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무사 최형국 박사 논문에서 오류 지적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 수석단원이자 공부하는 학자무사 최형국 박사가 지난 7일 오후 430분부터 서울 고등교육재단 세미나실에서 열린 한국사학회 제3회 정기발표회에서 <TV 역사물의 考證 한계와 그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무예사·군사사 고증을 중심으로 발표를 했다.

 

이날 최형국 박사의 발표는1. 머리말 2. KBS 다큐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배경과 壯勇營의 창설, 3. KBS 다큐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무예사·군사사 고증 오류 4. TV 역사물 고증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그 대안 5. 맺음말로 이어졌다. 이 발표에서 최형국 박사는

TV에서 방영하는 역사물은 한국이 향유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창구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계에서도 단순히 논문이나 저술로 한정되어 있었던 연구 발현의 영역을 TV를 비롯한 대중 영상매체의 발달에 따라 조금씩 확대하는 추세에 있다.

 

특히 사극이나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TV 역사물을 학생들의 수업시간에 활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역사교육에서 그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머리말에서 TV 등의 사극이나 다큐멘터리가 역사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대작 다큐멘터리인 <의궤 8일간의 축제>의 오류 꼼꼼하게 따져

 

제작 기간 2, 총 제작비 15억 원의 대작 다큐멘터리인 KBS 1TV<의궤 8일간의 축제>를 꼼꼼하게 따지고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수록된 내용을 기반으로 한 이 8일간의 축제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1795년 열었던 회갑잔치를 조선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극적인 축제중 하나로 꼽고 있다.

 

1795년은 정조 재위 20년이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탄생 60(舊甲)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현재 가치로 약 70억 원에 이르는 예산 10만 냥과 수행원 6000여명, 1400필을 동원해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행렬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성까지 8일간 계속됐다. 총 제작비 15억 원, 거기다가 2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제작된 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이 축제>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들은 대작이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거론된 장용영의 군사들의 직제를 살펴보면 장용영이 내외영 이중 구조의 영으로 성장한 후, 군제의 상황을 보면 내영 안에 마보군은 기병인 선기대의 ··3초와 보군인 오사의 각 5, 아병의 6초를 합한 34초와 각표하군이 83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3초의 선기대는 모두 345명으로 각 11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경군은 615명이며 향군 2,540, 사후군 52, 공장아병 26, 치중복마군 40, 배봉아병 245, 고성아병 439, 노량아병 144명으로 장용영 전체 군사의 수는 5,245명으로 훈련도감에 버금가는 병력규모를 구축하였다. 특히 장용영 전체 기병 숫자는 853명으로, 당시 중앙군영인 오군영에 배속된 기병 숫자 중 가장 많은 인원이 편성되었다.

 

무예사와 군사사 고증 오류 부분 일일이 대안제시

 

 

위 사진(다큐멘터리 영상화면)에서 보이 듯 정조의 호위무관인 선전관은 전형적인 日本刀를 허리띠 혹은 전대에 꽂아 움직이고 있다. 이는 마치 일본 사무라이가 정조를 지키는 형국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몇몇 부분에서는 아예 환도를 손에 들고 다니며 척후를 나선 장용영 군사들의 모습도 확인된다. 이러한 환도패용의 오류장면은 거의 모든 역사물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고증상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園行乙卯整理儀軌의 반차도 중 환도 패용 방식을 보면 조선후기 군사들의 환도패용 방식은 평시에는 환도의 손잡이가 뒤를 향하게 패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장형태는 정조의 주변을 호위했던 선전관들 역시 동일하다. 그래서 유사시 전투 상황이 발생하면 360도 회전형 고리인 띠돈이 있기에 손쉽게 손잡이를 앞으로 돌려 칼을 뽑아 사용하였다고 오류를 지적했다.

 

 

다음으로는 장용영 군사들이 사용하는 등패의 오류도 지젇하였다. 비교 사진에서도 확인 되듯이 본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된 등패의 크기는 마치 머리에 쓰는 삿갓을 연상시킬 정도로 작은 모습이다. 심지어 다른 장면에서는 등패가 아주 얇게 만들어져 앞이 보이는 정도의 장면까지도 연출되었다. 조선후기 군사무기로 활용된 등패의 경우는 기존 조선군들이 사용하는 무거운 장패가 아니라 화살이나 표창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견고하게 가공한 가벼운 등나무로 만든 패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최형국 박사는 이 논문에서 <의궤 8일간의 축제>에서는 다음의 6가지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KBS 다큐멘터리<의궤 8일간의 축제>에 드러난 고증 상의 문제점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첫째 정조의 호위무관인 선전관이 일본도를 일본도 패용방식으로 차고 근밀 경호에 나선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장면에서는 환도를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니며 척후근무를 한다는 치명적인 고증오류를 확인하였다.

둘째, 신궁이라 불렸던 정조가 전통 엄지걸이 깍지사법이 아닌 깍지 없이 검지와 중지에 화살을 걸어 쏘는 지중해 방식의 사법으로 활을 쏘는 장면이다.

셋째, 정조대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국왕 친위부대인 壯勇營의 군사들이 고증과는 동떨어진 무기와 전술운용을 한다는 점이다.

넷째, 정조대 군사신호체계를 무시한 手旗의 활용과 夜操시 명령전달체계 고증의 오류였다.

다섯째, 불이 활활 타며 날아가는 夜操火箭의 모습은 고려중기 이전에 사용한 무기로 정조대 당시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무기가 신무기인 것처럼 묘사되었다.

여섯째, 위와는 반대로 佛狼機紅夷砲와 같은 화약무기의 경우 당시에는 발사체가 충격신관이 발명되지 않은 때라 폭발할 수 없음에도 장용영이 화력시범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억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화성 야조 시에는 아예 화포훈련 자체가 없었음에도 정조의 군사력을 드높이기 위하여 날조된 역사내용을 첨가하기도 하였다.고 지적했다.

 

교육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사극 등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형국 박사의 논문은 한국사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실릴 예정이라고 한다.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펴내

 

지난 해 <조선 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를 펴낸 박사무사인 최형국이 이번에는 송일훈과 공저로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정조대왕의 실학사상과 무예사상, 그리고 수원화성을 탐하여 전통무예에 빛을 발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최형국은 현재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의 일원이다.

 

598쪽에 달하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는 모두 4편으로 구분되어 기술하였다. 1부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사상관의 거시적 관점으로 본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재현 연구, 2부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사상관과 연구동향으로 바라 본 전통무예의 정체성 제시, 3부 전통무예와 군사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 4부 정조대왕 궁술무예 사상관의 신체지와 현시대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관한 연구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무예 연구가가 심혈을 기울인 연구서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는 송일훈, 최형국 두 사람의 무예연구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저서이다. 송일훈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예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무예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무도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일훈은 2008년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1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인 <한중일 격투무예 연구>, 2011<무신 장보고의 꿈>, 2012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 도서 <신유론 강독서> 외 다수가 있다.

 

 

최형국은 중앙대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기대학교에서 Post-doc연구원으로 문화사, 전쟁사, 무예사를 연구해 왔다. 현재 중앙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 수석으로 조선무예를 수련하고 있다.

 

저서로는 2007<친절한 조선사>, 2009<조선무사>, 2013<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2013<조선전기 무과에서의 격구 도입배경과 그 실체>, 2011<조선후기 진법 원앙진의 군사무예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정조대왕의 무예 신체관의 결집서

 

이 저서는 정조대왕의 무예 신체관의 결집서라고 볼 수가 있다. 역사적 고증을 들어 신체관 연구를 한 본 저서는 무예실체의 움직임에 관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신체기법을 습득하여 다시 몸()에서 얻는 것()으로 완성을 시키고자 했다.

 

특히 부록으로 많은 양이 수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조무예신체관의 활쏘기에 관련된 원전기사해석은 이 책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완성이 되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활쏘기의 기초에서부터 신궁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모든 비법 및 기법들이 서술되어 있는 <사법비전공하> 소개서부터, 무과 갑과와 을과의 문답풀이 등도 빠트리지 않았다.

 

 

책 말미에 도록은 저자 최형국이 무예24기의 시범 중에서 칼, , 활 등의 시연을 하는 사진과 마상무예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도록은 저자가 우리무예에 관해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갖고 심혈을 들여 연마를 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행일 : 2014228일 발행

발행처 : 레인보우북스

정 가 : 30,000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무예 24기 중 6가지의 마상무예를 소개하고 있다. 마상쌍검, 마상월도, 기창,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가 그것이다. 이러한 마상무예의 진수를 볼 기회가 생겼다. 20일 오후 3.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원문화재단 소속의 무예24기 시범단의 무예시범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무예24기 시범단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를 하나하나 펼쳐나갔다. 시범을 보일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로 답례를 했다. 진검으로 짚과 대나무를 벨 때는 사람들의 환호가 극에 달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을 탄 무예24기 시범단이 등장을 했다. 8필의 말에 올라 탄 무사들은 하나하나 마상무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말을 타면서 활쏘기. 두 손을 다 놓고 타야하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무예도보통지에 보이는 기마무예

 

기마무예는 한 시기를 정점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정조대에는 장용영을 중심으로 한 기병 강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만든 보병무예 중심의 '무예신보(武藝新譜)',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추가한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여 중앙군영과 지방군에 보급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편찬된 병서인 '병학통(兵學通)''이진총방(肄陣總方)' 등에는, 기존 병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의 다양한 진법들이 실려 있어 기병전술 강화를 의도했다. 이러한 기병 강화 정책은 화약무기의 발달과 함께 정조대에 완성된 거··(車騎步) 통합전법에서 기병의 역할을 극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마상쌍검. 나는 듯 달리는 말 위에서 쌍검을 휘두르고 있다


 

기마무예의 무사 최형국

 

저 무사는 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리지

정말 저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째

말과 하나가 된 것 같네.”

대단한 사람이네. 나는 듯하다는 말을 알 것 같네.”

 

기마무예의 첫 번째 시범은 활쏘기였다. 나는 듯 달려와 활을 과녁을 항해 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리고는 이어서 마상쌍검, 마상월도와 마상편곤 등의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다시 한 무사가 말을 달려 나온다. 손에 쥔 검으로 순식간에 5개의 벌려놓은 짚단을 토막 내고 달려간다.

 

 마상월도 역시 두 손을 다 사용한다. 마상무예는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사람들은 시범단의 무사 최형국이 말을 달릴 때마다 감탄을 한다. 마치 말과 한 몸이 된 듯 빠르게 달려와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몸에 전율이 온다고 표현을 한다. 무사 최형국은 자신이 그동안 연구하고, 직접 시연하던 무예 24기 중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내용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써냈다.

 

공부하는 무예인으로 남고 싶다고

 

지난 해 편찬한 이 책은 288쪽 분량으로 임진왜란기의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특성부터, 19세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쇠퇴기까지를 시대별로 정리를 하였다. 최형국은 중앙대에서 조선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朝鮮後期 騎兵馬上武藝 硏究)’라는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사무사이다.

 

무예24기 시범단의 최형국은, 실제 조선시대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 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이기도 하다. 그러한 무사가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보면, 마치 옛 장용영 무사의 위엄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이 그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보이는 마상무예를 보고 감탄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벌려놓은 5개의 짚단을 눈 깜짝할 사이에 베고 갔다. 벤 짚단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다음 짚단이 잘리고 있다

 

끝으로 다섯 개의 거리를 둔 짚단을 베는 것을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나의 짚단이 칼에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다음 짚단이 잘리고 있다. 순식간에 5개의 짚단을 다 자르고 말을 달려가는 무사 최형국. 그는 영원히 공부하는 무예인으로 남고 싶다고 늘 이야기를 한다.

 

저 분은 정말 옛 무사들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활을 쏘고 짚단을 칼로 순식간에 베고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예전 장용영의 무사들의 위용을 알 것 같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올해 무예24기 시범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왔는데, 정말 좋은 구경을 하고 갑니다.”

박수를 하도 많이 쳐서 손이 얼얼하다고 하는 한 관람객은, 좋은 구경도 하고 아이들이 무사들과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면서 즐거워한다.

한 무예인이 자신이 그동안 연구하고, 직접 시연하던 무예 24기 중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내용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써냈다. 이 책은 288쪽 분량으로 임진왜란기의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특성부터, 19세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쇠퇴기까지를 시대별로 정리를 하였다.

 

책의 저자인 최형국은 실제 조선시대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 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이다. 자신이 연마해 온 무예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전공하여 중앙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온 몸으로 마상무예를 연마하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기까지, 마음 속에 응어리를 풀지 못한 저자는 이 책속에 모든 것을 다 담아냈다.

 

 

특히 본 서의 주제인 마상무예 뿐만 아니라 전통무예 전반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실기사를 바탕으로 한 무예사 연구의 시초를 연 조선시대 군사, 무예 전문가다. 현재 수원 화성행궁에서 매일 시범 공연되고 있는 무예24상설공연(수원문화재단 주관)의 수석단원 및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인 <朝鮮後期 騎兵馬上武藝 硏究>(중앙대학교 2011, 8)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안타까운 무예인의 현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인(武人)’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마치 현재 학계의 흐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에 대한 연구나 군사(軍史)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하늘 높이 날아갈 수 있듯이 국가는 문()과 무()가 균형을 이뤄야만 안정적인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학문에서도 이러한 문무균형의 원칙은 산산조각 나버린 지 오래고, 안타깝지만 거의 문 중심의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무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연구해서 생기는 조금은 편향된 시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경우 쉽게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하기에, 생계유지도 막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임진왜란기부터 19세기까지의 체계적인 마상무예 연구

 

10년 이상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펴내고, 그것을 보완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기까지 오직 무()와 무인(武人), 마상무예에 몰두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최형국 박사는 본 저서에서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를 실제 무예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이론에 실기를 함께 병행해 역사학으로서의 무예사에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가 위기를 겪은 뒤,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무예사적 특성과 이에 따른 전술적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저자는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주변 국가의 군세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왔고,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중 특수한 병종(兵種)인 기병과 기마무예라는 군세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을 통해, 조선시대의 무예사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또한 당시 전술의 변화와 정치, 사회적인 변화들까지 확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기병에 대한 제도사적 접근의 한계와 연구 시기의 협소성을 뛰어넘어, 기병의 전술사적 연구와 더불어 기병이 훈련했던 마상무예의 실기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조선후기 전반에 걸친 기병의 마상무예 변화와 특성을 살펴본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노력한 흔적 역력해

 

기마무예는 한 시기를 정점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정조대에는 장용영(壯勇營)을 중심으로 한 기병 강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사도세자가 만든 보병무예 중심의 '무예신보(武藝新譜)'에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추가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하여 중앙군영과 지방군에 보급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편찬된 병서인 '병학통(兵學通)''이진총방(肄陣總方)' 등에는 기존 병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의 다양한 진법들이 실려 있어 기병전술 강화를 의도했다. 이러한 기병 강화 정책은 화약무기의 발달과 함께 정조대에 완성된 거··(車騎步) 통합전법에서 기병의 역할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화약무기 연속 사격의 단점을 보완하여 다양한 전술구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더불어 기병의 마상무예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마상편곤이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기병의 필수무예로 정착되었다. 마상편곤은 적에게 깊숙이 접근하여 근거리에서 빠르게 적을 타격할 수 있어 기존의 환도나 기창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정비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쇠퇴하였다. 훈련대장 박종경이 편찬한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화약무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변화하는 전술사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기병의 핵심 업무가 국왕 원행 호위나 궁궐 숙위 부분으로 한정되었으며, 마상무예의 경우도 기병의 쇠퇴현상에 따라 점차 궁궐 숙위병 위주로 한정되어 훈련되었다. 이러한 기마무예의 쇠퇴는 화약무기의 급격한 발달로 인하여 그 실효적 가치를 잃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도서출판 혜안 펴냄, 지은이 최형국(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288, 26천원, 신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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