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아디일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천불동과 금강굴, 그리고 울산바위를 먼저 떠올린다. 그 중에서도 울산바위는 3년 가까이 속초에서 생활을 하면서 늘 보아왔던 곳이다. 내가 묵던 곳은 소나무 숲이 있는 곳이다. 그 곳으로 난 산책길을 늘 걷고는 했는데, 그 위에 올라가면 울산바위가 바로 바라다 보인다.

 

물론 동해도 보이고 멀리 금강산의 줄기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울산바위만큼 자주 본 곳은 없을 듯하다. 매일 바라다 본 울산바위. 날마다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 설악산에 울산바위라는 바위 이름을 붙인 것일까? 전설이야 그렇겠지 하면서도 머리를 끄덕이는 것은, 그것이 울산바위이기 때문이다.

 

 

그 전설일랑 참 묘하게도 맞아 떨어지네

 

울산바위가 설악산 한 편에 커다랗게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소 산에는 모두 산신령이 있다. 물론 울산에 있는 산에도 있을 테고, 금강산에도 산신이 있아. 하루는 금강산에 산신이 금강산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전국 각처에 있는 산신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전국 각 처의 산신령들은 자신이 있는 산의 돌을 들고 와 금강산에 12천봉을 만들어 달라는 통문이다.

전국 각처에 있는 산신령들은 돌을 한 자루씩 들고 가 금강산에 봉우리를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산까지 하면 일만 이천 개 뿐이겠는가? 산신령들은 각각 자신의 돌로 아름다운 봉우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12천봉이 다 완성이 되었다. 봉우리 조성을 마친 산신령들은 각각 자신의 산으로 돌아가고.

 

 

뒤늦게 도착한 울산 산신령

 

딴 곳의 산신령들이 다 봉우리 조성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는데, 한 여산신령이 치마폭에 돌을 가득 담아 끙끙대며 오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 어디서 오시는 산신령이십니까?”

, 저는 울산에서 오는 중입니다.”

늦었습니다. 이미 12천봉이 다 조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낭패가 있나. 오다가 소피가 마려워 잠시 쉬었더니 그 동안에 다 완성이 되다니.”

 

 

울산에서 온 여산신령을 들고 온 바위를 다시 갖고 갈 수 없다고 그 자리에 놓고 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울산바위라고 한다. 울산의 여산신령이 늦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설악산에서 아름다운 울산바위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금강산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는 울산바위를 보았겠지만.

 

불티 붙는 울산바위는 장관

 

전설이 재미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그렇게 해서 설악산에 남게 된 울산바위. 울산바위는 언제나 보아도 아름답다. 사시사철 언제 보아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겨울의 울산바위는 그대로 설경이 아름답다. 봄에는 봄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아름다운 곳이다.

 

 

가을이 되면 울산바위는 불이 붙는다. 미시령 옛길로 가면서 만날 수 있는 울산바위는 불이 붙는다. 장관이 따로 없다. 내가 설악산을 즐겨 찾는 것도, 울산비위를 좋아하는 것도 그만큼 절경이기 때문이다. 흡사 바위 밑으로 불이 붙는 듯한 장관. 울산바위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절경을 볼 것인가? 그래서 깊은 가을이 더욱 좋다.

7월 15일. 이틀간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멈춘 듯하더니, 이번에는 날씨 몸을 무겁게 할 정도로 덥다. 구례 사성암.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인 사성암은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오산 꼭대기에 있는데 도선굴에는 원효와 의상, 도선과 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대가 있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봉성지』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셔틀버스로 운행하는 사성암 가는 길


현재 사성암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인 몇 채 바위 틈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돌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전각 안에는,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음각마애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초반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마애상이 보호하는 이 적각 앞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구비진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네 분의 고승이 도를 깨우쳤다는 도선굴로 오르다가 보면, 800년이 지났다는 고목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괴목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소원바위. 그 앞에는 명패를 적은 나무들을 가득 걸어놓았다.

 

 


지금은 밑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로 사람들을 사성암 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왕복요금은 3,400원이며, 언제라도 사람들이 차면 출발을 한다. 예전에 이곳을 걸어 올랐을 때 3시간이 넘었던 기억을 하면, 이제는 답사도 참 편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굴을 지나면 절경이 펼쳐져


산왕전에 들려 참례를 하고 도선굴로 들어선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축축한 것이 습기가 가득하다. 예전 고승들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참선을 한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 곳에서 더욱 더 인간의 힘든 것을 이겨내며 스스로 달굼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굴을 나오면 절벽에 붙들어 매듯 만들어 놓은 나무로 짠 길이 나온다. 그 앞으로 펼쳐지는 섬진강의 모습.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그러나 붉은 섬진강만 보일 뿐, 흐린 날이라 그 앞 절경이 감춰져있어 아쉽기만 하다.


돌아내려오는 길에 보니 젊은 사람들이 괴목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저 나무처럼 그리 오랜 세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늘 다녀보지만 좋은 절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찾아가는 것이지만.


사성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한 장 촬영을 하려고 하니 문화재라서 사진을 찍으면 인된다고 한다. 요즈음 답사하기가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사진촬영금지 때문이다. 그래도 허락을 받고나서 대개는 촬영을 하지만, 어떤 곳은 아예 딱 잘라 거부를 하는 곳도 있다. 그럴 때면 참으로 씁쓰레하다. 사진촬영을 막는다고 문화재보호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일생에 몇 번 볼 수가 없다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도 그런 광경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 누구도 답을 내리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다. 7월 22일 일찍 강원도 양양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 가다가 보니 피서철이라 그런지, 서울로 돌아오는 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고 있다.


구룡령은 양양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오대산의 고갯길이다. 해발 1,013m인 이 고갯길은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이 아름답다. 강원도를 다닐 때는 가끔 이 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을 이 구룡령을 넘는 길로 택했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 구름바다


운해(雲海), 구령령의 운해는 이곳을 자주 다녀보았지만 볼 수가 없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는 했지만, 해발 800m를 넘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입을 벌어진다. 조금씩 올라가면서 만난 구령령의 운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고 해도 어찌 이것을 보지 않고 길을 재촉할까?


동행을 한 일행들도 덩달아 난리를 피운다. 이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높이 1,000m에 가까운 산 봉우리들이 섬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며, 물결이 흐르듯 잔잔히 흘러가는 구름.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은 없을 듯하다.   

 

 

동해시 북평동사무소는 동해에서 삼척으로 내려가는 7번국도 우편에 있다. 이 북평동사무소 맞은편으로 길이 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동해와 만나는 막다른 곳을 <갯목>이라고 한다. 갯목이란 갯벌이 시작되는 목(입구)이라는 뜻인지, 혹은 포구가 열리는 목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 갯목을 향해 가다가 보면 좌측에 동해 한가운데 커다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시멘트공장이 있다. 공장과 길 가운데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다를 매립하여 세운 듯하다. 시멘트 공장 중간쯤에 우측으로 만경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150m를 올라가라는 표시를 따라 나무로 흙을 받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 등성이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정자, 그러나 지금은 절경이 사라져

 

만경대(萬景臺). 동해시청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으나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북평동사무소에 들어가 정자 있는 곳을 물으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설명대로 어렵지 않게 찾아온 만경대. 그 위에 오르니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그 동해를 바라보기에는 지금은 쉽지가 않다. 커다란 공룡과 같은 시멘트공장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일 잘 아는 선조님들이 이곳이 이리 변할지는 모르셨나보다.

 

구미산 성산봉에 자리한 만경대는 조선조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삼척에 사는 신당(新堂) 김공훈이 창건한 정자다. 동해에 있는 정자들이 100여년이 안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이 만경대는 40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만경대는 동은 망망대해요, 북으로는 송림에 백사장이 10리에 걸쳐있고, 서편으로는 두타산(頭陀山)의 절경이 펼쳐지며, 절벽 아래로는 전천강이 동해로 흐르니 가히 관동 제일경이라 하는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그동안 만경대는 고종 9년인 1872년과 1924년 갑자에 걸쳐 두 차례 중건을 하였다.

 

만경대 안에는 수많은 글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 1872년 중수 때 한성부윤 이남식이 쓴 <海上名區>라는 현판은 가히 만경대가 얼마나 절경에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절경에 자리 잡은 많은 정자들이 만경대라는 이름을 걸었으나 동해의 만경대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절경이었으리라.

 

 

 

또 한곳의 절경 호해정

 

아쉬운 발걸음으로 만경대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집 몇 채 되지 않는 해안가 마을이 보인다. 갯목이라 부르는 이 동네는 시멘트공장의 끄트머리와 나란히 있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만 아니었으면 이 또한 절경이리라. 호해정(湖海亭),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최덕규 선생 등 39인이 계를 조직해 1947년 4월에 구미산 갯목 할매바위 옆에 18평의 호해정을 세웠다. 그동안 호해정은 1977년 5월과 1990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

 

갯목 끝자락에 자리한 호해정은 60년 동안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할매바위와 나란히 서 있다. 할매바위는 동해를 바라보고 노송 몇 그루와 벗 삼아 있는데 그 풍광이 아름답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과 1979년 동해항의 개항이 없었더라면 그 얼마나 운치를 더했을 것인가? 할매바위인 마고암(麻姑岩)에는 그 전설을 다해 최윤상이 쓴 글이 있다.

 

 

 

아래로는 바다를 진압하며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광활한 천지에 높이 우뚝 앉아 있어

편안한 자취가 마치 마고와 같으니

선녀가 천년 뒤에 홀연히 나타나

돌이 되었구나.

 

갯목으로 가는 길에 만난 만경대와 호해정. 두 곳의 정자는 그렇게 다른 모습을 하면서 나그네를 맞이하지만, 그 안에 걸린 수많은 게판들은 제각각 자신이 최고라고 뽐내고 있었다. 그 자랑을 벗 삼아 나그네의 여정은 계속되고...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무릉계곡은 국민관광지 제77호로 1977년에 지정이 된 곳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무릉계곡은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동해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금란정과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는 무릉반석(아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란정은 조선조 말 향교인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한 유생들이 모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승 무릉계곡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 정각을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계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새롭게 선경에 조성한 금란정

 

깨끗하게 정리가 된 금란정은 근자에 들어 새롭게 조성한 정자다. 아마 1945년에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반석에는 깊게 판 많은 글자들이 사람의 눈길을 끈다. 한문으로 된 문구들을 바라보며 학식이 없음을 탓한다. 어찌하랴,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그냥 바라다 보고만 있어야지.

 

누가 같이 동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반석의 넓이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장관에 취해 잠시 정자는 잊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해가 간다. 이 절경을 보고 시 한수 읊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에 취해 흥얼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묵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이곳에 와 정자를 지어 풀어버리려고 했던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그분들도 그런 심정이지나 않았을까.

 

 

금란정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무릉계곡을 찾아 계곡 입구에서 삼화사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일주문 전에 정자가 있다. 무릉계곡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효가 사거리 - 우회전 - 4.4km - 삼화동3거리 - 좌회전 - 5.3km -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가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현지교통을 이용하려면 동해시외버스터미널-무릉계곡으로 30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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