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현재 남아있는 가옥의 안채는 조선 정조 7년인 178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사랑채는 그보다 늦은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으로 지은 시기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인 정광보가 마을에 들어온 시기인 1400년대 후반으로 본다.

 

8월 8일 돌아본 동래정씨 종택. 현재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으로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 순으로 되어 있어 평면 분할이 독특하다. 사랑채와 작은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사랑채는 앞면 3칸으로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온기가 느껴지는 집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집이 생기가 도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대개 사람이 실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집이 좋아도 무엇인가 부족한 듯하다. 군포 동래정씨 종택은 집안을 여기저기 손을 보았지만 외형적으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랑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바깥담장은 장 정리가 되어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에 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 실한 연꽃만 보아도 이 종택은 간수가 잘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채였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용도를 변경해, 중앙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사무실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앞면 3칸으로 대문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후에 5칸을 더 지어 안채의 폐쇄성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문은 보아지 않고 바로 사랑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과 작은사랑을 둔 종택

 

안채 앞으로 지은 사랑은 큰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구분을 하였다.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큰 사랑은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의 순으로 집을 구성했다. 서쪽 맨 끝에는 방의 벽면을 막고 그 앞으로 누정을 한 칸 앞으로 돌출시켜 올렸다. 누정은 삼면이 터지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장초석 위에 네모난 기둥을 올리고 난간을 둘렀다.

 

 

 

큰 사랑채의 기단을 장대석으로 마감을 한 것에 비해, 작은 사랑은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2층으로 기단을 쌓았다. 작은 사랑은 모두 세 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안채에서 바로 사랑으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찍고 열려있는 문으로 안채를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새끼를 데리고 있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새끼라도 해할까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집을 돌아 중문으로 돌아가니 문이 닫혀있다. 귀농본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한잔 찍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ㄱ 자형의 안채에서 느끼는 종택의 위엄

 

안채는 ㄴ 자 형의 중문을 마주하고 ㄱ자로 꺾어지은 팔작지붕이다. 안채를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는 두 칸의 부엌을 조성한 듯한데, 현재는 그곳을 방으로 꾸민 듯하다. 댓돌 앞에 신이 놓여있다. 꺾인 부분에 대청을 놓고 이어 안방을 드렸다. 안방의 끝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도 유리벽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인이 없이 커다란 개가 지키고 있어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안채를 보면서 종택의 위엄이 서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집을 지은 정광보는 파시조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의 큰아들로, 맞은편 산 중턱에 조성된 정난종의 묘를 조성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독특한 사랑채의 구성과 작은사랑채의 위치 설정 등이 독자적인 집으로,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의 살림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다. 고택을 돌아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모든 고택에 사람들이 온기를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래등 같은 집에 온기가 없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같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누마루에 앉아 위로 올려 건 창문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 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을 하던 곳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을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서계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아마도 서계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 주인이 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를 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이 있어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을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진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를 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불이 나 많은 자료가 전소되어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진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 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 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문경에서 59번 도로를 타고 월악산국립공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 - 6에 소재한 이 고택은 청백리로 유명한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의 옛 집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옥은 안채 및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고 우측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도로변에 있어 찾기도 수월한 이 고택은, 문경지방 양반의 주거지로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부분이 서로 독립된 공간구성으로 마련되어 있다. 여느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장수황씨 종택은,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현감을 지낸, 칠봉 황시간(1588~1642)이 35세 때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가옥이다.

 

종택의 중후함이 느껴져

현재의 건물은 당시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집이라는 것이 살다가보면 손을 보게 되고, 필요에 따라 증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400년 전의 집이 그대로 형태를 보존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4칸으로 구성 된 솟을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그 오른편에 안채가 있다. 그리고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반집의 어디나 그렇듯 사랑채 오른쪽으로 중문채가 있었으나, 화재로 중문과 마구부분이 소실되고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툇간을 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측 2칸에 난간을 돌린 마루를 두고 2칸 온돌방과 연결시켰다. 우측 칸은 전면에 다락방을 설치하고 하부는 수장공간으로 활용한 점도 이 집의 특징이다. 뒤쪽으로는 반칸 정도의 감실을 두고 다시 온돌방을 설치한 3겹의 칸살로 구성되었다. 팔작집으로 마련한 사랑채는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나름 들어나지 않는 멋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우측 한칸을 개방하여 누정식으로 사용을 하고
좌측의 다락방 아래는(맨 아랫사진) 수장고로 사용을 하고 있다.

안주인의 생활을 보호한 안채의 구성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ㄱ자형으로 구성된 평면공간이다. 안채는 사랑보다 조금 뒤쪽으로 물려서 구성을 했다. 안채의 꺾어진 부분에는 사랑과 유사한 안사랑공간을 만들었다. 사랑채 쪽으로 툇간을 두면서 뒤편으로 방을 배치하여 사랑과 연결을 하였으며, 전면으로 2칸 온돌방을 마련하여 앞쪽에서의 시선을 차단시켰다.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볼 때, 좌측부분은 안사랑 공간으로 마련하고 우측이 일반적인 안채의 기능을 하고 있다.

안채는 지금은 앞쪽이 훤히 트여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중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안채를 둘러 싼 안담이 있었을 것이다. 여지저기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안채는 창호지가 다 찢겨져 너덜거린다. 도로변에 자리한 종택은 지나는 사람들이 들렸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디를 가나 전각의 건물 대부분이 이렇게 창호지가 찢겨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문화수준은 기대치 이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 꺾인부분에 안사랑과 안방 , 윗방을 배치해
안채 여인들의 생활을 보호한 점이 특이하다. 

사랑과 안채를 연결하는 중문채는 중문 등이 사라져 버려 뭉텅 잘린 느낌이 든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문쪽으로 1칸의 마루를 놓고 방이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제대로 복원을 하면 양반가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장수황씨 종택. 집안을 돌아보면서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여기저기 부족한 부분이 집의 전체적인 구성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려는지. 못내 아쉬운 종택을 뒤로하면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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