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이다. 그것도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이 좀 선선해 진 다음에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는 문화재 답사는,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연 8일 째 찜통더위라는 8월 4일.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를 찾았다. 꼭 고달사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 해목산 중턱에 있는 상교리 석실묘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인 상교리 고려 석실묘는, 고달사지 느티나무에서 800m 정도를 해목산으로 오르면 된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길을 걷다가 보니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팍팍한 여름의 길은 차가 천천히 지나가도 뿌옇게 먼지가 인다. 그 또한 참기 힘든 일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소리가 들린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이런 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33도가 넘었다는 시간에 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잘 정리가 된 고달사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원종대사 승탑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못미처 해목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500m'라고 적혀있다. 그동안 산으로 오르면서 이 500m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겼다. 몇 곳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다가, 500m 안내판을 보고 길을 나서 더위에 몇 번인가 탈진이 오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벌써 3번 째 오르는 곳이다. 처음 100m 정도만 가파를 뿐, 그 다음부터는 평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8월 복중에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만만치가 않다. 산을 오르면서 만난 나무들도 찜통더위에 지쳤는지, 모두 잎들이 기운없이 늘어져 있다. 며칠만 이 더위가 계속되면 농작물에도 심각한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석실묘


석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세 번째 오른 석실묘이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은 처음이다. 사실은 며칠 전에 누군가 전화를 했다. ‘여주 고달사지 뒤편 석실묘에 잡풀이 자라 엉망이다’라고. 그래서 오른 해목산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을 보니, 이 더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로 조성한 이 고분은 1983년 11월 ~12월에 한양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완료가 되었다. 발굴 당시 상감청자 파편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은 고려 때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발굴 전에 석실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방향기단


석실의 지상 위에 쌓인 돌로 조성한 방향기단과, 그 밑에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석실로 구분이 되어있다. 하부의 원형의 석실에는 연도가 달려 있고, 상부에는 방형의 이층으로 된 기단이 쌓여있어 ‘상방하원 석실묘’라는 명칭을 붙였다. 지하의 석실은 원형으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앞으로는 연도를 조성해 열쇠모양의 형태처럼 조성하였다.


석실의 위편은 큰 돌 두 장을 놓아 석실을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이층으로 제단 모양으로 된 기단이 있다. 1층 기단은 동서가 442em, 남북이 280cm, 높이가 46cm 정도의 장방형이고, 2층 기단은 그보다 조금 적지만 높이는 50cm 정도이다. 현실 벽의 높이는 167~175cm 정도이다.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실묘는,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로 미루어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위에 돌탑처럼 방형기단을 조성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찾아간 상교리 고려 석실묘. 말끔하게 정리한 문화재의 주변이, 잠시 그 찜통더위를 잊게 만든다.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327에 소재한, 충청북도 기념물 제7호인 칠충사. 순창 조씨 가문에서 배출된 충신 가운데 『괴산삼강록(槐山三綱錄)』에 등재되어 있는 조신, 조종, 조복, 조반, 조덕공, 조덕용, 조은 등 7명의 충절인을 뽑아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괴산읍에서 문광면 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앞에는 문광초등학교가 있어 찾기가 수월하다. 삼거리 이정표에는 ‘문광삼거리’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도로변에서도 눈에 띠는 곳이라, 초행길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충절의 상징, 칠충각과 칠충사

 

칠충사는 순창 조씨 문중의 7명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1975년에 순창 조씨의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사당 아래에는 1973년에 건립한 정면 7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 순창조문(淳昌趙門) 칠충각이 자리하고 있다.

 

칠충사로 오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칠충각은 평지에 길게 7칸으로 지었는데, 전각 안에는 각각 7명의 정려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忠節 高麗國子進士麗亡不事二君大明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避世遯于槐山松坪隱逸 趙紳 之閭」, 「忠臣 精忠出氣布義敵愾參原從功臣行通政大夫中樞府僉知出東 萊別中營穩城都護府使 趙 悰 之閭」등의 문구가 보인다.

 

 

순창 조씨 7명의 충절인의 충신정려가 걸려있는 칠충각과 정려(아래)

 

5월이라고는 해도 올해는 날이 일찍 더위가 찾아와서인가. 여기저기 잡풀이 널려있고, 그 한편에는 제초제를 뿌린 듯한 흔적도 보인다. 벌써 안내판을 가릴 정더로 자란 풀들이니, 곧 안내판을 가릴 듯하다. 조금은 바쁘다고 하지만, 큰길가에 서 있는 문화재이니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으련만.

 

난세를 피한다는 정자 ‘피세정(避世亭)’

 

칠충사로 들어가는 홍살문 옆으로 작은 안내판 하나가 산으로 화살표가 나 있다. ‘피세정’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한다. 이곳은 이번 답사가 세 번째이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을까? 궁금하여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올라본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했지만, 한 낮에 오르다가보면 조금은 땀방울이 맺히기도 하는 곳이다.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촬영한 칠충사. 마당에 잡풀이 가득하다. 관리를 좀 잘했으면

누군가 오르는 길의 풀을 잘라놓아 발을 감지는 않는다. 천천히 오르는 숲은, 백년 이상이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숲에서만 맡을 수 있는 숲내가 코를 간질인다. 산에 오를 때는 조금 힘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숲속 냄새가 좋아 산을 오른다.

 

원래 피세정이란 정자 이름은 ‘피세 조신’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피세 조신은 고려 때의 충신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송평으로 낙향하여 오마산 깊은 골에 ‘피세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등진 정자라는 뜻이다.

 

 

좁은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피세정(아래)

 

피세정은 한 때 터만 남기도 하였지만,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단경왕후가 죄도 없이 폐비가 되고 나라에 간신배들이 들끓자, 14세손인 송제 조세구가 다시 피세정 터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피세정이라 불렀다. 나라에서는 성격이 곧은 조세구에게 군자감 봉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정한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소박한 정자,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담아내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정자 하나가 서 있다. 피세정이다. 한 눈에 보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정자와는 다르다. 그저 꾸밈새 하나 없이 수수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이 정자에 얽힌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뒤돌아설만한 그런 정자이다.

 

 

 

피세정 현판과 정자 안에 가득한 게판들(가운데와 아래) 

 

그러나 이 정자의 주인들은 모두 난세가 싫어 피한 사람들이다. 굳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화려한 정자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정자 위에 올라 사방을 돌아본다. 저 밑으로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넓은 들판이 보이는 이곳, 피세정에서 정자의 주인들은 아마도 또 다른 벗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자 안에 걸린 현판들이 그런 좋은 벗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외진 피세정이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얼마나 외진 곳이었을까? 이곳까지 찾아와 글을 남겨줄 수 있는 좋은 벗들을 주변에 둔 주인들이다. 주변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잡초들 틈에서, 다듬지 않아도 고결한 품성을 느낄 수 있는 피세정이다.

 

피세정에서 내려다 본 들판.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신을 신고 마루에 올라갔는가 보다. 더럽혀진 마루에 털석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노송 가지에서 ‘푸드덕’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갑자기 찾아든 나그네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피세정을 뒤로하면서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 정자의 주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그나마 우리는 이런 난세를 피할 장소조차 없음을 탄한다.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 많은 곳을 다니고 직장에 매달린 사람이 밤에 글까지 쓴다고 하더니 일이 터졌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블질을 쉴 수가 없는 것은, 하나의 문화재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데, 과연 그 문화재 사랑은 얼마만한 효과를 얻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블로그 한편에 <인기글 위젯>을 달았다. 그런데 참 마음이 씁쓸하다. 정작 문화재 소개를 전문으로 하는 블로거는 맞는데, 인기글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화재에 대한 글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보지만 문화재에 대한 글이 없다. 이 정도되면 문화재는 역시 찬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긴 요즈음 사람들 문화재에 대해 무슨 관심이 있으랴. 그저 벗고, 가슴이 절반 쯤 보이고, 배꼽 들어내고, 장딴지 보이고, 흔들어 대고, 빨아대는 것에나 관심이 있지.

그 다음 페이지를 한 번 넘겨본다. 그 끝에 하나가 달랑 보인다. 결국 문화재 블로기의 치욕이란 생각이다. 얼마나 감칠 맛 나게 글을 쓰지 못했으면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 것일까?

 


이래 갖고 무슨 문화재 블로거라고 떠들고 다닐 수 있을까? 이제는 생각을 좀 종리를 해야할 듯하다. 죽어라 하고 갈겨대 보았자, 별 관심들이 없는 것을, 몸 망가져 가면서 기를 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3일이나 들락거리며 통증을 참아가면서도 글을 써 보지만, 이제는 좀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것들이 더 마음이 아프다. 정말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욕이라도 신나게 해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중단했단 블질을 다시 시작하면서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서를 했으니 참아야지.     

이것들이 다 무엇이냐고요? 카메라입니다. 편하게 휴대를 하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입니다. 물론 고가의 카메라는 아닙니다. 이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 100만원을 조금 넘는 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카메라와 렌즈들은, 내 분신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벌써 오래된 것은 12년 째 되었으니까요.

지금 다 사용할 수 있느냐고요? 아닙니다. 하나도 사용할 수 없는 폐품들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버리지를 못하고 갖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참 슬퍼지네요. 일 년 열두 달, 제 몸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녀석들이기 때문이죠. 버리려고 생각하면, 제 눈과 몸의 일부를 버리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버리지를 못하고 있죠.


20년 넘은 문화재 답사길, 참 험했다

벌써 문화재답사를 시작한지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올 해 나이 62세이니, 내 인생의 3분의 1을 길에서 보낸 셈이다. 남들은 그 소중한 시간을 길에서 보냈다고 빈정대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그 길에서 보낸 20년 세월이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머니에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안절부절 좌불안석이 된다. 얼른 문화재를 만나러 나가고 싶어서다.

산으로 들로, 때로는 험한 꼴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 겨울에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매다가 얼어 죽을 뻔도 했다. 장마철에 산속을 뒤지다가 보니, 냇물이 불어 겨우 빠져나오기도 일쑤였다. 그런 문화재답사를 왜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물음에 내 대답은 한결 같다. ‘나도 모르지’



지금 생각하면 그 20년이 넘는 세월이, 참 험한 답사 길이었다는 생각이다. 미끄러지고 구르고,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보니 작은 카메라일망정 성할 리가 없다. 사람과 함께 깨어지고 부수어지기가 일쑤다. 아마도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이전, 아날로그 카메라까지 합친다면 이보다 몇 배는 될 것 같다.

오늘 보니 참 고맙다

이 카메라 중에는 내가 구입을 한 것도 있지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 답사를 하는 나를 보고 선물을 해준 것도 있다. 지금은 그래도 좋은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렇게 소형인 카메라가 나에게는 더 없이 반갑다. 산을 오를 때도 무겁지 않아서 좋고, 모두가 동영상까지 촬영을 할 수 있어서이다.

지금이야 동영상을 찍지 못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영상을 더 많이 찍었다. 아무래도 사진으로는 문화재를 세세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부족한 듯해서이다. 동영상을 이용하면 세세한 부분까지도 촬영을 해서 보여줄 수가 있으니,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사용하는 카메라와 함께, 소형 카메라 한 대를 더 지참하고는 했다.



그렇게 답사를 하면서 망가진 카메라들이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정리를 하다가 보니. 가방 안에 가득한 고장 난 카메라들을 보면서 지난날을 생각해 본다. 참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다는 것에 대해, 새삼 이 고장 난 카메라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수고했다’고 고별사를 남기고 보내주어야겠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아픈 기억들이 또 살아날 수도 있으니.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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