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될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이곳에 떨어진 빗줄기는 그렇게 흘러 세 곳의 물길로 합류가 된다.

 

 

양대 강의 발원지 태백

 

강원도 태백의 해발 935m인 삼수령 마루에 적혀있는 글이다. 삼수령의 고개이름은 큰 피재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태백시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3대강이 발원하고, 민족의 척추인 태백산을 상징하는 삼수령이기도 하다. 태백에서 분출되는 낙동강은 남으로 흘러 영남 곡창의 질펀한 풍요를 점지하고, 공업입국의 공도들을 자리하게 했다.

 

한강 역시 동북서로 물길을 만들면서 한만족의 수도를 일깨우고, 부국의 기틀인 경인지역을 일으켜 세웠다. 오십천도 동으로 흘러 동해안 시대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삼수령 고개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분은 이곳에 비가내리거나 눈이 내려 녹아 물이 흐르면, 남으로는 낙동강으로 스며들고, 동북으로는 한강으로 스며들며, 동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강의 발원이란 끊임없이 물이 나오는 곳을 그 발원지로 삼기 때문에 삼수령에 떨어지는 비가 발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떨어지는 비가 3대 강과 천으로 스며들어 그 물과 합류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삼수정에 오르다.

 

삼수령 분기점에는 탑이 서 있다. 해발과 이곳이 오십천과 한강, 낙동강의 시원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삼수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 삼수령은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길이다.

 

 

삼수령 탑이 서있는 곁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정자가 서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정자는 누각으로 지어졌는데, 삼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에 오르니 밑으로는 깊은 골이 보이고, 저 멀리 백두대간의 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깊은 숨을 쉬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누구라 이곳에 올라 글 하나 적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정자가 오래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면,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올라 글 몇 수 남겼을 만한 그러한 정취다. 나라도 글을 잘 쓴다면 짧은 글 한토막이라도 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런 시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참으로 역부족한 인사이니 어찌하랴. 능력이 없음을 탓할 수밖에.

 

 

삼수령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태백시내에서 이곳을 지나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로 갈 수가 있고, 이곳을 넘어 태백으로 들어가면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를 만날 수가 있다. 삼수정 위에서 주변 경치를 돌아본다. 걸어서 이곳을 올랐다면 그대로 선계가 아닐까?

 

지금 이렇게 차로 오른 삼수령이 조금은 서운한 것은, 그런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서인가 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삼수령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도 하늘에서 내려선 가족들은 또 이렇게 세 곳으로 헤어져 물길을 만들려나?

동해시 북평동사무소는 동해에서 삼척으로 내려가는 7번국도 우편에 있다. 이 북평동사무소 맞은편으로 길이 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동해와 만나는 막다른 곳을 <갯목>이라고 한다. 갯목이란 갯벌이 시작되는 목(입구)이라는 뜻인지, 혹은 포구가 열리는 목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 갯목을 향해 가다가 보면 좌측에 동해 한가운데 커다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시멘트공장이 있다. 공장과 길 가운데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다를 매립하여 세운 듯하다. 시멘트 공장 중간쯤에 우측으로 만경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150m를 올라가라는 표시를 따라 나무로 흙을 받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 등성이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정자, 그러나 지금은 절경이 사라져

 

만경대(萬景臺). 동해시청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으나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북평동사무소에 들어가 정자 있는 곳을 물으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설명대로 어렵지 않게 찾아온 만경대. 그 위에 오르니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그 동해를 바라보기에는 지금은 쉽지가 않다. 커다란 공룡과 같은 시멘트공장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일 잘 아는 선조님들이 이곳이 이리 변할지는 모르셨나보다.

 

구미산 성산봉에 자리한 만경대는 조선조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삼척에 사는 신당(新堂) 김공훈이 창건한 정자다. 동해에 있는 정자들이 100여년이 안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이 만경대는 40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만경대는 동은 망망대해요, 북으로는 송림에 백사장이 10리에 걸쳐있고, 서편으로는 두타산(頭陀山)의 절경이 펼쳐지며, 절벽 아래로는 전천강이 동해로 흐르니 가히 관동 제일경이라 하는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그동안 만경대는 고종 9년인 1872년과 1924년 갑자에 걸쳐 두 차례 중건을 하였다.

 

만경대 안에는 수많은 글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 1872년 중수 때 한성부윤 이남식이 쓴 <海上名區>라는 현판은 가히 만경대가 얼마나 절경에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절경에 자리 잡은 많은 정자들이 만경대라는 이름을 걸었으나 동해의 만경대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절경이었으리라.

 

 

 

또 한곳의 절경 호해정

 

아쉬운 발걸음으로 만경대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집 몇 채 되지 않는 해안가 마을이 보인다. 갯목이라 부르는 이 동네는 시멘트공장의 끄트머리와 나란히 있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만 아니었으면 이 또한 절경이리라. 호해정(湖海亭),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최덕규 선생 등 39인이 계를 조직해 1947년 4월에 구미산 갯목 할매바위 옆에 18평의 호해정을 세웠다. 그동안 호해정은 1977년 5월과 1990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

 

갯목 끝자락에 자리한 호해정은 60년 동안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할매바위와 나란히 서 있다. 할매바위는 동해를 바라보고 노송 몇 그루와 벗 삼아 있는데 그 풍광이 아름답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과 1979년 동해항의 개항이 없었더라면 그 얼마나 운치를 더했을 것인가? 할매바위인 마고암(麻姑岩)에는 그 전설을 다해 최윤상이 쓴 글이 있다.

 

 

 

아래로는 바다를 진압하며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광활한 천지에 높이 우뚝 앉아 있어

편안한 자취가 마치 마고와 같으니

선녀가 천년 뒤에 홀연히 나타나

돌이 되었구나.

 

갯목으로 가는 길에 만난 만경대와 호해정. 두 곳의 정자는 그렇게 다른 모습을 하면서 나그네를 맞이하지만, 그 안에 걸린 수많은 게판들은 제각각 자신이 최고라고 뽐내고 있었다. 그 자랑을 벗 삼아 나그네의 여정은 계속되고...

‘해가(海歌)’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구지가, 서로 달라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 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용이 아닌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은 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무릉계곡은 국민관광지 제77호로 1977년에 지정이 된 곳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무릉계곡은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동해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금란정과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는 무릉반석(아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란정은 조선조 말 향교인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한 유생들이 모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승 무릉계곡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 정각을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계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새롭게 선경에 조성한 금란정

 

깨끗하게 정리가 된 금란정은 근자에 들어 새롭게 조성한 정자다. 아마 1945년에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반석에는 깊게 판 많은 글자들이 사람의 눈길을 끈다. 한문으로 된 문구들을 바라보며 학식이 없음을 탓한다. 어찌하랴,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그냥 바라다 보고만 있어야지.

 

누가 같이 동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반석의 넓이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장관에 취해 잠시 정자는 잊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해가 간다. 이 절경을 보고 시 한수 읊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에 취해 흥얼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묵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이곳에 와 정자를 지어 풀어버리려고 했던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그분들도 그런 심정이지나 않았을까.

 

 

금란정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무릉계곡을 찾아 계곡 입구에서 삼화사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일주문 전에 정자가 있다. 무릉계곡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효가 사거리 - 우회전 - 4.4km - 삼화동3거리 - 좌회전 - 5.3km -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가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현지교통을 이용하려면 동해시외버스터미널-무릉계곡으로 30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비가 오는 날 찾은 울진 평해. 솔향이 짙은 해송 숲에 자리한 정자.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시 한 수가 나올듯한 곳이다. 정철의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경이라고 하는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이 되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퇴락하였던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다.

 

그 후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이곳 사람인 황만영, 전자문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월송에 주둔한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9년에는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2층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떠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제일경이란 곳이기에 그만큼 많은 수난을 당했는가 보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면 안 되는지?

 

비가 추적거리고 온다. 지난 한 해, 이상하게 맑던 날이, 답사 길에 오르기만 하면 비가 뿌린다. 한번 길을 나서면 2~3일을 돌아오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계획을 세우고 떠난 길이 무색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내딛은 발길이니 다는 못 다닌다고 해도, 쉴 수는 없지 않은가?

 

월송정을 찾은 날은 딴 날마다 비가 더 내린다. 치에서 내려 한창을 망설인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그래도 입구까지 왔는데 길을 돌릴 수는 없다. 천천히 숲길을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에서 뿜어 나오는 향내가 코를 간질인다. 아마 이 월송정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 소나무의 향기에 취하지는 않았을까?

 

 

 

화랑의 이야기는 동해안으로 이어지고

 

해송 숲에 둘러싸인 월송정. 월송정은 신라 때 사선(四仙)이라고 하는 영랑, 술랑, 남속, 안상이라는 하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옮겨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단다. 아름다운 곳은 전설이 만들어지고, 그 전설은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하는 것이 우리네의 조상들이었다.

 

그만큼 멋과 여유를 즐겼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보면 위에 네 화랑은 강원도로 길을 잡아 금강산까지 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속초에서 한 호수에 반했다. 그 중 한 명인 화랑 영랑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는데, 그가 반한 호수가 바로 설악산을 품고 동해와 맞닿은 석호인 ‘영랑호’이다.

 

 

영랑은 결국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속초 보광사 뒤편의 관음바위라는 곳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도 있다. 동해 안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겨울 설화가 아름다운 곳

 

월송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니 이층 누각으로 된 누정답게 시야가 확 트인다. 그래서 이곳은 동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울 경치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월송정. 아마 해송에 가지에 부러지게 쌓인 겨울눈인 ‘설화(雪花)’때문이란 생각이다.

 

 

정자를 내려 소나무 숲을 걸어본다. 비가 잠시 멈춘 듯 해 우산을 접는다. 해송가지에 맺혔던 물방울이 탁탁 소리를 내며 주변에 떨어진다. 그 소리가 더욱 경쾌하다. 신라의 사선인 영랑 등이 이곳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전설도 다 그랬을 것이란 생각에 혼자 미소를 머금는다.

 

이곳을 찾은 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아니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까? 그것은 여유의 차이일 듯하다. 아마 비가 오는 날 월송정을 찾았다면 누구나 다 수긍을 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비가 오는 날 그럼 험한 꼴로 정자를 누비고 다니느냐고. 글쎄다.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지를 못했다. 이제 돌아본 정자가 불과 100여 개. 전국에 얼마나 많은 정자가 있는 줄 모른다. 한 고장에만도 100여개가 넘는 정자를 가진 곳도 있으니 말이다.

 

사연도 참 많다. 정자마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바람이 늘 머무는 곳이다. 그 바람들이 세상이야기를 전해주는 곳이 바로 정자이다. 그래서 난 정자를 찾을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바람이 전해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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