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란 땅을 깊게 파서 물이 괴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하지만 우물은 단순히 물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물은 그 나름대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집집마다 우물을 꼭 파고는 했다. 물론 민초들은 그런 우물 하나를 판다고 하면 많은 경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을에 공동우물을 파서 식수원으로 삼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우물이 꼭 생명을 유지하는 식수원으로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옛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우물의 물맛이 좋으면 그 집 장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여러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 우물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우물은 다 같은 것일까?

 

 위는 경주 김호장군 고택의 우물. 아래는 전남 보성 득량면의 마을 공동우물

 

우물에도 여러 형태가 있어

 

우물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우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가 하면, 산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옹달샘 등도 있다. 어느 곳을 가든지 당집 등이 있는 곳에도 제를 사용하는 데만 사용하는 우물도 있다. 예날 능원 등에도 제정 혹은 어정이란 우물을 팠다.

 

다양한 형태의 우물에는 또한 이런저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우물을 돌아보는 것만도 꽤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그저 우물을 마실 수 있는 물이나 떠먹는 곳쯤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우물에 대한 기록물 하나쯤을 남겨놓는다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인 듯하다.

 

 위는 서울 운현궁의 우물. 아래는 충북 증편 사곡리 우물

 

갖가지 사연도 많은 우물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생각 외로 많은 우물을 만난다. 그저 사진 한 두 장을 찍고 돌아섰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우물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책 한권을 쓸 수 있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별별 사연도 많은 우물들이다. 기회가 되면 우물만 한 번 엮어볼 심산이다.

 

여주군 북내면 한 골프장 안에는 ‘어수정’이란 우물이 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로 귀향을 갈 때 마셨던 우물이라고 하여, 임금이 마신 우물이란 뜻을 갖고 있다. 충북 증평군 사곡리 마을에는 사람이 빠져도 빠지지 않고 떠 있다는 우물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식을 잃은 어미가 다 죽게 되었을 때 꿈에 아이가 나타나 어미를 우물로 인도를 하고, 그 물을 먹은 어미가 기운을 회복하였다는 함양 지곡마을의 우물도 있다.

 

 
위는 함양 지곡마을의 종암우물, 아래는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성신사의 재정

 

이런저런 사연을 갖고 있는 우물들 중에 일반인들이 전혀 마실 수 없는 우물이 있다. 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령전에서 만난 제정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를 지내는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제정은 복원을 한 것이다.

 

 여주군 북내면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유배시 마셨다는 어수정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11월 4일 파워소셜러 팸투어에서 만난 제정에 소셜러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선 우물의 형태도 남다르지만, 길게 물길을 내고 그 밑에 네모나게 물이 고이게 만들어 두었다는 점이 색다르기 때문이다. 물은 맑아서 물고기를 넣어둘 정도이다. 팔달산에는 약수가 몇 곳이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의 물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령전 안에 있는 제향에 사용하는 물을 긷는 제정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우물. 그동안 참 다양한 형태의 우물들을 만났지만, 그동안 만났던 우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주 김호장군 고택에서 만난 천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신라 때는 절터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직도 우물은 제자리에 있다고)를 지키고 있는 우물과, 여주에서 만난 어수정, 그리고 화령전 안에 조성한 제정 등이다.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성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화성 행궁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난 날. 바람이 불면서 날이 쌀쌀하다. 이런 상태라면 찾아가보아야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마음 속으로 제발 그곳을 가면 날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국 앞에 도착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어둡던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있다. 그저 이런 날씨마저 고마울 뿐이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운한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샤놓았다. 현재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이 화재나 홍수 등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때, 어진을 피난 시키기 위한 이안청. 복도로 운한각과 연결이 되어있다.


격자창을 내고 그 밑에 벽돌을 쌓아올린 담벼락. 돌의 크기가 위로 올라갈 수록 작아져 멋을 더한다.

 운한각을 돌다가 보면 참으로 잘 꾸며진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의 좌측에는 화재나 홍수 등에 대비해 어진을 대치시키는 이안청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다. 운한각의 창문이나 기둥 등을 보면 당시에 이 전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격자문이나 띠살문 등으로 꾸민 창호도 아름답지만, 벽돌 등으로 쌓은 담벼락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이안청으로 가는 곳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것도, 여름철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물이 좋은 제정

 

화령전의 운한각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담 너머에 있는 전각이 있다. 작은 일각문으로들어서면 전사청이다. 전사청은 운한각에서 정조를 위한 제향을 준비할 때, 각종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은 한편 마루가 돌출이 된 형태로 지어졌다. 전사창에서는 운한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곳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날랐을 것이다. 

 


화령전의 한편에 서 잇는 전사청은 화령전에서 제향을 할 때 사용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 손바닥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추운 날씨였지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을 드릴 때 정화구를 뜨던 우물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재인이 춤과 소리를 하던 풍화당

 

화령전 가운데 풍화당은 재실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당은 화령전 가운데 운한각과 함께 원형이 보존되어 있던 건물로 사료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풍화당에서 바로 고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쳤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전각 중 한곳인 풍화당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풍화당은 양편으로 툇마루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풍화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굴뚝이 있다. 흡사 거북이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풍화당이 정감이 들게 한다.

 

 



풍화당의 양편에는 마루를 높이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둔 방이 있다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다.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

2011년 12월 10일 찾아간 화성 행궁. 날이 쌀쌀하긴 해도,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곳을 돌아보자니 등줄기에 땀이 밴다. 언제나 그렇듯 답사는 늘 발길이 바쁘다. 그저 남들은 사진 하나 찍으려고 있는 대로 폼을 잡고는 하지만, 나 하고는 거리가 멀다.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제정의 옆에는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젯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납일(臘日)’이란 동지로부터 세 번째 미일(未日)을 말한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그 날이 달랐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동지 이후 세 번째 미일(=양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 날은 궁에서는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납향(臘享)'이라고 했다.



납향일은 그 해의 끝에 해당하므로, 일 년을 정리하면서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도 이 납향일에 이곳 화령전에 와서 아버지인 정조에게 제를 지냈으며, 제정의 물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제사는 정조의 어진이 화령전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우물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어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현재 복원이 된 화령전 안의 제정은 밑에 복원된 전사청 앞으로 물이 흐르도록 되어있다. 전사청은 ㄱ 자형으로 지었는데, 동편 끝이 한 칸 돌출이 되도록 하여 마루를 깔았다. 모두 8칸으로 지어진 전사청은 동편에 방과 툇마루를 놓고, 4칸 째에 문을 두었다. 이 문을 통하여 운한각으로 음식 등을 날랐을 것이다.

좌측 4칸은 한 칸의 광과 세 칸의 방으로 되어있다. 전사청 앞에 굴뚝을 보아 이곳은 온돌방을 꾸몄을 것이다. 납향일이면 추운 동지 때를 지나서이기 때문에, 온돌방이 아니라면 전각 안이라고 해도 추위 때문에 제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향대청과 제기고가 복원이 되는 날, 사라져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 맞춰질 것만 같다. 2011년 12월 10일에 찾아간 행궁 곁 화령전은, 그렇게 하나하나 역사를 되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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