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에서 담양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읍 조금 못 미쳐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 우측에는 ‘남산2구 동정자’라는 오석으로 된 마을 이정표가 있다. 그 옆에 보물 제505호인 ‘담양읍 석당간’ 1기가 서 있다. 전체 높이가 15m나 되는 이 석당간은, 지주의 높이가 2.5m에 달하며 곁에는 당간의 조성내력을 적은 비가 서 있다.

이 석당간은 절의 행사 때 사용하는 당을 다는 것으로, 단층 기단 위에 지대석을 겸하는 장방형의 지주를 두고 있다. 지주는 윗면이 약간 경사졌을 뿐, 측면에는 아무런 문양을 마련하지 않았다. 정면 중앙에는 장방형으로 1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당간대좌와 양 지주를 받치고 있다. 지주는 방형 석주로 약 80cm의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바람으로 인해 나무로 세웠던 것을 다시 조성하다.

이 담양읍 석당간은 그 조성시기가 명확하다. 바람으로 인해 당간이 무어진 것을 나무로 우선 세웠다가, 다시 훼손이 되어 헌종 5년인 1839년에 중건하였음을 비석에 기록하고 있다. 담양읍 석당간은 가늘고 긴 8각 석주 3개를 연결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 당간을 올려 마디의 표식이 뚜렷하다.

석주의 연결방법은 통식으로 상하석이 만나는 부분을 반으로 깎고, 중간석의 양단을 또한 반으로 깎아 서로 밀접 시킨 후 각기 철제를 이용해 둥글게 만든 환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연결부분에는 또 상하에 원형의 구멍을 관통시켜 더욱 단단하게 조성을 하였다. 당간의 상단부에는 금속제의 보륜이 이중으로 장식되고, 풍향과 같은 장식이 부착되었으나 현재는 두 개만 남아있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석당간은 큰 바람으로 넘어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양편의 지주는 그 양식이 고려시대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인근 오층석탑이 고려시대의 조성한 석탑임을 감안할 때, 이 석당간도 고려시대에 오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처음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도를 세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대개 읍을 처음 설치한 때부터이다. 갑인년에 큰바람으로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가 작년 봄에 또 훼손되어 중건한 것이 기해 3월이다. 숭정기원후 4기해 3월 일 부사 홍기섭 기록하다(石棹之立年不可攷 盖自設邑始幾, 年至甲寅爲大風折以木代立昨春 又頹今則如初重建歲己亥三月也, 崇禎紀元後四己亥三月日知府洪耆燮記)」라고 기록되었으며 후면에는 당시 유사(有司), 호장(戶長), 읍리(邑吏) 등 이 비석 건립의 관계자의 직책과 성명이 음각되어 있다.



석탑이 서 있는 곳이 대웅전 자리

삼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오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에 오층석탑으로 일반형과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탑이 서 있는 자리는 담양군 담양읍 남산리 342번지이며, 현재 이 탑은 보물 제50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높이는 7m에 이른다.


이 탑은 백제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조성을 하였으며, 기단부는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꾸몄다. 상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은 1석으로 구성하였고, 중석은 중앙에 탱주가 생략된 채, 양편에 양 우주만 조성하였다. 기단부의 높이는 다른 오층석탑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음이 특이하다.

백제계 석탑을 모방한 오층석탑

갑석의 상면은 위편에 몸돌을 받을 수 있게 도드라지게 조성을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인데,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 사이에 괴임을 별석으로 마련하여 몸돌을 받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층의 몸돌에는 별다른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만 나타냈을 뿐이다.



몸돌을 덮고 있는 옥개석은 두꺼운 편이며, 처마의 끝은 위로 솟구쳐 있다. 옥개석의 사방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처마의 밑은 수평으로 조성을 했으며, 옥개석의 밑면 받침은 3단으로 5층까지 동일하다. 2층 이상은 알맞게 체감이 되어있어, 오층석탑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고려 중기를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 오층석탑은, 상륜부는 모두 유실되었다.

이 담양읍의 석당간과 오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고려 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석당간이 서 있는 곳 근처에 일주문이 있었을 테고, 현재 오층석탑이 있는 곳 주변에 대웅전이 있었을 것이다.



수많이 세월이 지나간 지금, 그 절의 존재는 알 수가 없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소멸이 되었는지. 다만 이 석당간과 오층석탑만 남아, 한 때 이곳이 번창했던 절터였음을 추정할 뿐.


김제 금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이다. 이 다층석탑은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 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쉬움이다.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탑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석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성을 한데 비해, 이 탑은 기단은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은 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으로 조성한 다층석탑이다.


육각으로 조성한 탑, 놀라움으로 다가와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을 이용해 탑을 조성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기단부는 또 다른 색을 지닌 돌을 이용해 흑백의 조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이롭기만 하다. 이 탑은 조선조 인조 1년인 1633년 금산사 재건 시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원래의 층은 알지 못한다. 현재는 11층만이 남아있는데, 그 외형이 육각으로 되어있어 ‘육각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 단의 1변의 길이는 아래층부터 각각 80㎝, 70㎝, 65㎝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용과 풀, 사자상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위에 점판암으로 된 2개의 판석이 있는데 아래의 판석에는 복연이, 위의 판석에는 앙연이 각 면에 5변씩 양각되어 있다.



현재 11층이 남아있는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현재 10층과 11층이 남아있는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인 우주를 새겨 넣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다. 그 모습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육각다층석탑의 조형이 얼마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상상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현재 남아있는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각층의 끝마다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 것을 상상하면, 가히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도 비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돌이다. 이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남은 옥개석은 각 층의 줄어드는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1변의 길이가 1층부터 차례로 46㎝, 46㎝, 41.5㎝, 41㎝, 39㎝, 37㎝, 35㎝, 33㎝, 31㎝, 29㎝, 27㎝로 줄어들고 있으며, 현재 몸돌이 남아있는 10층과 11층은 각각 18cm와 17cm이다.

이렇게 줄어들고 있는 비율로 볼 때, 현재의 9층과 10층 사이에 또 다른 층이 있고, 몇 개 층의 옥개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9층과 10층의 줄어듦의 차이가 급격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벌써 몇 번이고 돌아본 육각다층석탑이다. 5월 28일 찾아 본 다층석탑 앞에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사라진 몸돌의 각 면에도 선각으로 조각을 한 좌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층마다 다르게 새겨진 또 다른 형태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찾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그 원래의 모습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리고 그 전체적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가 없어, 늘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이렇게나마 남아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그 앞에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는 것은, 아직도 그 아름다움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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