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올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아주 오래 전 송춘희라는 여가수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 제목을 가진 노래이다. 수덕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노래 때문인가? 먼저 비구니인 여승을 떠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아마도 이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주변에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된 선원인 정혜사와 비구니 강원인 견성암이 있다.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이 견성암의 비구니들 대문으로 보인다. 노래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고착시켜 버린 것이다.

 

아마 이 노래가 처음 불려 질 때인 1966년에는 수덕사가 인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이 몰려든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고, 입구에는 장사꾼들이 갖은 상품을 진열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요도 이제 가사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수덕도령의 애끓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7월 28일(일)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보면 좋다고 했던가? 딱히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집에서 세 곳을 돌아오면 좋다고 하니 길을 따라 나섰다. 그 두 번째로 찾아간 예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덕산향토지>에 보면 수덕사의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홍주마을에는 수덕이란 도령이 살고 있었다. 이 수덕이라는 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수덕도령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덕숭이라는 낭자에게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가문이 좋아도 상사병을 앓는 것인지? 수덕도령은 애를 태우다 못해 덕숭낭자에게 여러 번 청혼을 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수덕도령이 하도 끈질기게 청혼을 하자 덕숭낭자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부터 수덕도령은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절을 빨리 짓고 덕숭낭자를 품을 생각을 한 탐욕 때문에 벌을 완성하자 불이 나버렸다. 다시 절을 짓기 시작한 수덕도령은 이번에도 덕숭낭자를 그리워했기에 또 불이 나 버렸다.

 

세 번째는 오직 절을 지을 것만을 생각하고 열심을 내었다. 그 때문인지 절이 완공이 되었다. 함께 살 것을 허락한 덕숭낭자였지만,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오직 덕숭낭자만을 그리며 절을 지은 수덕도령. 그만 참을 수가 없어 덕숭낭자를 안아버렸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덕숭낭자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덕도령의 손에는 버선 한 짝만이 들려있었단다.

 

덕숭낭자를 끌어안았던 자리는 큰 바위로 변하고 그 자리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버선꽃(물단초)’이라고 부른다. 덕숭낭자는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부르고, 산 이름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했으며, 지금도 ‘덕숭산 수덕사’라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전설과 수덕사의 중창 내력을 보면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태여 짜 맞추기 식의 논리를 펼 것은 아니지만, 혼자 생각에 젖어 고뇌를 한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귀퉁이 깨진 삼층석탑, 그런데 왜 이렇게 끌리지?

 

일주문을 지나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 대웅전을 찾아가면 그 앞에 탑이 한 기 서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 삼층석탑의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양 옆에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기단에는 가운에 탱주를 새겼다.

 

높이 410cm의 이 삼층석탑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상륜부는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머리장식받침인 노반이 있고, 그 위로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인 보륜과 보개를 올려놓았다.

 

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은 1층과 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탑은 통일신라 문무왕 5년인 665년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탑의 모양을 보면 오히려 통일신라 석탑 전성기에 비해 몸돌의 가운데 기둥인 탱주가 생략된 점이나, 지붕돌의 받침이 4단인 점을 볼 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탑이다. 수덕사의 삼층석탑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남아 아름다운 석탑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이 수덕사의 깨진 석탑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일까? 아니면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때문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고나서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다. 하긴 저 깨진 채로 서 있는 삼층석탑도 참 바보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 이 탑을 조성할 때 저렇게 귀퉁이가 깨진 채로 사람들을 만날 것을 누가 알았으리요.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줄도 모르겠다. 저 탑이나 나나 다 깨어진 채로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저동리 계향산 산33-5에 소재한 미암사에는. 거대 와불과 함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1호인 부여 저동리 쌀바위가 소재한다. 쌀 바위는 산중턱에 있는 높이 30m의 거대한 자연석 바위를 말하는 것으로, 암반의 표면이 하얗다. 이 쌀바위가 있어 절 이름도 미암사(米巖寺)로 부른 듯하다.

 

미암사를 들린 것이 벌써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겠지만, 그 당시 쌀바위 보다도 절 경내에 누워있는 와불에 더 놀랐다. 얼마나 와불이 컸으면, 그 좌대 아래에 법당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세계최대 와불을 조성한 미암사

 

와불은 흔히 열반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을 하실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화신불 8불 중에 하나인 와불은 부처님이 입멸하는 상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80년간 중생을 교화하고 인연이 다하여, 중인도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에서 하루 낮 하루 밤을 대열반경의 설법을 마치셨다.

 

대열반경을 마치신 후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입멸을 하셨다. 미암사의 와불은 그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길이 27m에 높이 6m, 6m나 되는 거대 와불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바닥에는 전륜과 음자 1만 팔천여자를 새겼다고 하는데, 이 와불을 조성하는 동안 동지섣달인데도 개나리꽃들이 노랗게 피어있었다고 한다.

 

 

쌀바위에 얽힌 전설

 

백제의 역사와 함께 유원한 내력을 지닌 미암사쌀바위는 많은 전설과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일명 음겨석, 촛대바위, 부처바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그 형태를 비유하여 붙여진 듯하다. 미암사 경내에 높다랗게 솟아있는 쌀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한 노파가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하여, 절에 찾아와 식음을 잊고 불공을 드렸다. 오직 손자가 잘 되기만을 바란 노파가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고 있자니,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현몽을 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노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어 바위에 심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바위에서 하루에 세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니, 아침과 점심, 저녁을 지을 때 이 쌀을 가져다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노파서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바위에서 쌀이 나오고, 그 쌀로 밥을 지어 손자에게 먹일 수 있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욕심 많은 노파가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벼 팠더니, 쌀은 나오지 않고 핏물이 흘러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전국에 산재해 나타나는 쌀바위의 전설과 공통적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그 행위를 한 인물이 다를 뿐이다. 금강산 화암사 입구에 있는 높다랗게 솟은 봉우리를 쌀바위라 하는데, 이곳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미암사는 노파가, 화암사는 스님이란 존재가 다를 뿐이다.

 

이러한 쌀바위에 대한 전설은 인간의 욕심에 대해 경계를 하라고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고, 온전한 생활을 하라는 쌀바위의 전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15일 서둘러 길을 나섰다. 2013년의 첫 답사지역을 일부러 강원도 최북단이라는 고성군으로 정했다. 이곳에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곳이기에,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이다. 5일 저녁 무렵 심하게 바람이 분다. 옷깃을 아무리 여미어도 살을 에일 듯 파고드는 바람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119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 금강산 법보정사(주지 진관스님)라는 인법당을 모신 암자였다. 인법당이란 법당과 살림살이를 하는 요사가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붙어있는 작은 법당을 말한다. 이곳에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준 아기장수 이야기

 

법보정사가 있는 뒤편 산을 노인봉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강한 바람과 심한 경사로 나무들이 살지 못하고 벌거숭이 인데다가 돌바위가 영을 덮어 그 모양이 마치 늙은 노인의 머리처럼 보인다해서 노인산(老人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에 옛 절터라는 곳을 돌아보았다.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 탄압으로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 절터에도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찾아 기도하며 소원성취 되기를 빌어 왔다고 하는데, 어느 해 이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노총각이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 백일동안 노인산과 절터를 찾아 기도 끝에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는 것.

 

 

 

마침 법보정사에는 이 마을에 사신다는 신도 한 분이 와 계셨다. 박기선(, 70) 할머니는 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중에 아기장수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법보정사 건너 편 앞에 옛날에 절이 있었데요. 그곳을 마을에서는 절터라고 불러요. 그 절에서 자식이 없는 한 부부가 열심히 치성을 드려 아이를 하나 점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니 양편 어깨 밑에 날개가 있었데요, 나중에 크면 큰 인물이 될 아이죠.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장수가 나면 바로 죽여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걱정을 하다가 아기장수의 아버지가 날개를 인두로 지져버렸다고 하네요. 아이가 뜨거우나 당연히 온 동네가 떠날 듯 울어 젖혔겠죠. 그때 화진포 바닷물 속에서 천마가 한 마리 튀어나오더니, 아기장수를 태우고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 절이 퇴락해 버렸단다. 그리고 한 3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기도생활을 했는데, 이상하게 오래들 있지 못하고 자주 떠났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이 절이 있는 인근의 지기가 상당히 세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

 

 

전설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법보정사 뒤편에 보면 산신각 터라고 시멘으로 조성을 해 놓은 곳이 있어요. 그 뒤로는 쪼개진 바위덩어리가 있고요. 이 마을분들 중 많은 분들이 그곳을 올라가면 괜히 넘어지고는 한답니다. 그래서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질 않아요.”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보고 그 뒤편 노인봉과 일직선으로 자리한 산신각 터를 돌아본다. 이곳에 옛날에 산신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세를 보아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노인봉을 배산으로 하고 지어진 산신각. 그 산신각이 바라다보는 곳은 동해안 화진포 방향에 솟아있는 고성산이라고 부른다.

 

 

날개를 가진 아기장수가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태어났다는 현내면 산학리. 이곳은 금강산으로 왕래를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던 곳이다. 이 산학리 논 자락에 서 있는 커다란 노송 한 그루와 불망비 1석이 있어,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소나무와 불망비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전설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전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곳 노인봉 아래 옛 절터와 산신각터,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돌아보면서, 이곳에는 아기장수 이야기 외에도 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할 것만 같아 쉽게 길을 떠나지 못한다. 숨은 이야기들은 늘 신비롭기 때문이지만.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에는 탑동마을이 있다. 탑이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익산 황등에 일이 있어 들렸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탑동마을을 찾아갔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층석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백제탑을 많이 닮은 이 탑은, 백제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백제 때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탑은 대웅전의 앞에 서 있던 탑이라는 것이다. 이 탑에는 근처에 있는 건장산 약수와 함께 전설이 전하고 있다. 탑을 보러갔다가 전설을 듣게 되는 경우는, 괜히 횡재라도 한 기분이다. 글을 쓸 때마다 현장답사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한 가지 기사거리가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남녀의 시합이 병을 불러

 

이 탑동 삼층석탑을 쌓은 것은 이 마을에 살던 여자장사라는 것이다. 이 탑골에는 여자장사가 살고, 마을 뒤편 장자골 마을에는 남자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가끔 이런저런 시합을 하였는데, 두 사람이 탑을 쌓은 후 그것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어트리는 시합을 하게 되었단다. 여자장사는 지금의 탑동 삼층석탑을 세우고, 남자장사는 자신이 사는 장자골에 석탑을 쌓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시합을 하던 날 온 마을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며, 두 사람의 시합으로 인해 잔치가 벌어졌다. 탑을 다 쌓고 난 후 여자장사는 남자가 쌓은 장자골의 탑을 한 번에 밀어서 넘어트렸단다. 그런데 남자장수는 여자장사가 쌓은 탑골의 탑을 무너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삼층석탑은 당시 탑골에 사는 여자장수가 쌓았다는 탑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합을 하고 난 후 여자장수의 늙은 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지독한 피부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온 몸이 시커멓게 짓무르고 죽을 것 같은 피부병에 걸리자, 여자장사는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피부병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어머니의 피부병은 점점 더 심해지고 죽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100일기도를 한 여자장사

 

탑골 여자장사는 어머니가 죽을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을에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자장사가 무너트린 장자골 탑의 혼이 어머니에게 씌워서 그렇게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 소문을 들은 여자장사는 탑골 자신이 쌓은 석탑 앞에 꿇어앉아,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100일 동안 정성을 드렸다.

 

 

여름철에 뇌성벽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여자장사는 꼼짝 않고 탑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100일 째가 되던 날 천둥번개가 치더니 혼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건장산 골샘약수를 먹이면 피부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여자장사는 그길로 골샘약수로 달려가 물을 떠다가 어머니에게 먹이고, 그 물로 온몸을 씻어드렸다. 그랬더니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골샘약수를 마셔보다.

 

마침 주민 한 사람이 탑이 있는 곳으로 자나간다. 약수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날은 춥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약수를 빠트릴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런 전설을 간직한 약수라면, 한모금은 먹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탑 뒤로 난 길을 따라 약수를 찾아 나섰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산길로 잡아든다. 공기가 맑다. 심호흡을 하면서 대나무 숲을 지나고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아래로 약수터가 보인다. 내려가 보니 그 추운 날인데도 약수는 얼지가 않았다. 옆에 걸린 바가지로 물을 떠 한 모금 마셔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이 물을 마시고나면 웬일인지 속이 깨끗해질 듯하다.

 

 

약수를 마시고 동네로 내려오니 마을에도 우물이 있다. 우물체험도 한다고 적혀있다. 골샘약수는 최근에도 피부병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문화재답사를 하다가보면 가끔 이런 전설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전국 어디를 가나, 우리들을 가르치는 전설 한마디쯤이 있어서 좋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전설이, 그저 전설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 안에 숨은 깊은 속내는 사라진 채.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이 마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인 탑동 삼층석탑이 마을 뒤편에 서 있다. 이 탑 뒤로는 건장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이 나 있고, 옆에는 최근에 지은 절인 듯 대웅전이 보인다. 이 탑동마을에 있는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에 소재한 국보인 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상징인 삼층 석탑에서 연유가 된 명칭이다. 탑동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때 조성된 탑이다. 이 탑에는 전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탑동에 사는 여자장사와 장자골에 사는 남자장사가 서로 내기를 하여, 탑동마을 여자장사가 이기는 바람에 탑동 삼층석탑만 남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이 탑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백제가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난 후, 익산 금마지역에 미륵사지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왕궁이 지어지던 시절 서로 연모하던 총각장군과 처녀장군의 정이 두터웠으며, 장난삼아 탑 쌓기 내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탑골 삼층석탑을 쌓고 총각장군은 익산의 왕궁 탑을 쌓았는데, 처녀장군이 먼저 쌓았다고 한다. 그렇게 내기를 한 후 처녀장군이 보니, 총각장군의 탑을 쌓는 실력이 어설펐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총각장군에게 실망을 하여, 총각장군에게 인연을 끊겠다고 말을 했다. 총각장군과 결별을 한 처녀장군은 수절을 하며,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탑을 ‘여장군탑’이라고 불렀다.

 

 

미륵사지 탑이 무너진 것도 이유가 있었다.

 

전설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살이 붙게 마련이다. 여자장사가 시합에 이긴 연후에 노모가 심한 피부병을 앓아, 전국을 다니면서 약을 구하려다 건장산 약수를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효(孝)’를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장군과 여장군의 이야기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여장군이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된 후 남장군도 미륵사지 5층 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이 두 탑이 서로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또 여장군이 이기자, 남장군탑은 부끄러움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설의 재미가 발견이 된다. 남장군은 미륵사지 오층석탑을 쌓았는데, 그 탑이 부끄러움에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다. 한 가지 이야기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반전을 계속한다.

 

 

탑동마을의 탑은 경사가 있으면 탑신이 열린다.

 

탑동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많은 석재를 이용하여 탑을 쌓았다. 그런데 이 탑동 삼층석탑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일층의 탑신은 여러 조각을 합하여 몸체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이 탑신이 열린다는 것이다. 가로로 길게 조성을 한 몸돌의 틈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8,15 광복절에 이 탑의 몸돌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 또 이탑이 열릴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층석탑을 돌아보다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기단부의 받침돌 한편에 맷돌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기 이 삼층석탑의 기단석에 맷돌을 만든 것일까? 단층 기단에 삼층석탑, 그리고 상륜부 일부가 남아있는 탑동 삼층석탑. 그 기단부 초석에 새겨진 맷돌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곳에서 맷돌을 갈아 음식을 해먹으면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8,15 광복에 이곳에서 떡이라도 한 것일까? 많은 탑을 다니면서 이렇게 기단부에 맷돌처럼 조형을 한 것은 처음으로 본다.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정확한 것을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래저래 탑동 삼층석탑은 사람에게 궁금증만 한 아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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