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산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택하라고 한다면, 난 당연히 2.4km 구간인 ‘수변산책로’를 꼽는다. 광교쉼터에서 다리를 건너 시작하는 수변 산책로는,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도 그리 힘들지가 않다. 우선 거리가 2.4km 정도지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변하는 주변경치를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도심의 답답함이 싫어질 때면 이 길을 걷는다. 그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도 40분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길을 걸을 때 가장 즐기는 방법이, 아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걷는 법을 택한다. 무슨 전쟁에라도 나갔는지 황급히 곁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안 걷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좋은 길

 

 

 

광교저수지를 끼고 걷는 수변산책로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좋은 길이다. 또한 계절마다 그 느끼는 감흥이 달라진다. 여름철에는 신록이 우거져, 오후 4시만 되도 숲길은 햇볕이 사라져버린다. 가을이 되면 저수지에 모인 물에도 단풍이 드는 그런 길이다. 내가 이 수변산책로를 적극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금 걷다가보면 오른편으로 돌무지 하나가 보인다. 옛날 같으면 서낭당이라고 하겠지만, 주변 정리를 하면서 쌓아올린 누석총인 듯하다. 저런 것 하나가 길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저 어느 소리꾼이 소리를 하고 지나는 길과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수시로 바뀌는 길의 모양도 새롭다


산에 있어야 할 바위가 길로 나왔다. 아마도 함께 걷고 싶은가 보다. 바위도 나무도 그리고 온갖 새들도 함께 걷는 길이다. 그래서 수변산책로는 지루하지가 않다. 그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좋은 길이다. 잠시 사파른 길이 나오는가 싶으면, 다시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저만큼 어머니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지나쳐 간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환하다. 길이 아름다워서일까?

 

 

 


잠시 광교저수지를 볼 수 있는 시야가 트인다. 7월 29일 오후의 햇살을 받은 저수지의 물이 아름답다. 한 쪽에는 푸른 녹조가 끼기도 했지만, 날이 워낙 더위니 어쩔 것인가? 그저 그러려니 하고 걷는다. 가다가보면 몇 개의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그리고 쉴만한 의자도 놓여 있다. 바쁠 것이 없으니 앉았다 가라는 뜻일게다.

 

열심히 수변산책로를 걷는 두 모녀인 듯한 사람들이 지나간다. 부부인 듯한 사람들도 곁을 지나친다. 아이의 손을 잡은 아버지도 아이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면 지나간다. 그렇게 수변산책로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좁은 길임에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갈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길 끝에서 만나는 여유

 

주인을 따라 수변산책로를 걸어 온 강아지 한 마리가 쉬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은 눈치다. 9개월이라고 하는 이 녀석 이름은 ‘아가’라고 한다. 이 녀석도 얼마나 더운지 털을 두 밀어버렸다. 그리고 저수지 둑 밑으로는 공원이 있다.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물이 보이는 곳에 두 사람의 남녀가 자리를 펴고 앉아 술판이 벌어졌다. 이 더위에도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수변산책로 길이다. 7월 29일, 30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유로운 모습들. 사람들은 그래서 이 수변산책로를 수원에서도 아름다운 길이라고 하는가 보다.

수원, 안산 화성 등으로 출장 중이다. 수원 광교산 입구 저수지는 상수도 보호지역인데, 그 뒤편 산에 볼일이 있어 올라갔다. 스님짜장의 후원이사를 모집하기 위해 나선 출장길이다. 광교 저수지 옆 산에서 만난 두 녀석. 밤나무 양편에 묶인 녀석들은 보기에도 다정해 보인다. 이 녀석들을 보니 한 녀석은 수컷이고, 한 녀석은 암컷이다. 아마도 금슬이 꽤나 좋은 듯.

그런데 이 녀석들 너무 노골적으로 스킨십을 한다. 아마도 저 녀석들이 나를 약올리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 덩치가 큰 녀석이 수컷인데, 제법 나를 견제라도 하는 듯하다. 머시여... 감히 네가 나를 얕보는 것이여. 그런데 한 분이 나타나자 이녀석, 바로 꼬리 쳐트리고 한쪽 구석으로 실실 피한다. 먼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되게 혼쭐이 난 기억이 있는 듯.


노골적인 스킨십을 하는 녀석들

이 녀석들의 모습을 볼짝시면, 참 해도해도 너무한다. 내가 곁에 있는데도 난 사람취급도 안해준다. 지들끼리 별 해괴한 짓을 다 해대는 녀석들의 꼬락서니를 볼짝시면



 암컷이 요상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수컷 이 녀석 나에게 와서 하는 말이

"아저씨 개 처음 봐? 처음 보냐고요?"
"아니 자주 봤다 왜?"
"그런데 멀 그렇게 찍냐고요?"
"그거야 내맘이지 왜 그래"
"아니 우리 여친이 잘 나기는 했지. 그건 나도 알거든요. 그렇다고 그렇게 찍어대면 나 섭하죠. 내 물그릇을 보고 덤비셔"



정말 물 그릇 한번 허벌나게 크다. 얼마나 물을 드셨는지, 아침에 준 물이 바닥에 붙어있다.

 



 

그런데 참 이녀석들이 해도 너무한다. 둘이서 아주 죽고 못 산다. 그런 와중에 암컷과 수컷이 나눈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이리와 봐 자기야"
"나 불렀어? 왜 왜?"
"저그, 저 인간 있잖아 우릴 보고 있는 인간"
"어 저 인간이 왜?"
"저것이 자기의 미모에 반했나보네. 저걸 한 번 열 나게 해볼까?"
"그러지 머 내가 이런 자세 취하면 저 인간 죽을텐데"



"놀고들 있네 이 녀석들. 얌마 내가 너희들하고 같은 줄 알아. 난 임마 블로그에 올리려고 하는 것 뿐야. 그렇게 요상하게 놀지말란 말야. 그래봤자 너희들만 망신이지."  
"저 인간이 아직 우리 정체를 모르나벼. 너희들 운운하는 것을 보니. 아직 우리가 개란 것을 모르는 모양이야"

일마들 정말 사람  무시해도 유분수지. 나 오늘 수원 광교에서 완전히 무시당한 남자여. 저 녀석들 한테. 그래서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지. 해괴한 모습을 공개를 해 버려서. 녀석들아 쪽 팔리지?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우선은 그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시대적으로 또는 그것을 제작한 장인에 의해서도 다르다. 그런가하면 어느 지역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백리부동풍(百里不同風)’이라 표현한다. 거리가 그만큼 만 떨어져 있어도 바람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곧 그만큼의 거리가 있으면,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결국 지역에 따라 특징적인 문화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는 어느 시대 절이었을까?

설명에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예전의 절은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지금의 용담사는 예전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절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용담사가 언제 적 절이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가장 아쉬운 것은 기록문화가 약했다는 것이다. 기록이 있었다고 해도 수많은 기록들이 찬탈을 당해 사라져 버렸다. 용담사의 경우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보니, 전해지는 전설이나 주변의 유물 등으로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전하는 일화로 보아 통일신라 때 지어진 것으로 본다.


돌에 새겨진 머리와 몸을 보면 당당함이 엿보인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예부터 ‘용담’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저수지에는 ‘용 못된 이무기’ 한 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이 이무기는 밤이 되면 여우로 변해 사람들을 자주 해치고는 했단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도선국사가 이곳에 용담사라는 절을 짓고 나서, 그 이무기의 행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광배와 석불입상이 한 돌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일반적인 석불의 경우 석불과 뒤편을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따로 제작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한꺼번에 조각을 하였다. 높이가 6m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입상은 고려 시대에 흔히 보이는 거불(巨佛)형태의 석불이다.


빛을 상징하는 광배에도 조각의 흔적이 보인다. 받침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아래)
 
이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 역시 자연석을 그대로 놓아 만든 것이다. 타원형으로 생긴 돌을 그대로 받침돌로 이용한 점도 색다르다. 이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 알아보기가 힘든 정도로 닮거나 깨어져 나갔다. 그러나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거불임에도 불구하고 꽤 잘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당한 체격에 무게가 있는 모습

이 석불입상은 고려 때에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미륵입상의 형태와 동일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깨까지 늘어진 귀로 보아 삼도가 굵게 표현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거불의 조성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석불입상의 특징이다. 넓은 어깨와 당당한 체구, 그리고 넓은 가슴과 두터운 표현 등,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다.

많은 문화재를 만나러 다니면서 늘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제발 이번에 만나게 되는 문화재는 온전한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가, 그리고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마음가짐이 그렇지를 못했는데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저 오랜 시간 수많은 문화재를 조성해 우리에게 전해 준 조상님들께, 정말로 무릎 꿇어 사죄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문화사대주의자들이 판치고 있는 나라이기에.

고창읍에 있는 노동저수지를 끼고 돌아 호도마을 쪽으로 100m쯤 가면, 수백 년 된 노송과 거목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숲에 정자가 보인다. 고창읍 화산리에 속하는 곳에 자리한 취석정의 ‘취석(醉石)’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이 취하면 집 앞 돌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취석정, 말로만 들어도 운치가 있을 것만 같아, 해질녘인데도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멋을 풍기고 서 있는 취석정. 노계 김경희(1515∼1575)가 명종 1년인 1546년에 처음으로 세운 정자라고 하니, 벌써 460년을 넘긴 고정(古亭)이다. 김경희는 을사사회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음 이만영, 규암 송인수, 둔옹 심광언 등 제현과 더불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문의를 강론하였으며, 그때의 시집 노계집 1권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지석묘군과 함께 어우러진 취석정

흙담을 두른 취석정, 고창군내의 문화재에는 문을 담가놓지 않아 어디든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장 안에는 7기의 작은 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다. 밖에도 3기의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어, 총 10기의 지석묘가 이 곳 정자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고풍스런 정자와 함께 선사유적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정자를 찾은 나그네의 홍복이 아니던가.

1871년에 중건된 취석정 한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목조 와가인 취석정은 부재가 건실한 것이 그 오랜 세월을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건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담장 안에 있는 지석묘 한 기에는 ‘취석정’이란 글씨를 음각해 놓았다. 담장 안팎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버드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댓돌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했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다. 이 정자의 특징은 정자 한 가운데 온돌방을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 모두를 분합문을 내었으며, 전 후면에는 머름대를 시설해 두 짝의 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구성은 밖의 경치를 시원하게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겸손함

취석정은 자연을 이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득한 논이다. 그 주변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는데, 밑에 웅크리고 있다. 행여 누군가의 눈에라도 뜨일까봐 걱정을 하는, 새색시 같은 마음이다. 적어도 처음 취석정을 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문을 열어 천정에 붙들어 맨 창호들이 한껏 마음을 연 듯한 모습이다. 방은 온돌로 처리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흙을 쌓아 방을 돋은 것 같아 보인다. 앞 내 건너편에 있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에서 취석정의 세월을 읽어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 정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정자와 지석묘가 어우러진 곳. 커다란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가, 절대로 물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취석정에 해가 넘어가고 있다. 좀 더 일찍 이곳을 찾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돌리는 발길 머리에 긴 그림자 하나가 끌려온다.

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수도 있다. 만일 그 문화재가 있는 곳이 산속 같다면, 이렇게 헤매다가는 날이 저물기 일쑤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늘 비상용 손전등을 지참을 해야만 한다. 이번 원주 지역 답사는 비가 온 뒷날이라 힘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애삼존불을 찾아 인근을 이 잡듯 뒤져야만 했다.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는 고려 전기에 조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다. 큰 길에서 마애불을 찾아 걷는, 비가 온 뒤의 시골길은 기분이 좋다. 물기가 축축하게 젖은 풀들이 가끔 발길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마애삼존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우측)

갑자기 사라진 이정표

큰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몇 km 쯤이야 답사를 나가면 늘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이라는. 가슴이 뛴다. 답사를 하면서 늘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때는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길을 꺾어들어 작은 도로를 따라간다. 저수지가 보인다. 그런데 양 갈림길인 이곳에는 정작 이정표가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향하는데 길이 막혀있다. 원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핀다. 여기저기 한참 찾다가보니, 저 건너편 길 끝에 이정표가 보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걷고 또 걸아야 하는 답사길. 과수원 길을 지나(위) 발이 빠지는 논둑길을 걸어 찾아갔다(아래)

젖은 길에 빠지며 찾아간 마애불


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과수원이 나온다. 올해는 잦은 비로 과수농가가 피해를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열매가 실하게 달려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10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마땅한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논둑 길을 올라서니 젖은 논둑은 발이 푹푹 빠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빠지는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애불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근처에는 큰 돌이 없는데, 이곳만 큰 바위가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애불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한참을 주변을 돌다가 보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선으로 죽죽 그은 것 같은 선각한 마애불이 보인다. 그저 얼핏 보아서는 누군가 바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군과(위) 흐려서 찾기조차 힘든 마애불(가운데) 확대된 사진(아래)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각하고, 양편으로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입상으로 처리된 불상의 좌측보살상은 알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있었다는 자취를 찾기도 힘이 들 지경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을 한 부처는 얼굴은 마모가 되었다. 아래쪽에 대좌를 그리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손은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 한 것으로 보아,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형태이다.

불상의 우측에 서 있는 보살상도 얼굴의 형체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이 마애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삼존불이 선각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심하게 마모가 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의를 나타낸 선이 유려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뛰어난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불상은 연화대 위에 앉아있고(위) 양편에는 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아래)

걷고 또 걷고 한참을 헤매고 난 뒤에도,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아 찾아간 마애삼존불. 비록 그 정확한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런 가슴 벅찬 느낌이 좋아 답사를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위군에는 풍화작용으로 인한 바위와(위) 마애불을 새겨 넣을만한 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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