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창건된 남원 실상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불상 역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처음으로 실상사를 짓고 난 뒤 모셔졌다는 철조여래좌상. 당시 선종사찰에서는 직접 철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높이 2.69m의 이 철불은 그 중 가장 오래된 철불이다. 현재는 전각을 새로 짓느라 임시 전각에 모셔놓았다. 보물 제41호인 이 철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고수머리로 조성해 놓았다. 머리의 중앙인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보물 제41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균형 잡힌 몸매가 당시 철불의 조형미를 알게 해

이 찰조여래좌상의 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지만, 석불처럼 길게 늘어지지는 않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나, 목이 짧아 조금은 답답한 모습이다. 이렇게 목이 짧게 표현된 것이 철조여래좌상의 흠이다. 이마와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이나, 굳게 다문 입 등의 묘사가 뛰어나지만, 짧은 목으로 인해 근엄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이전의 모습은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비해, 통일신라 후기의 실상사 철불은 조금은 딱딱하게 표현이 되었다. 양 어깨에 갈친 법의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육중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철불이란 특성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틀을 만들어 조형을 해야 하는 철제조형물이라 조형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손과 발을 새로 제작해

철불의 어깨선은 부드럽고 가슴도 적당하게 처리되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 주름은 가슴 밑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한편으로 치우치면서 U자 형으로 주름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당시 철불의 조형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무릎아래는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발은 모두 발바닥이 위로 보이게 가부좌를 하고 않았으며,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대로 복원을 한 것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에서, 조금은 느슨해진 9세기의 불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조형된 것으로 의미를 있다고 하겠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 동종

실상사 경내에는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가 있다. 높이 123㎝, 입 지름 83㎝의 동종으로 현재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이다. 이 동종은 조선조 숙종 20년인 1694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실상사 보광전 안에 자리한다. 이 동종은 머리 부분인 용뉴에는 용이 발톱을 세워 종을 붙잡고 있는 형상이 있으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간략화 되어 용의 꼬리를 감은 모습이다.

종의 어깨선을 따라가면서 유곽을 새겼으며, 몸통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 네 개의 유곽에는 각각 꽃무늬를 세 줄씩 아홉 개를 새겨 넣었다. 유곽 사이에는 꽃가지를 손에 든 보살입상을 새겨 넣어, 조선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동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용뉴와 몸통에 새겨진 보살입상

몸통 위쪽에는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흔히 동종에서 나타나는 넝쿨을 둘러쌓은 문양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아마 이런 형태의 모습은 조선조 후기로 넘어가면서, 범종의 구성이 많이 간략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몸통 중간에 새겨진 비천인상을 보아도, 이전의 동종에서 보이는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 등이 딱딱한 느낌을 준다.

실상사에 있는 두 점의 철제문화재. 그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조나 소조에 비해 흔하지 않은 철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실상사이기에, 몇 번을 찾아갔어도 또 둘러볼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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