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겉돌기(6) ‘암문(暗門)’위의 아치형 구조물의 용도는?
화성을 걷다가 보면 서문인 화서문서부터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는 유난히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평지이다 보니 그만큼 많은 대비를 해야 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이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반화수류정과 용연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꼭 밤에 달빛이 교교하게 흐르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각양각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만일 방화수류정에서 용연으로 나오고 싶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 바로 옆에, 숨겨진 문인 북암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문의 문루 위에 쌓은 아치형의 용도는?
암문은 대개 숨겨 놓았다. 그러나 북암문은 성벽이 양편에 돌출되었을 뿐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작은 성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양편을 검은 벽돌로 쌓은 성벽 안에 움푹 들어가 있는 북암문은 방화수류정에서 동편으로 40보의 거리에 있다. 안과 밖은 모두 검은 벽돌로 쌓았는데, 문의 위에는 둥그렇게 아치형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암문은 비상시에 군사들의 빠른 이동 등을 고려해 만든 성문이다. 더 견고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저렇게 문 위에 아치형으로 벽돌을 쌓아야만 했을까? 물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아치형으로 쌓아올린 벽돌의 쓰임새는 더 중요한데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적이 문을 공격해 오면 아치로 된 벽돌을 무너트려 성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아치형의 구조물이 이런 쓰임새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감히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화성을 겉도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원하게 터진 조망을 바라보는 즐거움
북암문을 지나면 갑자기 성이 용틀임을 하며 위로 오른다. 지형이 갑자기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곳은 성 돌을 잘 다듬지 않고 막쌓기를 한 구간이다. 그런 모습이 비탈을 오르는 나그네를 더욱 편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돌출 된 치성 위에 올려 진 전각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병사들이 쉴 수 있는 ‘동북포루’ 창룡문을 향해 걷다가보면 이곳은 비탈 위에 축성을 하였고, 동북포루는 그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다. ‘각건대’라고도 부르는 이 동북포루 위에 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지형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 바로 화성이다.
동북포루는 아래는 돌로 쌓고 그 위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3단으로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 안은 공간을 만들었으며, 총안 구멍 19개와 누혈 11개를 조성하였다. 치성 위에 잇는 병사들을 보호하고 쉬는 공간이지만, 이곳으로 몰려드는 적에게는 참으로 소름돗는 구조물이 아닐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암문, 동암문을 지나다.
그 성곽을 따라 걷다가 보면, 푸른 이끼가 낀 성 돌과 하얀색의 성 돌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200년 전의 역사와 현대가, 사이좋게 몸을 부딪치며 성을 이루고 있는가 보다. 그 돌 틈 사이사이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 그저 아무렇게나 성 돌에 기대어 살고 싶은 생명들이다.
밑으로 경사가 진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또 하나의 암문이 나타난다. 바로 동암문이다. 이 동암문 역시 북암문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치 양편에 비예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암문의 너비는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꾸며놓았다.
각건대부터 동암문을 지나 연무대인 동장대 밖을 걷는 성 길을 돌아본다. 마치 뱀이 기어가 듯 구불거리는 성곽의 형태가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듯한, 생명들이 자라고 있다. 마치 생명 없는 성 돌이 그 생명을 품어, 스스로 살아나려고 하는 것처럼.
저만치 성벽 위에 동장대의 지붕이 보인다. 그리고 동장대 밑으로 가면 비스듬한 비탈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서서 동장대를 훔쳐보고 있다. 화성의 성 밖 나무들은 왜 그리도 성을 탐한 것일까? 아마도 화성 겉돌기를 하는 내내, 그 해답은 얻어질 것 같지가 않다.
화성 겉돌기(5) 용지대월, 이 풍광을 보고도 술 한 잔 안한다고?
화성 중에서 가장 큰 조형물은 장안문이다. 밖에서 바라다보는 장안문의 위용은 역시 ‘장안문 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문인 창룡문이 화성의 백성들의 출입을 관장하는 문이라면,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정조 이산의 꿈이 그곳에 서려있는 문이기도 하다.
밖에서 볼 수 있는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장안문에 담긴 정조의 큰 뜻은?
장안문에 걸린 편액은 참판을 지낸 조윤형이 썼다고 한다. 서울의 숭례문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는 이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루 중에서 장점만 따서 축조를 했다고 한다. 하기에 가장 견고하고 웅장한 것이 바로 화성의 장안문이다.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당시 장안문 앞에는 영화역이 있었고, 그 앞에는 장시가 이미 서 있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해 살고 있었다. 그런 곳에 무수히 꽂힌 깃발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채제공이 물음에 대답하기를,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곳서부터 방화수류정까지는 화성이 구불구불하고, 덕분에 성의 길이가 길어졌다.
장안문에만 있는 적대
장안문의 양편에는 적대라는 구조물이 서 있다. 화성의 적대는 두 곳으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적대 안에는 활과 불화살, 화창 등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무기를 비치해 두기도 하고,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적대는 장안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다. 그리고 장안문에만 유별나게 적대라는 구조물이 양 옆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는 당시의 가장 강력한 화기인 홍이포가 북을 향해 시커먼 구멍을 열고 있다. 아마도 정조가 이 북문을 장안이라고 하고, 그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것은 상징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북벌의 상징 말이다.
성돌 들이 말을 걸어온다.
장안문을 지나 방화수류정 쪽으로 걷다가 보면, 성돌이 말을 하자고 덤벼든다. 휘어진 성벽 저 끝에 북동포루가 보인다.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보 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포를 쏘는 구조물인 포루는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그 위에 포사를 지었는데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이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그 안에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게 하였다. 생각을 해보라, 장안문을 공격하려고 덤벼드는 적들은 멀리서부터 곤욕을 치루어야 한다. 성문의 옹성에서 까맣게 하늘을 가리고 쏟아져 나오는 화살도 그렇지만, 양편의 적대와 포루에서 한꺼번에 쏘아대는 포는 그 위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포루를 항해서 걷다가 보면 성돌에 흔적들이 보인다. 성돌을 쪼아내기 위해 파 놓은 흠집이다. 그 안에 마른나무를 끼어 넣고 물을 부으면, 나무들이 불어나 돌을 쪼개는 것이다. 저 구멍들은 불평을 한다. 석공이 자릴 잘못 잡아 제 구실을 못하고, 이렇게 성벽에 얼굴을 내밀어 부끄럽다는 것이다.
수원팔경 중에 이경(二景)을 만나다
광교(光敎)에서 발원한 대천(=수원천)이 가로로 화성을 자르며 흐르고 있다. 이 대천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동북각루는 북성(화성의 북쪽)의 서북 19보 용연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 리를 내려가 용두에서 그쳐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된다.
이 풍광에 술 한 잔 없다면, 어찌 사내라 할 것인가?
수원팔경 중에는 ‘용지대월’이 있다. 바로 이 용연 위에 달이 떠 비치는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다. 동북각루에 걸린 편액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으며, 참판이었던 조윤형이 썼다고 한다. 화홍문에서 용연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다보면,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를 설치하였다. 이는 용여에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낼 수가 있는 시설이다.
용연은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했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못의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다. 못 위 성의 모퉁이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일몰 후 14분이 지나면 화성은 온통 불빛으로 아름답게 채색을 한다.
의자에 앉아 조금 기다리고 있으려니 방화수류정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조명으로 인해 이런 모습으로 바뀔 줄이야. 이 풍광을 보고 술 한 잔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라 할 것인가? 이번에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바로 저 아름다움이 눈에서 가시기 전에, 풍광을 잊지 않고 곡차에 몸을 적시기 위해서이다.
화성 겉돌기(1) - 200년 전 채석의 현장을 만나다.
‘화성 겉돌기’라고 하니, 사람들은 화성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줄로만 아는가 보다. 하지만 말 그대로 화성의 겉(밖)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화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안으로 돌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화성을 보다가 보면, 그 밖으로의 경치도 만만치 않게 아름답다. 또한 성이라는 축조물의 특성상 밖이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성곽만 보이는 성벽을 끼고 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성은 밖으로 돌면서 지형지물의 이용이나, 축성의 형태, 또는 주변 경관 등을 논하지 않고는 온전한 성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화성 겉돌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12회 정도로 나누어 돌아보는 화성 겉돌기를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석의 흔적이 있는 화양루 밖
수원시 팔달구 교동 3-3에 소재한 수원중앙시립도서관을 마주보면서 우측으로 조그만 소로 길이 하나 보인다. 팔달산 지석묘군을 향해 오르는 길이다. 이 길 위에는 화성의 남쪽 능선을 지키는 용도가 있고, 그 끝에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자리한다. 숲길을 따라 오르면 여기저기 지석묘군이 있다.
지방유형무형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군의 주변에는 바윗덩어리들이 널려있다. 바위에는 돌을 쪼아내기 위해 구멍을 파 놓은 것들이 보인다. 화성을 축성할 때 이곳에서도 성벽을 쌓을 돌을 채석한 것이다. 화양루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의 면이 똑바로 절개된 것들이 보인다. 아마도 돌을 떼어낸 곳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이곳의 바위와 성을 쌓은 돌의 색깔이 비슷하다. 멀리까지 갈 것 없이 바로 그 밑에서 떼어난 돌로 성을 쌓았는가 보다. 화양루를 끼고 성의 서쪽을 향해 걷는다. 이 길로 성길을 따라가면 서장대를 지나 화서문을 향할 수가 있다.
밖에서 보는 서남암문 과연 절경일세
9월 4일 오후. 비는 더 세차게 퍼 붓는다. 가끔씩 바람도 불어 땀을 씻어주는 것은 좋은데, 우산이 자꾸만 뒤로 넘어가잔다. 그래도 천천히 걸음을 걸으면서 숲 냄새를 맡아본다. 비가 오는 날은 숲은 더욱 더 냄새가 강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성 밖의 소나무들을 본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제 멋대로 자랐다.
아마 역사의 진저리를 저리도 몸으로 표현을 한 것은 아닐까? 용도 서편의 담이 유난히 낮다. 지금이야 이곳에 길이 생겼으니 이리 낮지만, 과거에는 이곳 밖으로 급경사였으니 굳이 성벽이 높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빗발이 점점 거세진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어진 소나무 숲에서 짙은 숲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이런 분위기가 못내 좋아 이 길이 늘 정겹다. 조금 더 걸어본다. 새 한 마리가 비에 젖어 나무꼭대기에서 오글거리고 있다. 어찌 보면 저 새야말로 가장 행복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날개를 툴툴 털고 가장 편안하게 날아오를 수가 있을 테니까.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까닭이지
성곽 보수를 하느라 아래 위를 다른 돌로 쌓아올린 곳을 지나치다 보면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치(성 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서삼치, 서쪽에 있는 치 중에서 세 번째 치라는 말이다. 화성을 안에서 돌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서삼치 앞에 늙은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노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먼 옛날 내가 이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다. 저 나무는 그저 성벽을 타고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꽤나 키를 키우고 있다. 앞뒤로 보이는 서삼치의 풍광에서 첫 번째의 발길을 멈춘다. 그저 지나치기가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 풍광이 있어,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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