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데오거리는 요즘 다양하게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남문 로데오거리, 한 때는 젊음의 거리였다. 그러한 로데오거리가 사양길에 들어선 것은 수원역에 애경백화점이 들어서고, 젊은이들의 발길이 역전 통으로 옮겨가면서 부터이다. 거기다가 영통 등 주변에 신시가지가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그쪽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한 때는 젊음의 열기가 사그라질 줄 몰랐던 거리는, 젊은이들의 발길조차 뜸한 숨죽인 거리로 변했다.

 

그러한 남문 로데오거리를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다. 그들은 앞으로 거대한 롯데쇼핑몰 등이 입점하면 더 큰 난관이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자구책을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화성행궁서부터 로데오거리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크고 작은 전시관이나 갤러리들과 길거리에 마련한 전시관 등이다. 로데오거리의 상인들은 이 갤러리들로 인해 다시 옛 영회를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아이파크 미술관으로 인한 기대도 커

 

지난 해 1221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중인 (가칭) 수원아이파크 미술관은 2015년 상반기 중 개관예정으로 현대산업개발()에서 문화시설 확충을 위한 사회 환원 차원에서, 수원시 부지에 300억 규모로 건물을 지어 기부 채납하기로 수원시와 MOU를 체결해 개최하게 됐다. 한창 공사 중인 이 아이파크 미술관으로 인한 기대가 크다.

 

로데오거리 상인들은 이 미술관이 완공이 되면 그곳을 기점으로 로데오거리 전체를 잇는 미술관광 라인을 조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행궁 앞에 들어설 미술관에서부터 수원 향교까지를 잇는 긴 구간을 미술의 메카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 거리 구간에는 크고 작은 전시관과 갤러리 등 15개의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로데오거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넘친 말을 들어보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아이파크 미술관이 완공되고 나면 이 로데오거리를 잇는 길에 많은 갤러리들과 전시관을 연결해 미술의 테마거리 조성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욱 이 로데오거리에는 수많은 미술학원들과 미술도구를 파는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미술의 메카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15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와 전시관 자리하고 있어

 

공사 중인 아이파크 미술관에서 로데오거리까지의 전시관과 갤러리들을 보면 수원문화재단 건물에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가 있다. 곁에 있는 화성사업소 건물 1층에도 아름다운 행궁길 예술마당 갤러리가 있으며, 수원 향교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행궁재 갤러리와 화홍 갤러가 자리하고 있다.

 

 

이어서 갤러리 풍경과 크진 않지만 쉼 없이 전시를 잇고 있는 임아트 갤러리가 자리한다. 그 뒷골목 안에는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주점을 겸한 남문 크로키 갤러리가 있다. 로데오거리로 들어서면 주차장 외벽에 마련한 남문 로데오 갤러리와 로데오 갤러리 특별관, 갤러리 93-1, 지하에 자리한 해움미술관, 그리고 두 곳의 정류장 갤러리가 자리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거리를 미술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미술의 거리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이 갤러리들이 서로 연계하여 전시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점을 홍보하기 위해, 획기적인 방안이 새워져야 한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궁서부터 수원 향교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미술의 거리’. 과연 옛 영화를 이제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으려는지, 그리고 수원의 명소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지 기대가 크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팔달구 창룡문로 56번길(지동). 손에는 붓 한 자루씩을 들고 벽에 열심히 칠을 한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아이들이 서로 의논을 해가면서 열심히 칠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남들은 주말이라 나들이를 가는데, 제법 따가은 날씨 속에서 어느새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삼성전자 연구원들의 가족 22명이 지동 벽화길 조성에 나선 것이다. 지동 벽화 조성은 딴 곳과는 다르다. 이곳은 여러 번의 공정 과정을 거쳐 벽화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우선은 그림을 그릴 벽을 말끔하게 다듬는다. 벽에 튀어나온 돌출물이나 갈라진 곳을 반듯하게 정리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흰색 칠을 한다.

 

 

흰색 페인트를 칠할 때는 좌우로는 붓질을 하지 않는다. 아래 위로만 칠을 한다. 그래야 얼룩이 생기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깨끗한 벽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마에 담이 맺힌 어린아이 하나가 그늘로 찾아든다.

 

힘들어요?”

, 더워서 힘들어요.”

누구하고 같이 왔어요?”

엄마하고 아버지하고요. 오늘 놀라가기고 했는데 여기서 벽화 그리자고 해서 왔어요. 그런데 너무 더워요

 

 

오후에는 60여 명이 찾아와 벽화작업

 

푸념을 하지만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다. 부모님과 같이 이런 체험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고성주씨는 벽화를 그리러 온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우유며 쵸코파이 등을 바구니에 한 가득 담아 내놓는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하나씩 들고 간다.

 

고맙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을 아름답게 꾸며주는데요. 아이들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무엇이라도 좀 주려고요

 

세상은 정으로 산다고 했던가? 벽화 골목을 조성하면서부터 부쩍 정이 늘어난 곳이 바로 지동이다. 예전에는 담을 쌓고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 마음의 벽을 허물기 시작하면서, 지동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변해가고 있다. 오후에는 60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수원자원봉사센터에서 봉사를 하러 나온 가족들과 삼성전자 연구원 가족들이다.

 

 

지동 벽화 나날이 늘어나

 

세월호 참사로 인해 그동안 침체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공황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이럴 때 벽화골목 조성 사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활력소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아이들과 같이 왔어요. 요즈음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요. 그래도 아이들에게 벽화를 그리러 가자고 하니 선뜻 따라나서서 정말 고맙죠. 그동안 아이들도 TV의 무분별한 보도를 보면서 많이 힘들어 했거든요.”

 

중학생인 딸과 함께 벽화를 그리러 왔다는 한 어머니의 말이다. 요즈음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들의 눈치를 살펴야한다는 것. 그동안 지동의 벽화골목은 매년 정해진 거리를 그림을 그려나가, 지난해까지 3년 동안 1.6km의 벽화길이 조성되었다. 올해 800m를 조성하면 2.4km로 벽화골목이 늘어나게 된다. 전국 최장의 벽화골목이다.

 

 

5개년 계획으로 세웠던 벽화골목 조성도 7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모든 작업을 다 마치고 나면 3.4km에 달하는 긴 벽화골목이 조성된다. 또한 이 벽화골목은 골목마다 주어진 테마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된다. 아름다운 화성과 벽화골목, 그리고 노을빛 전망대와 갤러리가 어우러지는 지동. 날마다 변화하고 있는 지동의 최장 벽화골목이 완성되는 날이 기다려진다.

 

삼성전자가 지동에 보이는 정성이 남다르다. 삼성전자는 각 센터나 팀마다 연구원들이 지난해부터 자동벽화길 조성에 앞장을 서왔다. 연구팀별로 더위를 이겨내며 지동 벽화 길을 조성하기 위해 많은 날들을 벽에 매달려 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휴일에는 각 가정별로 별도로 찾아와 개별 봉사를 하기도 했다.

 

326일 삼성전자의 처음으로 지동 벽화길 조성에 나선 팀은 VD사업부 소프트웨어 사업부 30명과, CS환경센터 품질보증그룹 22명 등 52명의 인원이 벽화길 조성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삼성전자 UX센터 연구원 70명이 827() 지동을 찾아왔다. 벽화 길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백미 전달식도 가져

 

UX센터 연구원이 27일 지동 벽화 길을 조성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때는, 트럭에 쌀을 함께 갖고 왔다. 지동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백미 10Kg 65만원 상당을 갖고 찾아온 것이다. UX센터장인 강동석 상무는 비정기적으로나마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연구원들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이다.

 

김민영 책임(과장급)이 인솔한 벽화 그림을 그리러 온 연구원들이 가져 온 백미는 제일교회 입구에서 전달식을 가졌다. 전달식에는 박찬복 지동장과 표영섭 지동주민자치위원장이 전해 받았다. 백미 전달식을 가진 후에 김민영 책임은

 

저희 강동석 상무님께서 연구원들에게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십시일반으로 쌀을 갖고 오게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 힘자라는데 까지 지동을 도울 수 있도록 노력을 하겠다. 저희 상무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시다라고 하기도.

 

 

IT 골목에 벽화그림 그려

 

UX센터 연구원 70여명은 지동 제일교회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기노헌 총괄팀장과 유순혜 작가에게 설명을 듣고 먼저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한다는 연구원들답게 백지 위에는 순식간에 밑그림이 그려졌다. 유순혜 작가는

 

그동안 이곳을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 아마도 디자이너들이다 보니 바로 생각들이 나는 것 같다. 그것을 그림으로 바로 표현을 하고 있어, 오늘 작업은 많이 진척이 될 듯하다.”고도.

 

밑그림의 작업을 마친 일행은 바로 지동 227번지 일대에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그리고 있는 IT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가까이 되었지만, 기온은 30도를 웃돌고 있는 무더운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에 붙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연구원들.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주민은 고맙다고 연신 말을 한다.

 

 

지동주민들도 고맙게 여겨

 

지난해에는 삼성전자에서 선물세트를 200개를 지동주민센터에 전달을 했다고 한다. 벽화를 그리고 있던 모습을 보던 한 주민은

 

지난해는 선물세트를 받아 고마웠다. 이렇게 우리 지동을 위해 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찾아와 그림을 예쁘게 그려주어서 정말 고맙다. 삼성전자 연구원들이라고 하는데, 저렇게 귀한 사람들이 와서 그림을 그리니 더욱 좋은 듯하다. 앞으로도 우리 지동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했다.

 

각 센터나 팀별로 지동 벽화골목 조성을 위해 찾아오는 삼성전자 연구원들. 올 해도 벌써 10여 회나 지동을 찾았다. 그리고 이들은 지동 271번지 일대에 IT벽화 길을 조성하고 있다. 그 벽화가 올 해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동을 위해 더 많은 그림을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울퉁불퉁한 시멘트벽에 달라붙어 칠을 하고 있을 때만 해도 궁금하기만 했다. 저 울퉁불퉁한 벽에 도대체 흰 칠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삼성전자의 가족들 역시 똑 같이 흰 칠만을 고집스레 해대고 있었다. ‘그냥 시멘트벽이 더러우니 희게 칠이라도 하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426() 꽤 많은 인원이 흰 칠을 한 벽에 달라붙어 있다. 속으로는 그저 또 흰 칠을 더하는 것이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그렸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저 2주 동안 말없이 벽에 달라붙어 필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울퉁불퉁한 벽에 삼성이 그려졌다

 

아침에 운동을 하려고 밖으로 나와 보니, 벽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림이다. 어제 저녁때도 신경을 쓰지 않아 보질 못했다. 그런데 벽면 여기저기 조그마한 그림들이 보인다. 미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럽다. 나가보니 울퉁불퉁한 벽면에 여기저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원시시대의 사람들로 그려진 인물상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원시시대의 인물들이 최첨단 기기를 손에 잡고 있다. 바로 삼성전자의 주력상품들이다. 휴대폰이며 탑 등을 들고 있는 원시인들. 누가 이런 발상을 핸 것일까? 거기다가 그림을 그리기도 만만치 않은 울퉁불퉁한 벽이다. 그림을 그리기엔 도저히 불가능한 벽에 아름답게 꿈을 그려 넣었다.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 어째 이런 발상들을 한 것일까? 여러 형태로 선을 그어 만든 시멘트벽에 칠을 한 것까지도 어려웠을 텐데, 거기다가 그림까지 곁들이다니. 무엇인가 색다른 느낌이다. 그림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가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원시인이 최첨단 기기를 손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삼성맨답다는 생각이다.

 

올해 지동 벽화길 변화를 꾀한다.

 

지동 벽화길을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삼성전자의 각 부서별로 지동 골목을 찾아들었다. 그들은 주말과 휴일을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찾아와, 땀을 흘리며 작업을 하는 열심을 보였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벽화길 조성을 시작하면서부터 지동의 벽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올 해는 삼성전자의 각 팀별로 지동을 찾아올 것입니다.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오시는 분들도 많이 오시겠지만, 삼성전자의 연구원들이 아마 더 많은 작업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올 해들어 벌써 200명이 넘는 연구원들이 지동을 찾아왔으니까요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총괄팀장의 설명이 아니라도 해도, 지나가면서 벽에 붙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삼성전자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만큼 삼성전자가 지동벽화에 쏟는 열정은 대단하다. 올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동을 찾아 올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솔직히 벽화를 그리러 간다고 하기에,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머리도 식히고 그림도 그리고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제 그림을 보고 간다고 생각을 하니, 그도 꽤 기분이 좋고요. 올해는 가족들과 이곳으로 와서 주말을 보낼까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린 그림이 오래도록 기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한 연구원의 대답이다. 삼성전자의 연구원들이 지동을 찾아와 벽화를 그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동벽화에 IT벽화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동벽화가 단순한 벽화가 아니라, 지역과 기업이 상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 바람직한 일이란 생각이다. 그리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재미난 그림으로 웃음을 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곳은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리 사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으로는 지릅재를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절터. 미륵대원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절터에는 현재 미륵리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있고,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미륵리 사지. 현재는 세계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중창 중에 있는데, 본존불인 석불입상으로 올라가는 입구 좌측에 커다란 귀부가 하나 놓여있다. 그 귀부의 크기로 보아, 이곳으로 운반을 하는 데만도 대단한 역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미륵리 사지에 소재한 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로 밝혀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이 귀부는 길이가 605cm, 높이가 180cm나 된다. 그 모습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과연 귀부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귀부는 머리가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귀부의 형태는 거북이 등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부의 경우는 거북이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우선 등에는 거북등에 있는 육각의 문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쪽 왼편 등에 작은 거북이 두 마리가, 어미의 등을 타고 오르듯 양각되어 있다. 그것도 주변을 파내고 양각을 한 형태이다. 등을 보면 중앙부분이 뾰족하게 올라있다. 이 형태도 일반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다. 머리는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길게 - 자형으로 판 입과 그 위에 작은 콧구멍, 그리고 양 옆에 동그랗게 표시한 눈 등이 사실적 표현을 했다. 앞발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을 했다.


거북이 등에 파 놓은 비좌는 거북 모양에 비해 크지가 않다. 1970년대부터 발굴을 시작한 미륵리 사지에서, 수차례 발굴을 했으나 비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귀부 위에 올려 질 비의 몸돌은 조성되지가 않았다는 것인지. 이 미륵리 사지에 이러한 귀부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미완성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미륵리 사지에 있는 귀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의구심이 생긴다. 그 첫째는 바로 이 귀부를 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더구나 이렇게 본존불,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있는 그 앞에 자리한 귀부. 등에 내 놓은 비좌로 보아서는 귀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등에 파 놓은 홈이 과연 비좌일까 하는 점이다.



비좌로 보기에는 형평에 맞지가 않는다. 적어도 이만한 귀부에 올릴 비문이라면 그 비의 몸돌 역시 상당히 클 것이다. 그런 큰 비문의 몸돌을 올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를 올리는 비의 받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일 이것이 비를 받치는 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시대에 따른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등에 새기는 문양이나, 거북이 몸에 용머리 등,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미륵리 사지의 귀부는 단순한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 거북이 형태로 다듬어 놓은 귀부의 뒤편 우측 꼬리 부분이다. 꼬리 부분에는 돌을 쪼아 내려는 듯 여러 개 구멍이 나 있다. 이렇게 일렬로 나 있는 구멍으로 보아, 이 귀부는 미완성작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귀부라면 이해가 간다. 귀부를 조성하기 위해서 조각을 하는 도중에, 중단이 되어 그대로 방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석굴식으로 만든 석불입상이나 오층석탑 등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된 절에서, 왜 유독 이 귀부만 완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미륵리 귀부가 주는 의문점

미륵리 사지에는 현재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첫째는 하늘재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 탑이다. 그리고 본존불인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충청도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굴식 법당의 주존불이다.

석불입상과 오층석탑의 사이에는 석등이 서 있고, 그 앞으로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 역시 고려 초기 탑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경내에는 당간지주와 불좌대 등 많은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이 미륵리 사지의 창건 당시의 사격이 어느 정도였는가 가늠이 간다.



이 몇 기의 문화재의 연대가 모두 고려 초기의 것으로 밝혀져, 미륵리 사지는 고려 초기에 있던 미륵대원이라는 절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미륵대원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을 짓고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석불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북녘을 호령하던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부는 언제 조성이 된 것이며, 무슨 연유로 이렇게 거대한 돌 거북을 조각한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 이 거북의 머리가 왜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본존불인 석불입상과 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에서 조성이 되었다면, 이것을 귀부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고려 초기 인근의 사지인 원주 부론의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와,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도 같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이곳에도 비가 서 있으며 이 비의 귀부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용머리에 거북의 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변의 정황을 살펴볼 때 미륵리 사지의 귀부가 과연 귀부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등에 새겨지는 문양이 없다는 점. 필요이상으로 크기가 크다는 점,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다는 점 등을 볼 때, 귀부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석조물은 아니었을까?

거북이 등에 새겨진 두 마리 작은 거북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귀부 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 쌓인 미륵리 사지를 오랜 시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귀부가 눈에서 떠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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