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1-3 일원에 조성중인 한옥. 공사를 하기 위해 막아놓은 담장 한 편이 열려있다. 이 한 옥은 장안문에서 정조로를 따라 우측 인도로 팔달문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만날 수가 있다. 안으로는 여기저기 많은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은 바쁘게 마무리 공사를 하느라 분주하지만, 외부의 형태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 한옥은 장안문 주변 문화시설 조성사업으로, 이 안에 예절교육관과 전통식생활체험관이 들어서게 될 예정이다. 수원시민들을 상대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배워두어야 할 예절교육과 전통음식을 배우고 실습해보는 식생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20139월에 착공하여 올 815일에 완공예정이었으나 기일은 조금 늦어질 듯하다.

 

 

방대한 규모의 한옥체험관

 

이 한옥의 용도는 문화 및 집회시설이다. 전통식생활체험관은 대지면적 3,036에 건축면적은 738,41로 지하1층과 지상 1,2층 총 연면적은 950.58이다. 예절교육관은 대지면적 2,904에 건축면적은 626.761층으로 건립이 된다. 한옥으로 지어지는 이 건축물은 한식목구조와 한식기와를 얹어 품위를 더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막바지 공사를 하느라 더위도 잊은 듯하다. 주변은 공사를 하느라 부산하지만 이미 건물의 외벽과 기와를 잇는 마무리 공사는 끝난 듯 보인다.

 

 

수원 화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잡다한 서구식 건물들이나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품위에 맞지 않는 건물들은 모두 철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전에 남한산성을 순창 돌아보고 왔는데, 그곳은 산성 안에 모든 건물을 외벽공사를 하고 기와지붕으로 개조를 했다. 우리 화성은 그보다 더 먼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안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섰다는 느낌이다. 이제 이 체험관을 시작으로 화성 안에 모든 건물들이 한옥으로 외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인근에 살고 있다는 주민 한 사람은 이 문화시설 조성사업으로 인해 화성 안에 건물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전통식생활 체험관과 예절교육관이 기대되는 이유

 

전통식생활체험관에서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가 궁금하다. 수원시 생명산업과의 담당자는 아직은 체험관이 완공이 되지 않아 구체적인 계획은 미정이라고 한다. 건물이 완공되고 난 후 의회의 조례 등을 거쳐 사업이 확정되기 때문이라는 것.

 

아직 구체적인 사안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식생활체험관은 우리의 전통음식을 만들 수 있는 방법 등을 시민들에게서 신청을 받아 음식체험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에 맞게 우리의 전통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체험위주의 교육을 시킬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한다.

 

예절교육관은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예절교육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가대된다. 아마도 예절교육관에는 청소년들의 예절교육과 다도 등의 교육이 이루저질 듯하다. 아직은 그 무엇도 확연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옥이 주는 이미지와 함께 예절교육관과 전통식생활체험관이 말하듯, 이 시대에 수원의 위상에 걸 맞는 문화시설이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하면 사람들은 먼저 하동 쌍계사를 떠 올리지만,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논산 쌍계사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에 소재하고 있다.

 

논산 쌍계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마치 전설을 만들기 위해 창건된 절인 듯하다. 그만큼 쌍계사의 전설은 한두 가지 아니다. 대개 어느 고찰이나 전설 한 두가야 있기 마련이지만, 쌍계사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저 쌍계사 주변 곳곳이 전설이 전한다. 그만큼 이 절이 창건 이후 유명세를 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부대중이 얼마나 많았기에

 

쌍계사에 전하는 전설 중에는 그저 허황된 소리 같은 것들도 전한다. 하지만 전설이라는 것이 전혀 맹랑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쌍계사는 한 때 많은 사부대중이 기거를 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쌀을 씻은 뜨물이 큰 길까지 흘러내렸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대웅전에 있는 탱화를 파랑새가 붓을 입고 물고 그렸다고도 한다.

 

대웅전 앞에 낸 문짝의 꽃 창살은 가히 일품이다. 꽃 창살을 사용한 절들은 많다. 하지만 아마 도 어느 절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그 꽃 창살의 문양만 바라보고 있어도 기분이 황홀해진다. 쌍계사의 기둥 하나가 칡넝쿨로 만들었는데, 이 기둥을 안고 돌면 병을 앓지 않고 저승으로 간다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고찰 쌍계사. 이 절에서 사용하는 북이 얼마나 소리가 크고 고랑을 쩡쩡 울린 것일까? 북의 가죽을 한 겹을 볏겨 냈다고 한다. 또한 절 동편 고개 밑에는 샘물이 있다고 한다. 이 샘은 약효가 뛰어나 피부병 등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전라북도에서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

 

보물 제408호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 법당이다.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영조 14년인 1738년에 지은 건물로 보인다. 그 뒤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정면의 문은 정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을 새긴 꽃 창살로 마련하였다. 문의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대웅전의 건물 안쪽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다. 문화재 하나를 만날 때마다 어떤 때는 즐거움으로, 어떤 때는 비통함으로 접하게 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사고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에 또 바람따라 길 위에 늘 서있기는 하지만. (꽃 창살과 닫집은 문화재청 자료입니다)

강원도 고성군에 소재한 건봉사는, 6·25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31본산의 하나였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속초 설악동 소재 신흥사의 말사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원각사라 불렀다. 그 후 경덕왕 17년인 758년에는 발징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한국 만일회의 시초이다.

 

건봉사의 뒤편 금강산에는 등공대라는 곳이 있다. 바로 염불만일회를 열면서, 만일(275개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염불을 드렸다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 17년인 758년 무술년에 발징화상, 정신, 양순 등 31명의 스님들이 모여 염불을 드렸는데,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동참을 하였다고 한다.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라

 

등공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말한다. 허공으로 솟은 채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건봉사 북쪽에 위치한 등공대는 만일동안 쉬지 않고 예불을 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몸이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위로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은 그대로 땅에 떨어트리고 맑고 정신만 등공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광무 4년인 1900년에, 몸을 버리고 간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소신대 자리에 19155월에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최근 군사작전 지역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등공대가, 57년 만에 개방을 하기도 했다.

 

 

전쟁의 참화를 그대로 안고 있는 불이문

 

신라 말 도선국사가 건봉사를 중건한 뒤 절 뒤쪽에 봉황새와 같은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 했으나,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이 중수하고 다시 건봉사로 바꾸었다. 건봉사는 1464년 세조가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되자 이때부터 역대 임금의 원당이 되었다.

 

건봉사는 6·25전쟁 이전에는 대찰이었다. 대웅전, 관음전, 사성전, 명부전, 어실각, 불이문 등 총 642칸에 이르는 전각이 있었으나, 6·25한국전쟁 때 거의 다 소실이 되고 유일하게 불이문만이 남았다. 이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이문은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배흘림 형태로 조성이 된 석주에는 총탄을 맞은 자국들을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불이문은 1920년에 세운 건봉사의 출입문이다. 이 돌기둥에는 길이 90cm의 금강저가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천왕문을 따로 축조하지 않고 불이문으로 하여금 사찰수호의 기능을 함께 한 것이다.

 

 

불이문은 1단의 낮은 기단을 놓고 그 위에 1.61m의 돌기둥을 세웠다. 다포양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불이문의 중앙에 걸려있는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노송 숲길을 지나 주차장을 거쳐 만날 수 있는 건봉사 불이문. 불이문을 지나면 불국정토가 된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님을 뜻한다. 즉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과 불선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 불이문이 이렇게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불이의 완전한 뜻을 이루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남아있고 사라지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건봉사에서 만난 불이문은 옛 모습 그대로 손을 맞이하고 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797호 운주사석조불감(雲住寺石造佛龕)을 보는 순간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금동으로 목조각으로 만든 작은 불감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석조불감이 있다니.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이다.

 

하기에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다탑봉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거대 석조불감 

 

건물을 본뜬 불감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그대로

 

불감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안에 계신 부처님의 상을 보니, 눈을 지그시 감고계시다. 누군가가 입을 훼손한 듯도 하다. 꺼멓게 보이는 부분이 아마 무엇인가를 갖고 훼손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부처님 스스로 말 많은 세상, 입을 다물어 버리셨는가도 모르겠다. 좀 더 멀리 떨어져 바라다본다. 그래도 석조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은 미동도 없다.

 

그저 세상사 다 접어두고,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저 눈도 뜨시지는 않을까? 뒤로 돌아가 본다. 또 한분의 부처님이 앉아계시다. 등을 서로 맞대고 계신 두 분의 부처님들이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올린 부처님 역시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그러나 찬찬히 올려다보면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저 두 분은 등을 마주하고 계시는 것일까? 한분은 인간세계를 바라다보면서 할 말을 잊으신 것이고, 또 한분은 피안(彼岸)인 운주사 안을 바라보면서 참 세상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네 속 좁은 인간들이 그 뜻을 어찌 알리요. 하지만 운주사 불감 안에 계신 부처님들은 오늘도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계시다. 혹 그것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일침은 아니었을까?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주문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운주사 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만다. ‘맞습니다. 세상에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저랍니다. 오늘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눈을 들어보니 주변에 가득한 탑들 위로 초여름의 무더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불감 안에 두 분이 매우 더우셨는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다양한 모습을 만날 때마다 신비롭다는 것이다. 어떻게 선조님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아마도 오랜 세월을 그렇게 조형을 한 문화재마다, 그 문화재를 조성한 장인들의 혼이 들어있을 것이란 생각 밖에는 말이다.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에 위치한 용천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용천사의 가을 풍취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용천사를 찾았을 때는 꽤나 늦은 가을이었는가 보다. 절집 여기저기 아름다운 단풍이 온통 치장을 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그런 곳을 다녀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쉽게 잊히지가 않는 법이다.

 

작은 석등 하나, 거 참 신기하네

 

용천사 경내의 여기저기를 찍다가보니, 전각 앞에 작은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석등은 부처님의 말씀을 온누리에 펼쳐 사바세계를 밝게 비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석등은 절 경내뿐만 아니라 묘역 등에도 세우는데, 이것은 유택에 잠든 영혼의 저승길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묘역에 세우는 석등은 장명등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석등을 바라보다 한찬 넋을 빠트리고 말았다. 크지 않은 석등이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석등과는 많이 다르다. 이렇게 낯선 문화재를 만날 때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린다. 비밀스런 그 무엇을 찾은 기분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작은 석등 하나가 주는 즐거움은 답사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함평 용천사의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는 기둥인 팔각 간석에, 강희 24년이라 음각을 해 놓았다. 조선조 숙종 11년인 1685년에 조성한 석등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한 조성연대까지 음각을 한 경우도 드문 예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던 석등과는 다른 용천사 석등. 그 모습이 자꾸만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간주석 거북이들, 어디까지 오르려고?

 

우선 이 석등의 머릿돌은 팔작지붕을 본떠 만들었다. 지붕의 형태도 그렇지만 처마에 부연을 달아낸 것까지 조각을 하였다. 부연 밑에는 투박하기는 해도 공포를 조각한 것도 보인다. 이런 석등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화사석은 간단한 무늬를 음각해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으며, 둥글게 창을 내었다.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간석은 연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석등의 아랫 간석에는 두 줄을 내고 네 마리의 거북이가 매달려 있었는데, 현재는 두 마리만 남아있다. 거북이의 형태는 흡사 줄에 매달린 듯 재미난 형상을 하고 있다. 저 거북이들이 저렇게 위로 오르다가는 화사석에 낸 창 안으로 들어갔다가 불에 델 것만 같다. 혹 두 마리는 벌써 탄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키득대본다.

 

용천사는 6·25 동란 때 불에 타서 거의 모든 유물들이 소실이 되었는데, 이 석등만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높이 2.37m의 화강암 쑥돌로 조성된 이 석등은 투박하지만,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이 용천사의 석등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일반적인 석등과는 달리 팔작지붕을 얹고 원형의 화창을 낸 화사석. 그리고 간석에 붙은 거북의 모습 등, 조금은 매끄럽지 못한 듯한 모습으로 조성이 되었지만, 가치가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답사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문화재 하나가 주는 즐거움. 용천사 석등은 바로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문화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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