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 가흥1동 264번지에는 보물 제221호인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앞으로는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바위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마애삼존상이다. 이 마애삼존상은 앞에서 보면 바위에 조각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삼존불이 새겨진 돌이 바위와는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주변으로는 크기 20㎝내외의 사각형 흠이 나있고, 삼존불상 앞으로도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마애삼존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삼존불 중앙에 본존불은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으며, 좌우에 협시불은 입상으로 조각을 하였다.



영주시 가흥동 마애삼존상과 참례를 하는 사람들

통일신라 초기의 우수한 석조물


삼존불 중 중앙에 좌정한 본존불의 높이는 330cm 정도이다. 우협시보살은 198cm, 좌협시 보살은 약간 작은 195cm이다. 이 삼존불상은 두텁게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암반을 파들어가면서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본존불을 거대하게 조각을 하고, 양편에 협시불은 본존불 쪽으로 약간 기울 듯 조성을 하였다.


본존불은 소발로 육계가 뚜렷하다. 두터운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수인을 보면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이 마애삼존불에 새겨진 불상은 비교적 살이 올라 통통한 편이며, 둥근 얼굴의 상호가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 역시 얼굴이 통통하다. 중앙의 본존불은 앙련을 새긴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며, 좌우 협시불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본존불의 뒤편에 있는 광배는 상단이 뾰죽한 보주형이다. 연화문을 둥그렇게 중앙을 에워쌓 듯 두르고 있고, 바같으로는 꽃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돋을새김으로 둘러놓았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마련을 했으며, 무릎에 닿게 연화문 8엽을 앙련으로 새겨 넣었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도 본존불과 같은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누군가 눈을 다 파내


좌측에 서있는 협시불은 왼팔을 어깨 위까지 들고 오른팔은 배 앞으로 대고 있다. 우측의 협시불은 두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는데, 보관에는 보병이 새겨져 있다. 양편 협시불의 팔목에 걸친 천의 자락이 두터운데도 불구하고, 옷주름 선 등이 유연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신체 등의 비례가 알맞은 것으로 보아, 조각술이 뛰어난 우수한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불상은 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조각작품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삼존불상을 보면 누군가 양쪽 눈을 모두 깊게 파버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조성이 되었을리는 없는 것이고 보면,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본존불만이 아니고 양편의 협시불까지 그렇게 눈을 파낸 것이다. 그렇게 훼손한 얼굴이 흉하기만 하다.


천년 세월을 높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흐르는 내를 바라다보면서 서 있었을 가흥동 마애삼존상. 두텁게 돋을새김을 한 형태는 전국을 다니면서 보아도, 그리 흔한 모습이 아니다. 그만큼 당대의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흉하게 눈을 다 파놓은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리다. 숱하게 훼손이 된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은 시커멓게 썩어가고만 있다.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소재한 함양중학교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 바로 본관 현관 문 옆에 커다란 석불좌상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대좌를 합한 높이가 4m가 넘으면, 앉아있는 석불좌상의 높이만 해도 2.45m가 넘는 거대한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이 석불좌상이 어떻게 해서 이 학교 교정에 와 있는지. 원래 이 석조여래좌상은 청룡사 터나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2월 11일, 하루 만에 전북 남원과 경남의 거창, 함양을 돌아보았다. 정발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함양중학교 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을 시간이다.


조각난 석불좌상.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보물 제376호인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없어지고, 오른팔과 얼굴, 무릎과 대좌 등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거기다가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강건한 형태의 석불좌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손도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나가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의 경우도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사각형으로 조성된 대좌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싱대, 한 번에 두 개씩 눈모양인 안상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로 구성되어 진다.




고려시대 석불의 장중함이 그대로

많이 훼손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장중함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석조불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고 강건한 형상의 이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코와 입의 모습들을 볼 때, 함양 덕전리의 마애여래입상과 그 형상이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입가에는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표정은 전체적으로 온화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텁게 새긴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다. 석불좌상을 몇 번을 돌면서 나름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온전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그 장중함이 대단하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대좌만으로도 사람을 반하게 하다

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면서 옛 선인들의 뛰어난 작품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하나하나 조각을 하여, 작품을 만든 것일까? 대좌 하나만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맨 밑에 놓인 하대는 두텁게 조각한 연화문을 사방에 둘렀다. 일부가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상을 두 개 씩 조각한 중대는 온전한 모습이다. 상대는 밑에는 이단의 층을 만들고 위는 평평하게 다듬어 석조여래좌상을 올려놓게 하였다.

한편이 뭉텅 잘려나갔지만,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상대는, 고려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해가 지는 학교 교정에서 만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 그 웅장한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발길을 붙들기에 충분한 듯하다.



울산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860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64호인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는 아픔의 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550년 정도가 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이지대 선생이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이지대 선생은 고려 말기의 정치인인 익재 이제현 선생의 4세손이다. 선생은 이 나무를 한양에서 갖고 와 연못가에 심었다고 한다.

현재 나무 앞에는 한성부 판윤인 죽은 이공의 유허비가 서 있다. 현재는 연못은 사라지고, 주변이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나무는 마을의 정자목으로 밑 부분의 한쪽이 썩어있다. 구량리 은행나무의 둘레는 8.4m 정도이며, 높이는 22.5m이다. 이 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부러져 나무의 한쪽이 사라져 버렸다.


한성판윤을 지낸 이지대 선생

이지대 선생은 조선 태조 3년인 1394년에 경상도 수군만호로 있을 때, 왜구가 탄 배를 붙잡았다. 그 공으로 인해 한성판윤까지 벼슬이 올랐다. 그러나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까지 강화로 유배를 보내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구량리 은행나무가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7번 국도에서 나무가 서 있는 구량리까지 찾아가는 길은 버거웠다. 그러나 하나의 천연기념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마을 옆 논 한가운데 서 있는 은행나무는 한편을 지지대로 받쳐 놓았다. 아마 그 쪽이 매미 때 훼손이 된 곳인가 보다.



은행나무의 위용에 눌리다.

은행나무 한 그루가 주는 감동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나무를 보는 순간 나에게 밀려 온 것은 바로 위엄이었다. 나무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한쪽 편이 잘려나갔음에도 그 위용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감히 이 자연 앞에서 누가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무 앞에 선 한성판윤 이지대 선생의 유허비도 색다르다.

구량리 은행나무를 보면서 자연은 스스로 치유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태풍 매미에 상처를 입고서도 푸른 잎이 무성히 달려있다. 그런 아름다움이 더욱 가슴을 뛰게 한다. 스스로 치유를 하고 550년 세월을 버텨 온 구량리 은행나무.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인간이 하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나무에 대한 또 다른 전설은 없었을까? 마을 주민들에게 은행나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태풍 매미에게 한편을 훼손당한 구량리 은행나무

한성판윤 이공 유허비와 제단석

아들을 점지하는 은행나무

“어르신 저 은행나무를 마을에서 위하지는 않나요?”
“왜요. 마을에서는 저 나무를 신성시 하죠”“저 나무에 전설은 없나요?”
“저 은행나무를 훼손하면 그 사람은 해를 입어요. 그래서 저 은행나무 주변에는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아요”
“또 다른 전설은 없나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저 은행나무에 가서 아들을 낳는다고 하죠”

아들을 점지하는 구량리 은행나무. 태풍에 가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스스로 치유를 한 나무에는, 많은 사연이 전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 곳에는 항상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마애불은 바위 면에 선각을 하거나, 주변을 파내고 돋을새김을 하여 조성을 한다. 그래서 마애불을 조성하려면 대개는 편편한 바위가 있는 곳에 마애불을 조성하게 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불과 달리 마애불을 간략하게 선각 처리를 하거나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는 것도, 벽면에 붙어 작업을 하기 때문에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남원시내에서 운봉을 가다가 보면 이정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우측에 보이는 이정표에는 <호기리 마애여래좌상>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붙어있다. 이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전각이 보이고, 그 전각 안에는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자리한다. 어떻게 저렇게 모가 난 바위가 있을까 궁금하다.


바위를 옮겨온 호기리 마애불

그런데 마애불 앞에 놓인 설명문을 보면 이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가 왜 이렇게 잘라낸 것 같은지 이해가 간다. 처음에 이 마애불은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부처모퉁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동쪽을 향한 채로 3m 높이의 바위 면에 돋을새김을 하고, 그 주변을 파내어 감실에 모셔진 것처럼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마애불이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인근 사람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 마애불을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리로 옮겨 놓았을까? 바위를 쪼개 이곳으로 옮겨올 때 그런 것인지, 바위에 많은 금이 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의 현재 모습도 많이 달라져있는 듯하다.


마치 기계로 절단한 듯 바위를 잘라냈다.

감실처럼 만들었다는 마애불은 지금은 약간의 돋을새김을 한 흔적만 보인다. 주변에 깨진 바위는 여러 조각이 나있다. 그것을 일일이 부쳐 놓은 것이다. 이 마애불의 처음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무슨 연유로 이 집채만 한 바위덩이를 50m나 옮겨 온 것일까?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조각들을 보면, 이렇게 조각을 내어 어디로 옮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고려초기의 마애불상

불상의 얼굴부분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가 표현이 되어 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졌으며,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표현을 하였다. 수인을 보면 한 손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잇는 듯한 것이 약사여래마애불 인듯 하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표현을 하였으나 형태가 희미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대좌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였으나, 쉽게 구별이 되질 않는다. 대좌를 제외한 좌상의 높이는 120cm 정도이다. 몸에 비하여 손발이 크고, 어깨가 좁은 점 등으로 보면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앞에는 등을 달고, 촛불을 켜 놓았다. 주변의 정리도 말끔히 한 것으로 보면 누군가 이 마애불을 돌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빗자루 등이 보인다. 뒤편도 바위 면을 쪼개낼 때 파손이 된듯,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 마애불을 바위 면에서 쪼개 이곳까지 옮겨온 것일까?

수많은 문화재들이 훼손을 당하고, 찬탈을 당해 나라를 떠났다. 혹 이 마애불도 그런 이유로 원래 있던 바위 면에서 떼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조차 없는 커다란 바위. 그 바위덩어리를 떼어 내 어디로 옮기고 싶었던 것일까? 입도 눈도 다 훼손이 되어 분간조차 할 수 없는 마애불은, 혹 세상의 시끄러움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호기리 마애여래좌상은 말없이 그렇게 커다란 바위를 등 뒤에 지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슴 아픈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어느 곳은 안내판이 다 지워져 글을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고, 아예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문화재의 훼손과 온통 문화재에 낙서로 도배를 한 곳들도 보인다. 주변은 잡풀이 우거지고 길이 없어진 곳도 여러 곳 보았다.

이렇게 문화재에 대해 수많은 훼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종교적인 괴리에서 오는 것도 있겠으나 관리 소홀도 묵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란 그것이 어느 부류에 속하든 간에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세계적으로 문화 상품을 개발하여 막대한 소득창출을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다. 그런데 있는 것조차도 이용을 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소중한 보물 앞에 세운 안내비석이 쪼개져 있다.

쪼개진 안내비석, 누구의 소행일까?

구례 연곡사는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국보와 보물을 소유한 사찰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연곡사 답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촬영을 하다가, 보물 제154호인 소요대사부도를 보려고 앞으로 갔다. 대개 문화재에는 안내판 외에 돌로 만든 안내비석을 하나 세워 놓는다. 앞에는 국보나 보물인지 등 문화재의 명칭을 적고, 뒷면에는 국보나 보물 등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이라 적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붉은 글씨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란 생각이 든다.

지방 문화재인 경우에는 전라북도 지정은 뒷면에 당연히 ‘전라북도(全羅北道)’라고 붉은 글씨로 음각을 하고, 경기도에서는 ‘경기도(京畿道)’라고 음각을 해서 세워 놓는다. 물론 설명을 한 안내판은 따로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소요대사 부도 앞에 세운 비석이 동강이가 난체 나뒹굴고 있다. 비석의 아래가 절단이 되어 나뒹굴고 있는 안내비석. 도대체 누가 어떤 것으로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깨져서 땅에 널브러진 비석에는 붉은 글씨로 쓴 ‘대한민국’이란 글씨가 보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민다.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비석을 무슨 이유로 이렇게 동강이를 내었을까? 자빠져 있는 비석의 글씨가 우리 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강 개발을 한다고 소중한 마애불에 구멍을 내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는데 또 이런 참담한 몰골을 보아야만 하다니.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도대체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한 것일까? 자빠져 있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이 단단한 돌이 저절로 쪼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서 있는 부도의 안내비석을 훼손을 할 사람이라면 문화재인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쪼개지고 자빠진 대한민국, 어쩌면 이것이 우리 문화재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 시대에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앉고 반성들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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