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살에 내림을 받았습니다. 그 전부터 이미 신통이 되었는데 계속 거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너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제가 종가집에 종부인데 어떻게 이 길을 걷겠어요. 당시만 해도 무당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할 때인데요. 그리고 시집이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아무도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죠.”

 

사연이 없는 기자(祈子)란 없다. 누구나 내림을 받기 전에 고통을 먼저 받는다. 대개는 이를 무병(巫病) 또는 신병(神病)이라고 한다. 신병은 여러 가지로 찾아온다. 물질적으로 오는 경우는 이유 없이 많던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딱히 돈을 나갈 이유도 없었지만,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시집을 와서 찾아온 신병

 

또 한 가지는 정신적인 신병이다. 헛것이 보이는 환시(幻視) 현상에, 소리가 들리는 환청(幻聽) 현상까지 겹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함께 찾아오면 그 누구도 버티기가 힘들다.

 

결국엔 내림을 받게 되고 만다. 그리고 나서야 아프던 몸도 나아지고, 우환이 들끓던 집안도 잠잠해진다. 신병을 앓으면서도 계속 내림을 받기를 거부하면 급기야는 인다리현상이 나타난다. 주변에 가족들이 한 사람씩 죽어나가는 것이다. 인다리란 사람으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병이다.

 

남편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신병이 있다는 것을요. 참 갑갑한 시간이었죠. 결국엔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이 가루가 되는 듯한 고통이 와서야 내림을 받았죠. 세류동에 거주하시던 정종화 선생님께 내림을 받았는데, 당시는 수원에서 가장 잘 불리는 분이셨어요.”

 

 

신혼 초부터 이상한 것들이 보여

 

23세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 때 시집의 조상을 보았다고 한다. 종가집이다 보니 집안에 식솔들이 많아 새벽 4시면 일어나 밥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있더라는 것. 세를 들어 사는 집 손자가 말썽을 피우고 도벽이 있어 할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마당을 서성이는 줄 알았다고 한다.

 

저는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시집을 와서부터 시집의 조상님들을 보기 시작했죠. 그 할머니한테 아이가 속을 썩이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보이지 않고요. 대개 시어머님이 시장을 저녁에 가는데 그날따라 일찍 장을 보러 가자고 하시데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시할머니 제사다라고 하시잖아요. 제가 본 할머니가 바로 시할머니였던 것이죠.”

 

그런데 시할머니 제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하더라는 것이다. 살아서 잘해주지 죽은 다음에 잘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더니 억울하고 분하다라는 말이 튀어 나왔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너무 몸이 아파서 내림을 받았지만, 남편은 사람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눈물로 점철 된 시간이 흘렀다.

 

 

재주는 신령이 주지 않아요.”

 

남들은 신을 받고나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고 했는데, 신을 받고나서도 고통은 가시지를 않았다. 벌써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세 번이나 변한 것이다. 그동안 남편도 사업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지금은 임영복 소장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을 왔을 때 큰 농장을 운영했어요. 연무동에서 갈비집도 크게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면서 쪽박 하나가 그 물에 둥둥 떠다니더라고요. 한 마디로 쪽박을 찬다는 뜻이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12거리 전수소 임영복(, 59)소장. 굿판에서 만난 그녀는 굿이 남다르다. 요즈음 들어 선거리 굿을 한다고 하면 소리 지르고 껑충대고 뛰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임영복 소장의 굿채는 남다르다. 품격이 느껴진다. 곱게 걷고, 소리 잘한다. 그런 임영복 소장이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5 자신의 자택 지하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경기지방의 굿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성주기도도차서(巫堂城主祈禱圖次序)에 기인한다. 그런 굿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옛말처럼, 제대로 굿채를 익힌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주를 모든 기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요즘 기자들의 굿을 보면 저것이 과연 굿인가 할 정도로 민망할 때가 있어요. 굿은 장단, 사설, , 소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입니다. 거기다가 신탁인 공수까지 곁들여야죠. 그런데 그런 채가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12거리 전수소를 열고 1:1로 재주를 알려주려는 것이죠.”

 

굿판에서 만난 임영복 소장의 굿은 아름답다. 장단 잘 치고 소리 잘한다. 풍부한 문서까지 익혔다. 그래서 늘 굿판에 불려 다닌다. 이런 만신들을 보고 청배만신이라고 한다. 벌써 10년 세월 그렇게 팔도를 다니면서 굿판에 섰다. 그 재주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언제 또 그 신명나는 굿을 볼 수 있을지.

 

4회 이주영 개인전을 찾아가다

 

해움미술관’, 수원시 팔달구 교동 91-1 지하에 자리한 미술관이다. 컴컴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넓은 전시관이 나온다. 새로 미술관을 개장해 첫 전시인 4회 이주영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1010일부터 시작한 전시는 116일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작가 이주영은 중앙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전시실 안에는 벽에 그림들이 걸려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다가 낯익은 모습들이 보인다. 한계령과 골목길들. 그 골목길들이 왠지 낯이 익다. 한계령이야 헤아릴 수도 없이 넘은 곳이다. 그런데 이 골목들이 왜 눈에 익을까? “지동 골목입니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골목이니까요.” 작가의 설명에 ~ 그랬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골목을 그리는 이주영 화백

 

이젠 작가라는 말보다는 화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세월을 보냈다. 벌써 54세라는 나이를 먹었지만, 그는 아직도 소년과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린 햇수에 비해서 많은 개인전을 갖지는 않았다. 3회의 개인전을 수원미술관에서 가졌다.(2003, 2009, 2011) 그리고 이번에 4회째 개인전을 연 것이다.

 

단체전은 미술동인 새벽전, 환경미술전, 나눔회전, DMZ, 우리가 서야 할 이 땅에서 전, JAALA, 아시아는 지금 전, 수원민미협전, 인권미술전, 백만송이 실루전, 동인전 등 많은 단체전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현재 민족미술협회, 나눔회, 교동창작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엔 아픔이 실려 있었다.

 

29일 오후 해움미술관을 찾았다. 작가 이주영은 수원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죠. 사실은 어릴 때 지독한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1년 정도 일어설 수가 없으니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것이 그리기와 만들기 증 앉아서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없었죠. 그림에는 어릴 적부터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랬기에 지금은 자신의 화실을 갖고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 86-1번지 이층에 이주영 화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림이 남다르다. 어릴 때의 아픔이 있어서인가? 그의 그림 속에는 진한 아픔이 있다. 이리저리 비뚤어진 골목길,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쓸쓸한 뒷모습. 가을이 서리서리 내린 한계령. 그가 즐겨 그리는 그림들 속에는 아픔이 실려 있었다.

 

격동의 세월을 그림으로 표현 해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그림을 그립니까?”라고 물었다.

그려야 하니까요. 저에게 그림은 운명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죠. 좋아하는 것들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잘 맞는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물론 그림을 그리면서 아픔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80년대부터 90년 초까지 격동의 세월에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진한 슬픔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0년 그림을 떠나 있었어요. 안성, 평택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그림에서 손을 땠죠. 그런데 그림이 도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수원으로 올라왔어요. 선배의 화실 한 귀퉁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가 지난해에 화실을 마련했어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을 가르치는데, 수입은 영 시원찮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바로 그림에 있다고 한다. 이주영 작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돈으로 따지면 엄청날 것 이라고 하며 웃는다. 시간이 지나면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웃는 그의 미소을 보면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깊은 아픔 속에서 스스로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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