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강쇠란 놈의 거동봐라 저 강쇠란 놈의 거동봐요. 삼십명 나뭇꾼 앞세우고 납작지게를 걸머지고 도끼는 갈아 꽁무니차고 우줄 우줄 넘어간다. 거들거리며 넘어간다. 이산을 넘고 저산 넘어 산돌아 들고 물돌아 들어 죽림 산천을 돌아들어 원근 산천을 바라보니 오색초목이 무성하다.

마주섰다고 향자목 입마추면 쪽나무요. 방구 꾸며는 뽕나무요. 일편단심에 노간주며 부처님 전에는 회양목 양반은 죽어서 괴목나무 상놈을 불러라 상나무 십리 절반에 오리목 한다리 절뚝 전나무요. 오동지신이 경자로다 원산은 첩첩 태산은 층층 기암은 주춤 낙수는 잔잔 이 골물이 출렁 저 골물이 솰솰 열에 열두골 물이 합수되어 저 건너 병풍석 마주치니 흐르나니 물결이요 뛰노나니 고기로구나. 백구편편 강상비요 낙락장송은 벽상치라


(아니리) 여봐라 하 이 변강쇠란 놈이 나무를 나가 나무는 못하고 사면팔방 돌아다니다가 길가에선 큰 장승을 패다 불을 땠더니 아 이 장승이 또 무슨 죄로 남의 집 아궁이 귀신이 되겠느냐 말이지.

변강쇠타령에서 장승이 강쇠에게 굴욕을 당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강쇠는 잘 마른 장승만 패다가 불을 놓았다고. 전국에 장승들이 비상이 걸렸다. 노들 대방장승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더니, 장승들이 각각 강쇠녀석의 몸에 병균을 하나씩 심었겠다. 결국 강쇠란 놈은 오만잡동사니 병이 다 들어 죽고 만다.

장승은 성기숭배사상에서 기인했을까?

장승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것일까? 가장 오랜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의 ‘비명(碑銘)’에 적혀있다. 통일신라시대인 759년 장생표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장승의 기능은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장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의 기록은 1085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석표’이며,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생,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의 석장승 등이 보인다. <용재총화>와 <해동가요> 등의 옛 문헌에도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장승은 어떻게 세우게 되었을까? 가장 많은 학설은 ‘남근숭배’와 사찰의 경계표시에서 나왔다는 ‘장생고표지설’ 등이다. 또한 솟대나 선돌, 서낭 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속기원설‘도 있다. 그러나 장승이 언제 무슨 연유로 최초로 세워졌는가에 대한 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장승은 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장승, 행로에 서서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마을의 입구에 서 있는 축귀장승, 성문이나 병영, 해창(海倉)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영은사지 석장승을 찾아가다

함양 백전면 백운리에는 석장승이 서 있다. 이 장승이 서 있는 곳은 예전 신라시대 영은조사가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영은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6일 밤새도록 심하게 토사를 한 덕에 답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길을 나섰다. 비가 억수로 쏟아 붓는데도, 답사를 떠난 것이다. 백운면에 들어서 마을 주민에게 장승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단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요즘 내비게이션은 웬만한 문화재는 다 안내를 해준다. 그러나 정작 영은사지 석장승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빗길에서 물어물어 찾아가는 수밖에. 겨우 장승을 찾아냈다. 백운암으로 오르는 산길 입구 양편에 두 기가 서 있다. 그런데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딴 곳의 장승과는 다르다. 양편에 서 있는 장승의 형태와 크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두 장승이 같은 목적을 갖고 제작이 되었다는 것은 복판에 음각된 ‘우호대장군’과 ‘좌호대장군’이란 글씨 때문이다. 이 장승은 각종 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호법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강쇠도 도망갈 험상궂은 모습

산으로 오르는 좌측의 장승은 키가 작다. 복판에 글씨를 보니, 밑 부분이 땅에 많이 묻힌 듯하다. 원형에 가까운 돌을 위를 잘라 관처럼 만들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을 새겼다. 눈은 양쪽으로 치켜져 올랐으며, 코는 주먹코이다. 입은 아랫입술이 두터우며 이빨이 듬성듬성 나있다. 복판에는 좌호대장군을 음각했는데 ‘좌호’만 보인다.

길 우측에 있는 석장승은 네모난 돌의 윗부분을 뾰족하게 조성하였다. 흡사 고깔을 뒤집어 쓴 듯한 형상이다. 눈썹은 굵게 표현했으며, 눈은 왕방울 눈이다. 코는 좌우로 퍼졌으며, 입은 두툼하고 이빨이 굵게 옥수수 알처럼 조각이 되었다. 복판에는 우호대장군이라 음각을 하였다.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좌호대장군의 오른쪽 아래에 영조 41년인 1765년을 표시하는, ‘건륭 30년 을유 윤2월’이라고 적혀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찾아간 영은사지 석장승. 입가에는 수염이 여러 가닥 있어 더욱 험상궂게 보인다. 아마도 이 영은사지 장승을 변강쇠가 만났다면,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빗속에 서 있는 장승을 뒤로하며.

장승은 많은 이름이 전한다. 장승, 장생, 장성, 수살, 수살목, 돌하루방, 벅시, 벅수 등 지역마다 그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긴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나무나 돌을 깎아 마을 입구에 솟대나 돌탑과 함께 세우지만, 장승만을 별도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원래 장승은 절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게표시를 하는 표시장승이 시초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마을을 지키는 수호장승의 역할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장승의 역할은 표시장승, 수호장승, 그리고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등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장승의 복판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기본적인 대장군이 가장 많지만, 동방청제축귀대장군, 상원주장군 등 마을마다 각기 특징적으로 적기도 한다.



내를 건너 좌측에 서 있는 석장승. 왕방을 눈에 주먹코가 해학적이다.

모두 남자뿐인 실상사 장승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소재한 실상사. 실상사 경내를 들어가려면 작은 내 하나를 건너게 된다. 그런데 이 내를 건너기 전에 좌측을 보면 석장승 한 기가 서있다. 이 장승은 다리를 건너면 좌우에 또 한 기씩의 석장승이 서 있다. 원래는 다리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에 두 기씩 모두 네 기의 장승이 서 있었으나, 1936년 홍수에 한 기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장승은 일반적으로 남녀 한 쌍을 세우거나, 남녀를 구분해 양편에 집단으로 세운다. 그러나 실상사 석장승은 모두 남자이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눈은 왕방울 눈이 튀어나왔다. 입에는 양편에 송곳니가 솟아나오고, 코는 주먹코가 얼굴에 비해 커다랗게 표현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절을 지키는 장승이라기 보기에는 해학적이다.



내를 건너 우측에 선 장승. 건너편에 있는 장승과 길을 사이에 마주한다.

300년 전에 절의 수호를 위해 세운 장승군

절 입구에 세우는 장승은 신성한 지역을 알리기 위한 표시장승이다. 즉 이곳서부터는 절의 경내이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표시장승이라고 보기보다는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가 평지에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내가 있어 물과 불 등에서 실상사를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실상사 석장승은 장승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조선조 영조 1년인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300년이 다 되어가는 장승들이다. 사방에 세운 장승의 형태는 거의가 같은 모습이다. 한 기가 없어져 버린 실상사 장승은 절을 수호하는 험상궂은 장승이기 보다는, 해학적인 모습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 생긴 모습이 재미있다. 세 기가 남은 석장승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이 되었다.


짝을 홍수에 잃은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에 있는 장승
 
볼수록 웃음이 나와

땅위로 솟은 장승의 높이는 2.5m ~ 2.9m 정도이다. 너비는 40~50cm 정도이며 모두 남장승으로 비슷한 형태로 조각이 되었다. 모자 밑으로는 불거진 이마가 있고, 눈은 왕방울 눈이다. 양편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코는 커다란 주먹코인데 코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다. 그 밑으로는 금방이라도 이를 보이며 웃을 것만 같은 입이, 일자로 표현되었다. 두 기의 장승은 송곳니가 보인다.

중요민속자료 제15호인 실상사 석장승. 비가 오는 지난 11월 27일에 찾은 석장승은 한기가 홍수에 떠내려가서인가, 조금은 한편이 빈 것처럼 허전히다. 실상사를 찾을 때마다 보는 장승이지만,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아마 그 해학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이 석장승이 절을 지키는 수호장승이라고 한다면, 그 모습 속에는 어느 맘씨 좋은 절집의 불목하니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따스함과 웃음이 배어있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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