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에 소재한 광한루원. 명승 제33호인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마도 남원을 들렸다가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의 장소로도 유명한 광한루.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부른 후 ‘광한루’라고 광풍루를 고쳐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볼거리가 많은 광한루원

광한루는 누원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넓지 않은 루원 앞으로는 요천이 흐르고 있어,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답다. 광한루원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그 앞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완월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정자는, 지상에서 달을 보기 위한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玉京)’에는 광한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있는데, 아름다운 선녀들이 달나라의 궁전이라는 ‘계관’에서 즐겼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전을 닮은 광한루를 세웠으며, 완월정은 그 달 속에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겹처마 팔작 오방집인 완월정

완월정은 오방집이다. 오방집이란 네모난 집의 한편을 돌출시켜 오방처럼 지은 집을 말한다. 겹처마 팔작의 조선식으로 누각을 마련하고, 그 뒤편을 연못으로 돌출시켜 오방집으로 꾸몄다. 완월정은 작은 인공 섬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을 물이 에워싸고 있으며, 작은 다리를 건너 들어간다.

중층 누각으로 조성을 한 완월정은 양편으로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꺾인계단을 놓았다. 위로 오르면 누각 뒤편을 밖으로 돌출시켜 높임마루를 깔았다. 양편으로는 게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으며, 기둥은 모두 원형의 기둥을 사용했다. 11월 6일 찾아갔을 때는 붉은 단풍이 완월정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완월정을 바라보아도 아름답다. 가을의 완월정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계단을 내려 누각 밑을 들여다본다. 굵은 원형기둥의 밑에는 자연 그대로인 덤벙주추를 놓아, 자연스러운 멋을 더했다.

완월정, 지금 그대로가 좋다

완월정 주변을 천천히 걸어본다. 붉은 단풍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부서진다. 음력 5월 단오가 되면 춘향제가 열린다는 완월정. 아마도 그 어떤 누각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세상살이 힘들고 지쳤을 때 이곳 완월정에 올라, 멀리 지리산 위로 솟는 달을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모든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다시 한 번 완월정 계단을 밟아본다.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천상의 선녀가 보이지 않아도, 이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으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광한루원에는 광한루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학술적인 것이야 전문가들이 더 잘 알아서 설명을 할 테고, 난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그 외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 누구나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 힘든 문화재 답사를 왜 하느냐고?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존재감’ 때문이라고 답을 한다.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을 지내 오는 동안 그 문화재를 만든 장인은 만날 수 없어도, 문화재로 인해 당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난 그것을 ‘존재감’이라고 설명을 한다. 즉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감을 느끼는 것이다.


덩그러니 남은 동헌의 문, 죽수절제아문

전남 화순군 능주면 석고리 754번지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인 ‘죽수절제아문’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능주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이 업무를 보던 동헌건물인 녹의당의 정문이다. 이 문은 최초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조 32년인 1599년에 문을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능주목사로 부임한 정윤이 녹의당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어진 죽수절제아문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하게 짜여 있다. 죽수절제아문의 현판은 선조 35년인 1602년 당대의 문필가인 정이(1568∼1625)가 객관인 능성관과 함께 쓴 현판이다.




주변의 거목들로 아문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죽수절제아문은 전라남도에서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진 간결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능주는 죽수, 연주 등으로도 불렀으며, 인헌황후 구씨의 관향이라 하여 인조 10년인 1632년 능주목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능주의 동헌건물의 문이 바로 죽수절제아문이다.



죽수절제아문은 현재 능주 관청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아름드리 거목들이 있어, 이곳의 역사를 알게 한다. 뒤편에는 이곳이 녹의당의 동헌지였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석비 하나가 서 있다. 그것마저 없었다고 하면, 얼마나 쓸쓸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문화재

시간이 지났다. 답사를 하고 정리를 하다가 보면, 가끔은 빠트리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은 답사를 하지 못할 때 하나씩 꺼내어 본다. 그럴 때마다 마치 숨겨 놓은 보물을 만나는 기분이다. 지난 8월 21일 화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만난 죽수절제아문. 당시의 느낌은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천덕꾸러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문 앞에는 누군가 차를 떡하니 받쳐 놓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도 없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문화재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영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가치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민족인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안에 간직한 사연. 그것을 찾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이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바로 존재감 때문이라고 늘 스스로 위로를 한다. 그 존재감 안에 내가 있고,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5번지에 소재한 사적 제346호 ‘무장현 관아와 읍성’.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길을 번번이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고창군 답사를 서너 번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답사 중 날이 저물어서이다. 지난 9월 4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무장읍성.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무장읍성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장읍성은 1991년 2월 21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4km 정도이며 넓이는 43,847평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쌓은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고 하는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무장읍성. 진무루를 지나 객사를 거쳐 뒤편에 있는 동헌건물인 취백당으로 향한다.

만 4개월 동안 2만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하였다는 무장읍성의 동헌.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여 변형이 된 것을, 1989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무장동헌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팔작 지붕으로 지은 동헌 건물은 겹처마로 구성해,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헌 취백당

무장읍성의 동헌건물은 객사 뒤편에 자리한다. 동헌 뒤편으로는 토성으로 쌓은 성이 있으며, 동한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동헌을 찾았을 때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정면 6칸인 동헌 건물의 중앙에는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무리 동헌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넘치는 취흥을 이기지 못해 붙인 이름인가 보다. 대청 안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는 최집의 취백당기를 비롯해 김하연의 찰미루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의 동헌시, 이덕형의 동헌시,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보인다.

이런 시판으로 보아 동헌을 동백정이라고도 불렀는가보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하여 동헌 이름을 ‘송사(松沙)’라 하였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을 해와 ‘취백(翠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취백당

단 한 동의 건물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이리 장중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토성이나, 주변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 끝이 살아있는 듯하다. 아래는 넓고 위가 좁게 마련한 주초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리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대청은 세 칸으로 마련하였으며 뒤편에는 판문을 달아냈다. 건물을 바라보며 좌측은 두 칸의 방을 한 칸 뒤로 밀어서 드렸으며, 우측은 마루 끝까지 방을 드렸다. 우측방은 따듯하게, 좌측 방은 시원하게 계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편전체를 복도마루로 마련한 것도 취백당의 특징이다. 아무래도 뒤편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단 한 동의 건물이면서도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취백당. 그 이름 속에는 솔처럼 푸른 기상을 지니고, 힌 모래처럼 그렇게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고고함을 지키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취백당은 45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오면서, 늘 푸른하늘을 동경했는가보다.

전라북도에는 ‘삼한(三寒)’이 있다. 세 곳의 찬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하나는 전주천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한벽당(寒碧堂)’이요, 또 하나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바로 무주에 있는 ‘한풍루(寒風樓)’라고 한다. 세 곳 모두 물에 가까이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기에 적합하다.

한풍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풍루가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14세기경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무주 누정조에는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적고 있어, 한풍루가 객관에 달려있는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한풍루는 선조 25년인 1592년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다.


한풍루의 수난, 그러나 당당한 자태로 남아

한풍루는 누마루 밑으로 어른들도 지나갈만한 높이로 지어졌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정자는, 이층 누각을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한풍루의 주초는 네모난 모형으로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당한 자태가 남아있어 ‘호남제일루’라고도 부른다.

한풍루는 수난의 역사를 당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임환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이러한 한풍루는 한 때는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 불교포교당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금호루’란 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 수난의 역사를 당한 한풍루는 1971년에야 제 이름과 옛 모습을 찾았다.




아름다운 우물천정, 그러나 굳게 닫힌 문

밖에서 올려다 본 한풍루는 아름다웠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누정은 우물천정을 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기둥 밖으로 뺀 누마루에는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한풍루의 풍취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누각으로 오르는 출입구에는 널판으로 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도대체 문화재 보호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문을 달아 잠가버리다니.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간 곳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렇게 문을 달아 닫아놓기가 일쑤다. 문화재보호라는 것이 문을 닫아야 가능한 것인지. 물론 화재 등 위험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문이 잠긴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같은 문화재인데도 불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아도 보존이 잘 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문을 잠근다고 해서 문화재 보존을 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잠가버리고 나서 제대로 간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각에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오를 수 없는 누각 위에 있는 글귀를, 아래에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위로 올라 주변 풍광을 볼 수가 있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적을 수 있을 텐데.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그저 꽁꽁 닫아버린 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창읍에 있는 노동저수지를 끼고 돌아 호도마을 쪽으로 100m쯤 가면, 수백 년 된 노송과 거목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숲에 정자가 보인다. 고창읍 화산리에 속하는 곳에 자리한 취석정의 ‘취석(醉石)’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이 취하면 집 앞 돌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취석정, 말로만 들어도 운치가 있을 것만 같아, 해질녘인데도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멋을 풍기고 서 있는 취석정. 노계 김경희(1515∼1575)가 명종 1년인 1546년에 처음으로 세운 정자라고 하니, 벌써 460년을 넘긴 고정(古亭)이다. 김경희는 을사사회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음 이만영, 규암 송인수, 둔옹 심광언 등 제현과 더불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문의를 강론하였으며, 그때의 시집 노계집 1권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지석묘군과 함께 어우러진 취석정

흙담을 두른 취석정, 고창군내의 문화재에는 문을 담가놓지 않아 어디든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장 안에는 7기의 작은 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다. 밖에도 3기의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어, 총 10기의 지석묘가 이 곳 정자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고풍스런 정자와 함께 선사유적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정자를 찾은 나그네의 홍복이 아니던가.

1871년에 중건된 취석정 한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목조 와가인 취석정은 부재가 건실한 것이 그 오랜 세월을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건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담장 안에 있는 지석묘 한 기에는 ‘취석정’이란 글씨를 음각해 놓았다. 담장 안팎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버드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댓돌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했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다. 이 정자의 특징은 정자 한 가운데 온돌방을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 모두를 분합문을 내었으며, 전 후면에는 머름대를 시설해 두 짝의 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구성은 밖의 경치를 시원하게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겸손함

취석정은 자연을 이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득한 논이다. 그 주변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는데, 밑에 웅크리고 있다. 행여 누군가의 눈에라도 뜨일까봐 걱정을 하는, 새색시 같은 마음이다. 적어도 처음 취석정을 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문을 열어 천정에 붙들어 맨 창호들이 한껏 마음을 연 듯한 모습이다. 방은 온돌로 처리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흙을 쌓아 방을 돋은 것 같아 보인다. 앞 내 건너편에 있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에서 취석정의 세월을 읽어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 정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정자와 지석묘가 어우러진 곳. 커다란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가, 절대로 물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취석정에 해가 넘어가고 있다. 좀 더 일찍 이곳을 찾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돌리는 발길 머리에 긴 그림자 하나가 끌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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