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 은행나무와 연대가 맞는 용문사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가 뿌리는 8월에 찾아간 양평 용문사. 그저 바쁠 일이 없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넓지 않은 길을 걷는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한가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로 인해 그 많던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은 뜸하기 때문이다. 8월 우중에 걷는 산길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 바로 사찰기행이 아이겠는가? 거기다가 문화재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함께이니.
대장경을 봉안했던 용문사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빗길에 만난 한 여름의 용문사
용문산용문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만한 길을 사람들이 걷는다. 차 한 대가 뒤에서 빵빵거린다. 길이 좁으니 조심을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갈 길이 바쁘니 얼른 비켜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이 좁은 길을 굳이 차를 몰고 들어와야 하는 것일까? 괜히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비는 오락가락한다. 몇 번이고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전통다원 앞에 도착을 했다. 그 전서부터 높이 42m에 11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는 전화에도 불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냈다고 하니, 나름 신령한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 앞에서 잠시 경의를 표한 후 경내로 접어든다.
기품 있는 사찰 용문산용문사
용문산 용문사는 그리 크지는 않은 절이다. 하지만 천년고찰인 용문사는 기품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여름 날 만나는 용문사는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두고 여기저기 둘러 서있는 전각들 때문일까? 늘 용문사를 들릴 때마다 느끼게 되는 생각이다.
먼저 보물 제5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정지국사 부도 및 비를 돌아보고 다시 경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각들을 찾아다니면서 젖은 몸이긴 하지만 참례를 한다.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과 삼성각을 들린 후, 차라도 한 반 하고 싶어 경내를 벗어난다. 그렇게 다니고 있는 동안 비가 그쳤다. 다원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은 잊었다. 8월의 산속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다고 했던가? 절집이 좋아 절을 찾는다. 그리고 그 절 안에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또 다시 절을 찾는다. 8월에 만난 양평 용문산 용문사. 그 안에서 천년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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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국사’ 도대체 사리가 얼마나 나왔기에
이 탑과 비는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작은 물길을 건너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비는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직 수행에만 힘을 써
정지국사 축원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충숙왕 11년인 1324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2년인 1353년 30세에 자초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 받은 혜근, 나옹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각지로 다니며 수도하다가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조선조 태조 4년에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다비를 거행할 때 수많은 사리가 나와 정지국사라는 별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전한다.
단아한 자태의 정지국사 탑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의 몸돌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작은 비도 소중한 보물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탑과 비가 일괄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 탑과 비.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양평 용문사에서 소로 길로 접어들어 탑을 찾아가던 길에 물웅덩이에도 빠지고, 수렁에도 빠져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이랴. 소중한 문화재를 만났다는 기쁨은 그 몇배나 행복인 것을.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그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