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구 연무동 주민센터 건너편은 화성의 동북공심돈 맞은편이 된다. 이곳에 작은 동산이 하나 있으니, 이곳을 동공원이라고 부른다. 이 동산 북쪽에는 커다란 바위 한 덩어리가 솟아있다. 이곳과 마주하고 있는 수원 북중학교 뒤편에도 높지 않은 산이 있는데, 그곳에도 연무동의 바위와 마주하고 있는 바위를 볼 수 있다.

 

이 두 곳의 바위를 퉁소바위라고 부른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소재한 바위를 할아비바위라 하고, 북중학교 뒷산의 바위를 할머니바위라고 칭한다. 이 바위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퉁소바위는 할아버지 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데는 슬픈 전설이 전한다.

 

 

슬하에 자손이 없는 것이 화근

 

연무동 바위부근에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은 부부였는데도 불구하고 슬하에 자손이 없어 늘 근심거리였다는 것. 두 부부는 결심을 하고 백일치성을 드리기로 했다. 남편은 현재 할아버지 바위가 있는 동공원 바위에, 아내는 북중학교 뒷산에 있는 바위에 치성을 드리기로 한 것.

 

아내가 북중학교 뒤편에 있는 바위로 치성을 드리러 떠날 때, 남편은 퉁소를 하나 꺼내주었다. 서로 보고 싶으면 참고 이 퉁소를 불어 무사함을 알리자는 것. 그렇게 두 사람은 열심히 치성을 드리면서 퉁소를 불어 서로가 무사함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백일치성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내의 퉁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열심히 퉁소를 불었지만 끝내 아내의 퉁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남편은 백일치성을 드리는 중이라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백일치성을 다 마치고 북중학교 뒤편 바위로 달려갔으니, 아내는 이미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둔 뒤였다. 아내를 잃은 남편도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사람들은 연무동 동공원의 바위를 할아버지 통수바위로, 북중학교 뒤편에 있는 바위를 할머니 퉁소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겨울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이 바위에서 퉁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지금도 득남을 기원하는 사람도 있어

 

7일 오후 천천히 화성 동문을 벗어나 길을 건넜다. 퉁소바위 아래로 가니 퉁소바위공원이라는 돌로 만든 조형물과, 전설을 쓴 벽화로 조성한 조형물이 서 있다. 몇 명의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뛰어놀고, 그 뒤편으로 퉁소바위로 오르는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천천히 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니 산 정상아래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바위 앞으로 다가선다. 할아버지 퉁소바위다. 양편으로 솟은 바위틈으로 길이 나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로 길이 보인다. 그 길로 심호흡을 하면서 걸어본다. 이 작은 숲 속에 참 잘 꾸며진 길이 이렇게 있다니. 그 길을 벗어나면 시야가 환하게 트인다. 그리고 퉁소바위전망대로 오를 수가 있다. 전망대 위로 오르면 저 건너편에 할머니 퉁소바위가 보인다. 이렇게 마주보고 서로 그리며 퉁소를 불었다는 것이다.

 

 

전망대를 벗어나 동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보라색 꽃을 피운 맥문동이 길 한편에 늘어서있다. 오후에만 꽃을 피운다는 맥문동이다. 잘 정비된 길을 걷고 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운동을 하러 나오셨는지 뒷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신다.

 

어르신 이 퉁소바위에서 정말 소리가 들리나요?”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왜 바람이 부는 날 들린다고 하죠?”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바람이 불면서 바위틈에 있는 틈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 바위에 가끔 치성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요 어떤 사람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는지 아세요?”

아이를 못 낳는 사람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갖는다고 하네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갖기 위해 백일치성을 드리다가 세상을 떠난 부부가 아니던가? 그런 정성이 있는 바위이니 아이를 낳기 위해 간절히 빌면 하늘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약수터 방향으로 내려가 물 한잔을 받아 마신다. 시원한 물이 금방 갈증을 풀어준다. 작은 공원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 거기다가 전설까지 곁들였으니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다시 한 번 천천히 돌아본 길을 되짚어 본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산136-11에 소재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인 고성화암사(高城禾岩寺)’는 신라 혜공왕 5년인 769년에, 법상종의 개조인 진표율사가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이 절은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3년인 1625년에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그 뒤 고종 1년인 1864년에는 지금 있는 자리인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1912년에 다시 화암사(禾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에 타 모두 소실이 되었던 것을 훗날 법당만 다시 지었다. 화엄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들은,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준비를 위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다.

 

 

화암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군과 일부 계단석이 남아 있다. 화암사는 금강산 일반 이천봉 팔만 구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봉우리의 두 번째인 신선봉의 바로 아래 세워져 있다고 한다.

 

수바위에 얽힌 전설

 

속초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금강산 화암사라는 이졍표가 보인다. 또 한 곳은 속초에서 미시령 터널로 향하다가 미시령 옛 길로 접어들어도 같은 이정표가 보인다. 어느 방향을 택해도 화암사를 찾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화암사경내를 향해 가다가 좌측에 보면 희게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바위를 수바위라고 부른다.

 

이 절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화암사라 부른 것은 1912년부터이다. 절 이름을 바꾸게 된 것도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 모양의 바위인, 이 수바위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화암사의 스님들은 모두 수바위 위에 편안히 앉을만한 곳을 찾아 좌선을 시작했다. 이 수바위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그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의 공양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주를 해오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을 하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지팡이로 세 번만 두드리면 쌀이 나올 것이다. 그 공양미로 밥을 지어먹고 열심히 수행에만 힘쓰라고 사라졌다. 꿈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백발노인을 본 것을 이야기를 한 스님들은 백발노인의 말대로 했더니 정말 쌀이 나왔다.

 

 

지금도 이 수바위에서 기도를 한 스님이나 신도들이 밤에 꿈을 꾸면 이 백발노인이 나타나 미리 닥칠 일을 알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회암사로 이름을 바꾸게 한 그 수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은 어찌되었을까? 여기도 마찬가지로 욕심이 많은 한 사람에 의해 그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전설은 그렇게 어디서나 똑 같이 마무리를 한다.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

 

봄이 금강산 줄기 아래 고성 땅에 꽃소식을 몰고 올 때 찾아갔던 회암사. 한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삼성각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미 촬영을 다 마치고 여유롭게 삼성각을 합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화암사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서원이 이루어지려나?

 

 

삼성각 안 벽면에는 금강산 천신대, 상팔달, 세선봉, 삼신대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긴 이 화암사에서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고 난 뒤 그의 제자 100명이 화엄경을 배우다가 그 중 31명이 하늘로 올라가고, 남은 69명은 무상대도를 얻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는 고성 끄트머리에 있는 절 건봉사에도 전한다. 건봉사에는 그렇게 많은 스님들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곳에 등공탑이 서 있어, 이곳보다 더 실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삼성각에서 참배를 하고 전각 밖으로 나온다. 수바위에서 불어온 바람 한 점이 108배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이런 행복함에 절을 찾는 것이다 아닌지.

 

충북 충주시 단월동 455에 소재한 단호사. 단호사의 창건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여 약사(藥寺)라 하였고, 1954년에 단호사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단호사 경내 대웅전 앞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이며, 1층 기단 위에 탑신부가 놓여 있다.

 

단호사 삼층석탑은 늙은 노송 아래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 540년 정도가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8.5m에 나무둘레는 210cm 정도이다. 현재 충청북도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가지가 옆으로 뻗어 많은 지줏대를 설치해 놓았으며, 한 겨울에 만난 노송은 가지에 눈이 쌓여 그 멋을 더하고 있다.

 

득남을 하게 한 단호사 소나무

 

단호사의 소나무는 전설이 있다. 이 소나무는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이다. 수령이 540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히 조선 초기에 심어졌을 것이다. 강원도 지방에 문약국을 경영하던 사람이 재산은 많은데 슬하에 물려줄 자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손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충주 단호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손을 바라던 이 사람은 단호사에 와서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고 살다가 적적하여 뜰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아침저녁으로 불공을 드리면서 소나무를 지극정성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고향 집 마당에다 소나무를 심고 안방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꿈을 꾸었다는 것.

 

더욱 기이한 것은 고향에 있는 부인도 꿈을 꾸었는데 단호사 법당이 자기집 안방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부인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같은 꿈을 꾼 것은 서로 모여 살라는 부처님의 뜻으로 생각이 들어 강원도의 재산을 정리해 단호사로 법당 옆에 살림을 차렸다. 그 후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소원성취를 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

 

소나무의 가지가 덮고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에는 양우주가 가운데에는 탱주의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이 탑은 일부가 약가 부서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새겼다. 1층 몸돌은 제법 높직하며, 4층 몸돌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어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 지붕돌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고,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충주 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놓여 있는 것에 비해, 이 탑은 평지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규모는 작으나 격식을 충실히 갖춘 안정감이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답사 힘든 여정의 연속

 

단호사는 큰 절은 아니다. 하지만 대웅전에는 보물 제512호인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 단호사는 처음 고려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하는 소나무 전설에 보아도 이미 이곳에 조선 초기에 절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 날 찾아간 충주 단호사. 비록 화려하거나 많은 전각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방색이 강한 철불 등으로 보아, 철불과 석탑이 모두 옛 자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길은 늘 험난하다. 어느 곳 하나 편안하게 문화재를 만나지 못한다. 더울 때는 몸에서 쉰내가 나게 걸어야 하고, 땀을 비오 듯 흘려야한다. 겨울에는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장마철이 되면 카메라라도 젖을까 걱정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사시사철 고된 여정이다.

 

하지만 그런 고된 여정을 스스로가 택한 것이니 누구 탓을 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몇 사람만 더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도, 우리 소중한 문화재들이 지금보다는 더 보전이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하면 사람들은 먼저 하동 쌍계사를 떠 올리지만,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논산 쌍계사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에 소재하고 있다.

 

논산 쌍계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마치 전설을 만들기 위해 창건된 절인 듯하다. 그만큼 쌍계사의 전설은 한두 가지 아니다. 대개 어느 고찰이나 전설 한 두가야 있기 마련이지만, 쌍계사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저 쌍계사 주변 곳곳이 전설이 전한다. 그만큼 이 절이 창건 이후 유명세를 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부대중이 얼마나 많았기에

 

쌍계사에 전하는 전설 중에는 그저 허황된 소리 같은 것들도 전한다. 하지만 전설이라는 것이 전혀 맹랑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쌍계사는 한 때 많은 사부대중이 기거를 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쌀을 씻은 뜨물이 큰 길까지 흘러내렸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대웅전에 있는 탱화를 파랑새가 붓을 입고 물고 그렸다고도 한다.

 

대웅전 앞에 낸 문짝의 꽃 창살은 가히 일품이다. 꽃 창살을 사용한 절들은 많다. 하지만 아마 도 어느 절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그 꽃 창살의 문양만 바라보고 있어도 기분이 황홀해진다. 쌍계사의 기둥 하나가 칡넝쿨로 만들었는데, 이 기둥을 안고 돌면 병을 앓지 않고 저승으로 간다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고찰 쌍계사. 이 절에서 사용하는 북이 얼마나 소리가 크고 고랑을 쩡쩡 울린 것일까? 북의 가죽을 한 겹을 볏겨 냈다고 한다. 또한 절 동편 고개 밑에는 샘물이 있다고 한다. 이 샘은 약효가 뛰어나 피부병 등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전라북도에서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

 

보물 제408호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 법당이다.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영조 14년인 1738년에 지은 건물로 보인다. 그 뒤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정면의 문은 정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을 새긴 꽃 창살로 마련하였다. 문의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대웅전의 건물 안쪽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다. 문화재 하나를 만날 때마다 어떤 때는 즐거움으로, 어떤 때는 비통함으로 접하게 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사고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에 또 바람따라 길 위에 늘 서있기는 하지만. (꽃 창살과 닫집은 문화재청 자료입니다)

 

양평 사나사를 찾아가다

 

천년의 숨결이 배어있는 사나사(舍那寺)’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48호이다.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절에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특이해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있고, 대적광전, 극락전, 삼성각, 조사전, 함씨각, 요사채등의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절 한편으로 용문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하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나사에 전하는 함왕에 대한 또 다른 설이 있어, 그 설을 정리해 본다.

 

 

함규(왕규)를 함왕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바위굴에서 나왔다는 분도 함규가 아니다. 함왕이라 함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함혁(함왕주악)은 함씨 시조로 알평과 동시대 인물이다. 함씨 세보에 의하면 당나라 때 대사마대장군(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으로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입동국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세력으로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운 후 세대를 이어오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라에 복속된다. 그가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웠을 때 함왕주악은 왕()이었다. 하기에 함왕성, 함왕골, 함왕혈, 함왕계곡등의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라에 복속된 후 문성왕으로부터 문간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함씨들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승승장구한 호족가문이다.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함왕성을 쌓고 강력한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세대를 이어오다가, 그의 21대 후손인 함규가 고려 왕건을 도와 개국 공신이 되었다.

 

왕건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호족세력 함규를 얻음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다. 왕건은 함규의 두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함규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왕건이 함규에게 성을 하사한다. 그는 왕규로 고려사에 기록되어지는데, 함왕은 함규(왕규)의 시조인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알평이 구봉 함혁과 경주 표암봉 밑에서 같이 지냈다는 기록이, 경주 이씨 세보에 전해진다. 알평이 신라를 개국하기 전에 촌장이었듯, 함혁 즉, 함왕주악도 마한의 부족국가 왕이었다. 사나사 함씨각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의 영정을 모신 각이며 함혁을 함씨 시조로 보아야 한다. 함왕은 함규(왕규)와는 다름 선대의 함혁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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