스님의 말씀은 원효대사가 천안통을 열어보니 운제사 대웅전이 곧 무너질 것 같은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는 지라, 얼른 널판 하나를 주워 그곳에 「척판구중(擲板求衆)」이라고 적어 던졌는데 종남산 운제사 스님이 하늘을 보니 커다란 널판 하나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라 그것을 보고 나서 스님들에게 얼른 나와서 저것 좀 보라고 소리를 쳤단다.

 

 


대웅전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달려나와 그 판자를 보는 순간 대웅전이 무너지고, 그 판자도 땅에 떨어졌는데 판자에는 척판구중이라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즉 ‘판자를 던져 무리를 구한다.’라는·말이다.


이번 만행 길은 동해안의 정자 탐방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결국은 척판암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를 못했다. 언제가 그곳을 올라 원효스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얻어가기를 바랄 수밖에. 그것이 바람따라 길을 걷는 나그네의 발길이라면, 언젠가는 꼭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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