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3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1척이다.

 

옹의 높이는 9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각각 길이 85촌 직경 1]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매 첩마다 3개의 구멍 또 북쪽 끝 가로 첩에는 2개의 구멍] 14기를 뚫었다.

 

 

밤에 돌아 본 옹성, 이게 웬일이지

 

위에 설명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 설명이다. 19일 밤 8시부터 두 시간여 동안 화성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장안문에서 창룡문을 거쳐 남수문까지 걸었다. 장안문에서 화홍문까지는 성 밖으로, 그리고 화홍문에서 창룡문까지는 성 안으로 돌았다.

 

그리고 창룡문에서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남수문까지 걸었다. 그런데 창룡문을 촬영하고 옹성을 살펴보니 군데군데 벽돌이 깨어져 나갔다. 밤이라 음영이 생겨 보기에도 흉측한 모습이다. 옹성에서 성벽으로 오르는 적들을 위해 끓는물과 기름을 붓던 현안은 벽돌이 파여져 나가고, 오물까지 쌓인 곳도 있다.

 

지난 해 10월에 이곳을 돌았을 때보다 더 많이 쪼개져 나간 듯하다. 겨울동안 얼어 있던 것이 날이 풀리면서 벽돌이 쪼개져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에 밤이 되어 음영이 생기면서 더욱 심각해 보인다. 이제 곧 많은 사람들이 화성을 찾아올 텐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할까?

 

 

봉돈의 외벽 벽돌도 훼손돼

 

창룡문의 옹성 외벽 벽돌을 돌아본 후 천천히 걸어 남수문 방향으로 향했다. 19일의 계획은 남수문까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마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가다가보니 밤의 광경이 마치 외국의 어느 고성처럼 보이는 웅장한 봉돈이 보인다. 전쟁 시에 봉화를 올려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봉돈 역시 외벽이 벽돌로 쌓여있다. 그런데 봉돈 외벽의 벽돌 역시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흉물스럽다. 곧 사람들이 화성을 관람하기 위해 수원 화성으로 몰려들 계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벽돌이 떨어져 나간 모습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이요, 수원의 대표적인 관광 동선이 아니던가?

 

훼손이 된 이유가 어려가지가 있다. 화성 창룡문의 옹성 외벽이나 봉돈 외벽의 벽돌의 훼손은 풍화작용에 의해 자연적인 훼손이다. 하지만 보기에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들이 보기에도 흉하다. 하루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화성이기도 하지만, 수원의 상징인 화성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836-1에 소재한 원주시립박물관에 뒤편 도로 밑에 보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일산동오층석탑(一山洞五層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25월에 강원 감영터로 이전하였다가, 2000년 봉산동 시립박물관 야외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

 

앞쪽으로는 좌우에 석불좌상 2기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이 석불좌상은 두 기 모두 머리부분이 사라져 새로 만들어 조성하였다. 그 좌상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왜 이렇게 석불의 목을 잘라버린 것일까? 이런 경우 대개 종교적엔 이질감에서 목을 자르기도 했다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균형 비율이 뛰어나

 

일산동 오층석탑은 현재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전체가 큼직한 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양우주와 탱주인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영 우주를 새겼다. 이 오층석탑은 위로 오를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비율이 단아하며 안정감이 있다.

 

 

비록 탑은 훼손이 심하기는 하지만 형태도 정돈되어 있다. 일산동 오층석탑은 몸돌의 덮개석인 옥개석은 얇은 편이다. 지붕돌인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인데, 층마다 안타깝게도 파손된 부분이 많다. 오층석탑은 그 조형이 된 양식으로 보아 고려중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일산동 오층석탑을 바라보는 시각은 착잡하기만 하다.

 

우리문화재의 보존, 이대로 좋은가?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아마도 수백 번은 가슴이 찢어졌을 것 같다. 아니 수천 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풍화에 의해 훼손이 된 문화재보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이 된 문화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 보호를 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 한 마디로 개판이다. 문화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단 한 번이라도 시켜 본 것일까? 아마도 우리 교육에서는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교육이 없었을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국보인 전각 외벽에 낙서하기. 보물로 지정된 전각의 외벽에 빼꼭하니 경쟁하듯 갈겨놓은 낙서. 소중한 문화재에 상처내기. 문화재가 무슨 훼손시키기 경쟁 터인 듯하다. 이렇게 망가져 가는 문화재를 보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문화재가 밥 먹여주나?”

 

흔히 듣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질문이다.

문화재가 밥을 먹여주긴. 오히려 내 삶을 갈아먹고 있는데.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그동안 길에 뿌린 돈만 해도 아파트 한 채 값은 날아갔을 텐데. 밥을 먹여 주었겠소?”

그러면 그 알아주지도 않는 답사는 왜 하나요?”

우리의 정신이 깃든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죠. 있는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미쳤구만 그 많은 돈 써가며 시간 낭비하며 왜 그 짓을....”

 

한 마디로 난 미친 사람이 된다. 사실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누가 돈 처들여가면서 이 짓을 할 것인가? 그렇게 길가에 뿌린 돈만 해도 아마 목 좋은 곳에 30평이 넘는 아파트 한 채는 장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만 두어야지라고 늘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면 무엇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보따리 챙기고 길을 나서는 것을. 이젠 정말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만 하고, 밥도 안 먹여주는 문화재답사를....

 

충북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길 112-28에 소재한 국립충주박물관. 국보인 중앙탑 앞쪽에 위치한 충부박물관의 야외에는 많은 석조물이 전시가 되어있다. 이곳에는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신매리 선돌을 비롯하여, 율능리 석불입상, 장성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용탄동 석탑, 신만리 부도 등 많은 불교관련유물과 각종 묘비, 문인석과 동자석, 촛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불사 석불좌상. 높이 98cm 정도인 이 석불좌상은 괴산군 불정면 성불사에 있던 곳을 옮겨 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하는 불신에 덧칠을 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도식화된 느낌을 주는 석불입상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충주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이 석불좌상은 머리위에 상투 모양인 육계를 너무 과장되게 크게 조성했으며, 오른쪽 손목 이하 부분은 시멘트를 사용해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조상하였으며, 마모가 심해 눈, , 입 등의 윤곽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이목구비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어깨의 선은 당당하다. 이렇게 어깨의 선이 당당한 것으로 보거나 법의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아래에는 여러 개의 장식을 곁들인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법의는 우편견단이다.

 

법의는 평행사선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는 도식화 되어있으며, 양 다리와 후면의 들 뒤에도 주름을 조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신체의 표현감각이 뛰어난 석불좌상이다.

 

 

지방의 장인이 조성한 불상인 듯

 

이 성불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때 석조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듯하지만, 도식화 된 경향이 짙은 것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육계가 너무 크게 표현을 하는 바람에 마치 머리 위에 투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 그러나 신체의 비례는 안정감이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배 아래편에 대고 있지만, 손의 형태가 떨어져 나간 듯 정확한 손의 형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왼편 무릎은 금이기고 쪼개진 것을 맞추어 놓았다.

 

등 뒤편에는 법의를 굵게 틀어 모아 세 줄을 만들었다. 그 중 두 줄은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사선으로 내려갔으며, 한 줄은 꼬듯이 모아 밑으로 처트렸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많은 석불좌상이나 입상의 경우 광배가 있을 때는 뒤편에 이렇게 조각을 하지 않는데 비해, 성불사 석불좌상은 뒤편에까지 조각을 해 놓았다.

 

육계가 필요이상으로 크게 조성이 되었다든가, 손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로 보아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불사 석불좌상. 비록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 비지정 석조물이긴 하지만, 천 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 온 것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주) 그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한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이 아쉬워 앞으로는 현재의 답사 자료와 함께 오래 전에 답사를 했던 자료들을 함께 올리려고 합니다 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 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2호인 ‘용인목신리석조여래입상(龍仁木新里石造如來立像)’. 이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은 용인시 원삼면 목신리에 있는 화강암으로 만든 여래입상이다. 입상의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을 뿐만 아니라, 마멸이 심해 정확한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넓고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으며, 얼굴은 마멸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본래는 원만한 인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마멸이 심해 처음 조성했을 당시 형태는 아예 추정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면서 수도 없이 만날 수가 있다.

 

고려시대 이전의 석조불상으로 추정해

 

이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의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에 두껍게 걸치고 있는 형태이다. 어깨 부분에서 굵은 옷 주름이 보이고, 가슴에는 U자형의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에서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맞댄 형태이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 시무외여원인의 모습이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석조여래입상의 형태로 보면, 옷 주름이나 신체 표현에서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고식적인 법의의 형태인 통견이나 손의 형태가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것으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은 제작시기가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소중한 문화재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간수해야

 

찬찬히 살펴보아야만 그 형태를 그나마 추정이라도 알 수 있는 목신리 석조여래입상.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어, 제대로 된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눈과 코는 식별이 불가능하지만, 목까지 길게 내려온 귀나 도톰한 입술 등으로 볼 때 상당히 인자한 표정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손과 발, 주름 등도 확연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게 파인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조성 당시에는 꽤나 걸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비바람, 혹은 막무가내 식인 훼손에 의해서 사라졌다. 자신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문화재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언잰가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문화재 답사를 하고 있을 때, 어린 학생에게서 참으로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다. 구례 화엄사에의 문화재를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항생 하나가 말을 건넨다.

 

“선생님 이 문화재는 언제 적 거예요?”

"신라시대에 연기조사가 조성을 했다고 전해지지“

 

낯 뜨거운 일화,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를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는 곳을 효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신라 때 문화재도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있는데, 왜 조선시대에 조상한 불상이나 탑들을 보면 다 부수어지고, 심지어는 머리가 없는 불상들이 그렇게 많아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문화국민이라고 말로는 떠들면서 정말 무책임한 어른들이네요.”

 

중학생 정도인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성인이라면 역사적인 사건이나 종교적 이야기 등, 할 말이 많았겠지만 이 어른 아이에게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얼굴만 벌게진 채 말을 이을 수가 없다. 그때처럼 낯 뜨거운 일은 없었던 듯하다.

 

하기야 백번 천번 그 아이의 말이 맞다. 우리는 우리 것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말로는 문화민족이라고 참 쉽게도 표현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화민족이라는 것일까? 담당자가, 국민이, 그리도 책임 있게 보존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 소중한 문화재를 올바로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그 뒤로 정말 최선을 다해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썼다. 그 이상은 부끄러운 선대로 아이들에게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후손들에게 모두 부끄러운 조상들이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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