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문화재오적(文化財五賊)’이 생각이 난다. 바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훼손하고 강탈한, 문화재를 훼손한 족속들이다.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족속’이라고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오적의 첫째는 바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일본과 많은 나라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 가고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오적 중 수괴이다. 둘째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문화재를 훼손한 ‘종교광신자‘들이다. 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외적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문화재를 지켜내지 못하는 관계자들이고, 네 번째는 심심풀이로 낙서를 하는 등 무개념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재에 무관심한 모든 인간들이다.


일본인들이 들고 가려고 했던 영암사지 석등

8월 20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답사를 강행한 합천 영암사지. 몇 번이고 찾아가 보려고 했던 곳이었기에, 비가와도 이번만은 답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는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 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물론 발굴 후 복원을 하느라 새로운 석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에 그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암사지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인 보물 제353호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안에 자리한다.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한 쌍사자석등은 양편으로 석등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석조층계가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 뒤가 절의 중심인 본존불을 모셨던 터인 듯하다.





이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많은 문화재들을 이렇게 약탈당하면서도,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참 가슴이 아픈 일이다. 이 석등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팔각으로 이루어진 석등

쌍사자석등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에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지붕돌 위에도 상륜부의 석재가 있었을 텐데, 현재는 지붕돌만 남아있다.



영암사지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두 마리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위받침돌을 받들었다. 그 두 마리 사자의 다리가 힘이 넘쳐난다. 마치 화사석의 무게를 느끼는 듯하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는 네모난 창을 내고, 기둥을 삼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힘차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 조각인 귀꽃 등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석조미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비가 오는데도 그 앞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다. 만일 이것을 일본인들에게 도난을 당했다면, 이 영암사지 한쪽이 얼마나 허전했을 것인가? 잘 정리가 된 넓은 영암사지 높은 석축위에 서서 다시 한 번 ‘문화재오적’을 되뇌어 본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고려 중기의 인물인 충숙공 문극겸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8월 20일 비가 내리는 날 다녀온 답사에서, 가장 애를 먹고도 제대로 사진조차 찍지 못한 곳이다. 관리인도 없고, 관리사는 텅 비어 금방이라도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각문은 새로 보수를 한 듯한데, 배부른 고양이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덩달아 놀랐다. 담장 밖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서원만 겨우 몇 장 사진을 찍고, 뒤편 사당은 아예 오를지조차 못했다. 비가 왔는데 잡풀이 발목을 넘게 자라, 온통 신발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 계단에는 관리를 하지 않아 풀이 가득 자라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문극겸 선생

문극겸(1122 ~ 1189) 선생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을 한 선생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백선연 등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의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드라마 무인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문극겸 선생은, 의종이 선생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복관시킨 뒤 벼슬을 올려주기도 했다. 1170년 정중부 등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인척인 점으로 무사히 살아났다. 선생은 이의방과 가까운 점을 활용하여 이때 이공승 등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갔는데 서원 앞마당에는 풀이 발목을 덮어 물이 신 안에 가득고였다(위) 문이 잠겨져 있어 담 밖에서 촬영을 하였다.

원래 문신인 선생은 무신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져, 문무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후에는 최세보 등과 함께 고려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의방의 사돈인 선생은,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 이거의 장인이기도 하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7대 외조부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퇴락한 송호서원,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원래 송호서원은 1777년에 삼가현 역평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가 되었다가, 1957년에 사우 등이 복원되었다. 그런 송호서원은 합천댐의 공사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건한 것이다.



일각문과 담장을 새로 보수를 하였다.(위) 그러나 관리동은 비어있고,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깨져 있다. 말벌이 즐비하게 죽어있다. 

두 번이나 새롭게 자리를 튼 송호서원. 계단을 올라 솟을삼문을 촬영하려고 하는데, 마당에는 풀이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은 굳게 닫혀있다. 비에 젖어가면서 옆으로 돌아가니 관리사인 듯한 집이 있다. 그러나 퇴락한 집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으깨어져 있다.

죽어있는 말벌들을 보니, 누군가 약으로 말벌을 죽인 듯하다. 이왕 말벌 집을 떼었으면 청소라도 좀 해 놓던지. 질퍽거리는 땅, 그리고 자라난 잡풀들. 송호서원은 그렇게 또 한 번의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배부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어댄다. 아마도 갈 곳 없어 이곳에 묵는 녀석이지만, 녀석도 이렇게 퇴락해 가고만 있는 서원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옛날 마을에 망나니가 있으면 사람들이 관청에 끌고 가는 대신, 멍석에 말아놓고 뭇매를 가하던 ‘사형(私刑)’이 있었다. 이를 흔히 ‘멍석말이’라고 한다.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이를 두고 '덕석마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멍석을 덕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멍석말이는 멍석으로 감은 사람을 때리는 형벌로 주민들에 의해 행해진다.

멍석말이는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가 있으면, 문중이나 동네의 회의를 거친 뒤 어른 앞에 끌고 간다. 그리고는 멍석을 펴서 눕히고 둘둘 말거나 뒤집어놓고, 온 집안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뭇매를 가해 버릇을 고쳐주는 습속이다.


합천에 멍석말이 터가 남아있다.

이 멍석말이는 관청에 신고하는 대신 이 같은 방법을 썼으므로, 오히려 문중의 형벌이나 ‘동리법(洞里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으며, 마을의 사회규범을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사용을 했다.

8월 20일(토), 오전 근무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합천으로 들어서 영암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은 듯하다. 차가 하염없이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이런 경우 조바심이 난다. 비가내리는 날은 오후 5시를 넘으면 답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서 가는데, 길 좌측 편에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곁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축대가 쌓여 있는 것 같다. 안내판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어 가까이 가보니, ‘선도대(善導臺)’라는 곳이다. 직사각형으로 네모나게 돌을 쌓고 위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다.

멍석으로 둘둘말아 이 네모난 단 위에 올려놓고 매를 친 듯하다.

‘선도대’가 도대체 무엇일까? 말대로라면 사람을 선도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사람을 훈계한다니, 왜 이곳에서 했을까? 선도를 어떻게 한 것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 바로 이곳이 멍석말이를 행하는 곳이란 설명이다.

‘물산(勿山)마을 관이’인 멍석말이는 누구에게 가했을까?

옛 마을 규약인 향약에 이르기를 마을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을 주게 하였는데, 모두 8가지의 죄목을 나열해 규범을 삼았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一曰 불효지형이오(효를 행하지 않은 불효자를 벌하다)
二曰 불목지형이오(친척 간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三曰 불인지형이오(남녀사이(부부를 말하는 듯)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四曰 불제지형이오(윗사람에 대해 공경하지 않음을 벌하다)
五曰 불임지형이오(책무와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벌하다)
六曰 불휼지형이오(불쌍한 사람을 돌보지 않음을 벌하다)
七曰 조언지형이오(거짓말을 하는 자를 벌하다)
八曰 란민지형이라(주민을 괴롭히는 자를 벌하다)




이렇게 여덟 가지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이곳 선도대에서 멍석말이를 하고 죄를 고지하여 부끄럽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이 선도대의 멍석말이의 조건을 읽어보다가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이 멍석말이가 지금 가장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말로만 듣던 멍석말이. 이런 사람이 정말로 멍석말이를 당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지.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데도 책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
백성에게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
혼자만 잘 살겠다고 밑에 사람을 마구 부리는 사람.
국민이 내는 세금을 마구 사용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데 반대하는 사람.
그 반대하는 사람에게 동조하여 같이 떠벌리는 사람,
자연을 마음대로 휘저어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
그리고 마음 같으면 문화를 업신여기는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싶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 합천 해인사를 들어서다가 보면 좌측으로 탑과 비 등이 서 있다.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이 유물 중 유난히 눈에 띠는 탑이 한 기 서 있다. ‘길상탑’이라 하는 탑이다. 이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짜인 이 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동일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길상탑은 그런 용도로 세우진 것이 아니다. 길상탑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세워진 것일까?


1966년 탑에서 나온 복장물로 밝혀진 탑의 내용

길상탑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오던 탑과는 다르다. 신라 때의 탑이면서도 크기가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현재 보물 제124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길상탑은,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 해인사에 거주하던 훈혁스님이 조성을 했다고 한다. 벌써 이 탑을 세운지가 1,120년 가까이 된 고탑이다.

1966년 길상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을 하고 있다. 탑에서는 작은 157개의 소탑과 함께 탑에 대한 기록을 적은 ‘탑지(塔誌)’가 발견이 되었는데, 모두 4장으로 된 이 탑지는 당시 신라의 대문호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탑지의 내용을 보면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서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탑 옆에 그 내용 중 일부라도 적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이렇게 탑의 외형만 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어떻게 길상탑의 탑지를 쓸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서울(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진골이 아닌 육두품임을 뜻한다.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으로 당시 신라의 진골제도로 인해 출세를 하지 못하게 되자, 당으로 유학을 떠난다.

12세에 당으로 건너간 최치원은 유학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당에서 관직을 두루 거치던 최치원은 늘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그의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는지 가늠이 간다.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 삼경에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외로운 마음 고향을 달리네.
(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신라로 돌아 온 최치원은 당에서 배운 정치와 행정경험을 토대로 신라를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진골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둔의 길을 택했다. 40여 살 장년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경주 남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방랑을 하던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치가 않다. 다만 해인사에 최치원이 거닐던 ‘학사대’ 등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그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는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마침 도적의 무리가 보물을 갈취하려고 하자, 스님들이 보물을 지키겠다고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이를 보고 탑지를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적은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단아한 자태를 보이는 길상탑

길상탑은 신라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모두 다 없어진 상태로, 현재는 석재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크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인 옥개석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쌓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은 형식이다. 위층의 기단은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해, 다른 탑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로 조성이 되어있다. 몸돌이 기단부보다 갑자기 좁아져 균형이 깨어진 듯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님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해인사 길상탑. 어쩌면 그 안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어 더욱 귀하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길가에 서서 해인사를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길상탑의 탑지를 적은 최치원은 이 시대를 동경하고 있지나 않을까? 정작 주인인 스님들보다 최치원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학사대에 꽂힌 지팡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 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해인사 홈페이지)



해인사 경내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비

위와 같이 해인사의 창건내력을 적고 있다. 해인사에는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70여점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해인사 경내를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탑을 비롯하여 많은 비들이 서 있다. 그 끝에 보면 비각이 하나 보인다. 이 비각에는 <원경왕사비>라고 현판이 붙어있다.

보물 제128호인 원경왕사비는, 고려시대의 왕사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는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비는 신라시대의 비와는 달리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데, 각 부분이 얇고 단출한 것이 특색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인 1104년에 승통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의 스승이기도 한 원경왕사는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인종 3년인 1125년에 조성한 이 비는,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시대의 비의 특징을 보이는 원경왕사비

이 비를 보면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비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비받침을 보면 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머리가 용을 형상화 한다. 화려한 용의 머리로 조각을 한 초기의 작품에 비해, 원경왕사비의 귀두는 지극히 단조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 받침인 귀부에는 귀갑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며, 비를 세운 연결부분 양편에는 卍자 두 개를 겹쳐 조각을 하였다. 거북이의 발 등도 힘차고 날카로운 초기의 거북이에 비해, 뭉툭하게 조각이 되었다. 귀갑문 역시 초기의 것들이 작고 섬세한 것에 비해, 크고 조금은 둔하게 보인다.



귀두의 조각 역시 단조롭다. 원경왕사비는 전체적으로 초기의 비 밭침에 비해, 많이 약소화 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는 오석으로 얇게 조성이 되었으며, 가장자리 부분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해인사.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여름에 만난 원경왕사비. 그 많은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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