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엊그제만 해도 덥다고 난리를 쳤는데 벌써 찬바람이 인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인해 날씨가 더 쌀쌀해질 것으로 보인다. 15일 오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가 않아 그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평택 만기사를 찾았다. 이곳은 보물 제567호로 지정이 된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기사(萬奇寺)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548번지에 소재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만기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벌써 만기사를 다녀온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만기사는 많은 불사를 이뤄 가람 안에 전각이 늘어났다. 전형적인 산지가람 형태인 만기사. 주차장에서 걸어올라 천왕문을 지난다.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사찰

 

만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낮은 산비탈을 깎아 3단으로 전각을 배치한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에 남대사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만기사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입증할 만한 것은 보물로 지정이 된 철불인 철조여래좌상 뿐이다.

 

만기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헌종 9년인 1843년에 기록한 <진위현읍지> 불우조에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는 만기사에 대해서

만기사는 무봉산 아래에 있다. 절 북쪽에는 돌구멍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데, 맛이 달고 차다. 옛날 세조가 이 절 앞에 수레를 멈추고 우물에 가 물을 마시고 하교하기를 이 우물은 감천이나 감로천이라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우물을 임금이 마셨다고 해서 어정이라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어, 만기사가 조선조에도 법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만기사에 기록은 기내사원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기내사원지는 진위현읍지의 기록을 예를 들어 만기사를 세조 때 중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밖에 보국사 창건문 등에도 만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기사는 큰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조까지도 사세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1972년부터 사격을 갖추기 시작해

 

현재 만기사의 당우로는 보물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무봉서원, 명부전, 종각, 감로당, 심우당, 원통전, 요사 등이 있다. 1972년부터 불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기사는, 주지인 김혜송 스님이 대웅전과 요사, 삼성각을 지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서요사를 신축하였으나, 1979년 동요가사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1980년에는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고,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만기사의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의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이 유일하다.

 

길상좌를 하고 있는 단아한 철조여래좌상

 

높이가 1.43m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은 현재는 금으로 도금하였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우견편단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라는 길상좌를 하고 앉았는데,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다.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이 자세는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인 항마촉지인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평택 만기사. 잠시 멈추었던 비가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쌀쌀해질 텐데, 답사의 속도를 높여야만 할 것 같다.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실펴 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주산인 백공산보다 강해, 지세가 약한 주산의 힘을 돋아주어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는 것.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의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한 때는 가람의 크기가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조선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사 김세평이 현재 양로당의 전신인 노계소 신도계와 협의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도심 속에 자리한 선원사. 좌측이 약사전, 우측이 대웅전이다. 전각 앞게 각각 두 개씩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이 있는 도심 속의 절 선원사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다. 예전에는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라고 하여, 해질녘 울리는 선원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을 한 경치로 삼을 정도였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동종, 약사전 등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등이 소재하고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고찰답게 선원사에는 심심찮게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찾아든다. 도심 속에 이러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은 선원사에 들려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볼까? 그것은 바로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문화재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이란 그 절에 어떠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문화재의 보존과 홍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약사전과 약사전 앞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보물 철조여래좌상과(가운데) 유형문화재 약사전의 안내판이다.

지워진 안내판,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낯 뜨거워

남원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의 양으로 따지면, 볼거리가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원에서 문화재를 찾아보기란 정말로 힘들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만인의총과 광한루원 밖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이 두 곳의 사적과 명승은 남원을 대표할만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화재는 큰길서부터 유도를 하는 안내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큰 길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문화재를 찾아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문화재도 없고, 역사도 입증되지 않은 사찰은 버젓이 공식적인 안내판에 소개가 되어있고, 정작 역사가 입증되어 있는 사찰은 그 어디에도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과 유형문화재인 동종 안내판과 문화재자료 대웅전 안내판. 그러나 정작 유형문화재인 동종은 약사전 안에 있었다.

더구나 보물 등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선원사 등은 어디에도 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선원사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네 개의 문화재 안내판은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글자가 다 지워져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도 새로 제작 중이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남원의 문화재는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제대로 된 유도를 하는 안내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워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안내판 때문이다.



문화예술도시라는 남원. 과연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자랑을 할 수 있으려는지. 낯 뜨거운 이러한 안내판. 하루 빨리 시정이 되기를 바란다.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창건된 남원 실상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불상 역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처음으로 실상사를 짓고 난 뒤 모셔졌다는 철조여래좌상. 당시 선종사찰에서는 직접 철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높이 2.69m의 이 철불은 그 중 가장 오래된 철불이다. 현재는 전각을 새로 짓느라 임시 전각에 모셔놓았다. 보물 제41호인 이 철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고수머리로 조성해 놓았다. 머리의 중앙인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보물 제41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균형 잡힌 몸매가 당시 철불의 조형미를 알게 해

이 찰조여래좌상의 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지만, 석불처럼 길게 늘어지지는 않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나, 목이 짧아 조금은 답답한 모습이다. 이렇게 목이 짧게 표현된 것이 철조여래좌상의 흠이다. 이마와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이나, 굳게 다문 입 등의 묘사가 뛰어나지만, 짧은 목으로 인해 근엄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이전의 모습은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비해, 통일신라 후기의 실상사 철불은 조금은 딱딱하게 표현이 되었다. 양 어깨에 갈친 법의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육중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철불이란 특성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틀을 만들어 조형을 해야 하는 철제조형물이라 조형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손과 발을 새로 제작해

철불의 어깨선은 부드럽고 가슴도 적당하게 처리되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 주름은 가슴 밑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한편으로 치우치면서 U자 형으로 주름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당시 철불의 조형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무릎아래는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발은 모두 발바닥이 위로 보이게 가부좌를 하고 않았으며,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대로 복원을 한 것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에서, 조금은 느슨해진 9세기의 불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조형된 것으로 의미를 있다고 하겠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 동종

실상사 경내에는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가 있다. 높이 123㎝, 입 지름 83㎝의 동종으로 현재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이다. 이 동종은 조선조 숙종 20년인 1694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실상사 보광전 안에 자리한다. 이 동종은 머리 부분인 용뉴에는 용이 발톱을 세워 종을 붙잡고 있는 형상이 있으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간략화 되어 용의 꼬리를 감은 모습이다.

종의 어깨선을 따라가면서 유곽을 새겼으며, 몸통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 네 개의 유곽에는 각각 꽃무늬를 세 줄씩 아홉 개를 새겨 넣었다. 유곽 사이에는 꽃가지를 손에 든 보살입상을 새겨 넣어, 조선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동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용뉴와 몸통에 새겨진 보살입상

몸통 위쪽에는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흔히 동종에서 나타나는 넝쿨을 둘러쌓은 문양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아마 이런 형태의 모습은 조선조 후기로 넘어가면서, 범종의 구성이 많이 간략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몸통 중간에 새겨진 비천인상을 보아도, 이전의 동종에서 보이는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 등이 딱딱한 느낌을 준다.

실상사에 있는 두 점의 철제문화재. 그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조나 소조에 비해 흔하지 않은 철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실상사이기에, 몇 번을 찾아갔어도 또 둘러볼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남원시 도통동 392-1 선원사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22호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촘촘히 돋아 나있고, 이마 위쪽에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반달 모양을 표현하였다.

선원사(禪院寺)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1,135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원래 객산인 교룡산의 지기를 누르고, 주산인 백공산의 기운을 돋우어야 남원이 발전한다고 하여 지어진 절이다. 선원사는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되었다. 그 뒤 영조 30년인 1754년에 남원부사 김세평이 복원을 하였다.

보물 제422호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뛰어난 주조기법이 돋보이는 철불

선원사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펼쳐 있으며, 앞으로는 주공 1, 2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접하고 있는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약사전과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때문인가 보다.

약사전 안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전통적인 고려 철불의 형태로 주조 되었다. 삼각형의 얼굴은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인자함이나 유연함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와 꽉 다문 입, 조금은 앞으로 내민 턱 등에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얇게 표현이 되었는데, 넓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 것은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선원사 약사전(좌측)과 대웅전(우측) 맨 위사진 

팔과 다리에 나타난 옷 주름은 V자 모양으로 간략하게 처리를 하였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반듯해 당당한 느낌을 주며, 잘록한 허리에는 두 팔이 붙어 있다. 현재 철조여래좌상의 손은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가지만 서원을 빌어야 해요”

남원을 답사한 이유도 바로 이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절을 다니시는 많은 불자들이 선원사의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딱히 무슨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과다하게 소문을 내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말을 피하고는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더 궁금해서 찾아간 선원사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는 절집이다. 그러나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철조여래좌상의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고려시대의 불상이라면 이미 천년 세월을 훌쩍 넘었다. 그 많은 세월동안 철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했을까? 아마 그 기운만으로도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을 듯하다.




“세 번만 찾아와 엎드리면 알음이 있다”
“한 가지 서원을 빌어보세요. 딱 세 번만 와서요. 그러면 정말로 그 서원이 이루어져요”

멀리서 일부러 신원사 약사전을 찾았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다. 정말일까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약사전에 좌정하고 계시니,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영험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지성으로 빌어본다면, 그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근엄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만 같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 속에서 지켜 낸 신원사 철조여래좌상. 고려 시대에 주조가 된 철조여래좌상, 그 소중함이야 어디다가 비길 것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빌어보는 것은, 이 땅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세 번만 찾아가면 정말로 마음 아픈 사람들의 그 아픔이 가셔질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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