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군 산서면 면소재지에서 721번 지방도를 이용해 남원시 보절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이룡삼거리를 지나 하월리가 나타난다. 하월리에는 우측으로 사계봉을 두고, 좌측 조금 안쪽으로 폐교가 된 구 계월초등학교가 보인다. 이 계월초등학교는 195541일 개교를 하여, 1995228일 폐교가 되었다. 그동안 계월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수는 1,608명이라고 한다.

 

이 계월초등학교 터에는 지금당(知今堂)’이라고 부르는 서당 터에 다섯 칸의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옆에는 수령 460년의 보호수로 지정 된 은행나무가 서 있어, 이곳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아마도 지금당이 문을 열 때 심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시기적으로 연륜이 같기 때문이다. 지금당은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과거급제의 산실인 지금당

 

지금당은 조선 선조 35년인 1602년에 정유헌 선생을 비롯하여, 활계 이대유, 만헌 정염 등이 서당을 설립하여 유생들을 지도한 곳이다. 이 서당에는 인근의 학동들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많은 학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였단다. 이 서당에서 학습을 연마한 학동들은 대과에 15, 소과에는 40여명이나 과거에 급제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지금당은 1955년 계월초등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지금당이 처음에는 교실로 사용이 되었다. 그 뒤 도서관과 문화관으로 활용을 하였으며, 계월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후에, 장수군의 향토자료로 지정이 되었다. 지금도 과거급제를 한 유생들의 후예들인 창원 정씨, 삭녕 최씨, 제주 양씨, 김해 김씨, 경주 이씨들이 지금당계를 이어오면서 많은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협소한 건물에서 많은 인재가

 

토요일. 주말이라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 장수군으로 출발을 하였다. 지난 번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을 답사하고 난 후, 몇 군데 보아둔 곳이 있어서이다. 수많은 지자체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고 다녔지만, 장수군처럼 문화재 안내판을 잘 설치를 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와 같이 문화재 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고마울 정도로 안내판이 잘 되어있다.

 

산서면에 있는 창원정씨 종가를 둘러본 후, 종가를 안내해주신 마을 어르신이 지금당을 둘러보라고 권하신다. 인근에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지금당은 계월초등학교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은 요즈음 유행하는 기와와 같은 플라스틱 구조물로 올려놓아, 조금은 옛 모습을 잃기는 했지만 그 속내야 어디로 갈까?

 

 

정면 다섯 칸에 측면 한 칸 반 정도로 지어진 지금당이다. 주변은 쇠줄로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반 칸을 툇마루로 놓고, 그 뒤편에는 선생의 휴식공간인 듯하다. 유리가 몇 장 깨어져 조금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다.

 

마루를 놓은 소탈한 교실

 

네 칸으로 된 교실은 마루를 놓았다. 좌우로 창을 내어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아마도 이 창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꿈을 키웠을 것이다. 벽에는 세 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벽에 걸린 편액 중 남전유약(藍田遺約)’이라는 말은 아마도 후세에게 학업성취의 뜻을 지켜 전하라는 것인 듯하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한 많은 사람들. 그 중에는 얼마나 많은 큰 인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장수군의 곳곳을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이, 그런 숱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당.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낸 명당이다. 이러한 깊은 뜻이 있는 곳에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체 옛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억하려 애를 쓴다.

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불로 추정되는 석불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정자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참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찌 우리 선대들은 그렇게 자연을 잘 아셨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연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다.  

 

전북 무주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정자. 장수 IC 진입로 1km 전방쯤에 정자가 서 있다. 얼핏 그냥 지나치다가 발견을 했기에, 다시 차를 돌려야만 했다. 도로변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앉은 정자. 계단을 오르니 밑에서는 느끼지 못한 바람이 불어댄다. 정자 이름이 풍욕정이다. 바람으로 목욕을 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호남의 마지막 선비라고 칭하는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다.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장계면과 계남면을 잇는 곳이다. 이 정자는 장계와 계남면의 유지 15명이 친목을 도모하고, 시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1962년 건립했다고 한다. 지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정자 안에는 10여 개가 훨씬 넘는 게판이 걸려있다. 풍욕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강암 송성용 선생이 썼다고 한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선생은 20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겉과 속이 모두 선비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대쪽이라는 표현이, 강암 선생을 평하는 가장 좋은 말이라고 한다. 그러한 분이 풍욕정의 현판을 썼다고 하니, 선생도 이 풍욕정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것이었나 보다.

 

  
정자 안에 걸린 게판. 15개 정도의 게판이 걸려있었다.

정자 안을 가득 메운 게판들. 아마 게원들이 쓴 글인듯 했다

 

계남면에는 예전부터 반상을 가리는 유교사상을 가진 어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가 이 정자를 짓게 했을 것이다. 친목도모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한 정자로 지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러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정자에 오르면 밑으로 흐르는 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장안산과 싸리재에서 발원한 유천이 계남들의 복판을 가로 지른다. 멀리 뻗은 도로가 시원한 바람을 일구어 오는 길목으로 자리를 잡았나보다.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일컫는 계남면의 도로변에 우뚝 솟은 둔덕에 올라앉은 풍욕정이, 그러한 명당의 정점인지도 모르겠다. 정자 앞에는 15명의 계원명단이 적힌 비가 서 있다. 그리고 정자 안을 가득 채운 게판들이 걸려있어, 풍욕정이 오래 된 정자인양 보인다.

 

정자가 제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바람이 이는 정자에 올라, 그 정자를 사랑해야만 한다. 수도 없이 퇴락해져 가는 정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런 시기에 만난 풍욕정은 정자에 대한 희망이었다. 예전에는 양반들의 상징으로 정자가 보였다. 하지만 단지 양반들만이 정자를 지었을까? 논두렁에 떡하니 앉아있는 모정은 바로 민초들의 정자였다. 산간벽지에 작은 통나무로 지은 정자는 산사람들의 정자였다. 여러 형태로 만들어지고 퇴락했지만, 우리 민족의 정자는 계층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표현이 되어왔다. 다만 양반가의 정자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보존이 잘 되었다는 것뿐이다.  

 


  
해가 설핏 서산에 걸렸을 때 찾은 정자.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바람이 부는 날, 바람결에 찾아 오른 풍욕정. 그저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곁에 지키고 있었지만, 찬바람이 있어 좋은 정자였다.

‘어서각(御書閣)’이라고 하면 듣기에는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에 수많은 어서각이 건립되어 있다. 어서각은 바로 왕이나 왕비 등이 친히 내린 글을 보관하는 곳이다. 왕이 친히 내린 어필은 자손과 신하에게 내린 명령이나 가르침인, 교시(敎示), 훈유(訓諭), 편지, 현판, 시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어필을 민간에서는 어서각을 세워 봉안하는 것이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에 위치한 어서각은, 추담 장현경에게 영조가 하사한 친필을 보관하기 위하여 정조 23년인 1799년에 건립된 전각이다. 무주에서 장수를 거쳐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어서각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장수의 어서각은 전각을 둘러친 내담이 있고, 그 밖에는 철문으로 막은 외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잠긴 철문, 알고 보니 열려 있어

 

철문은 잠긴 듯해 밖에서만 촬영을 하다가보니, 안으로 잠근 쇠가 그냥 열게 되어 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까치발을 들고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이 있고, 삼문을 단 벽은 꽃담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어서각을 지었다. 전각의 중앙에는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한편에는 어서각을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중수기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에는 영조가 직접 써서 장현경에게 내린 글씨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나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정조가 친히 어서를 내려

 

장현경(1730∼1805)은 흥덕사람으로 자는 백회, 혹은 사응이며, 호는 추담이다. 영조 28년인 1752년에 정시에 급제한 후, 홍문관박사를 시작으로 춘추관, 기주관, 편수관 등을 역임하였다. 어서각에 보관된 어서는 22㎝× 35㎝의 크기인 홍저지에 쓴 영조의 친필이다.

 

영조 39년인 1763년 겨울 장현경이 사관으로 입직하였을 때, 영조께서 정청에 나오시어 잣죽과 꿩구이를 내리자, 성은에 감복하여 율시를 지어 올리니 대왕께서도 크게 기뻐하시어 어서를 하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장현경은 이 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서각을 짓고 이곳에 보관하였다.

 

 

 

잘 보관된 문화재에도 옥에 티가 있어

 

장수의 어서각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다고 전한다. 넓지 않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서각. 아마 장현경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어서각 여기저기에 CC카메라가 달려 있다. 영조의 친필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누군가 어서각을 출입하였는지 마루에 무엇이 놓여있다. 들여다보니 이곳에서 고추를 말렸는가 보다. 하기에 집안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을 테니, 고추인들 말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감히 임금님의 글씨를 보관한 집인데 말이다. 하기야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임금의 친필이 무슨 대수가 될까?

 

 

이제는 문화재라는 의미도 사람들에게는 점점 퇴색되는 듯하다. 하기야 누군가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나에게 물은 말이 있다. 참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 말이지만.

 

“문화재가 밥 먹여줍디까?”

정자란 나에게는 참 묘한 곳이다. 남들은 그저 정자를 보면 ‘참 아름답다’거나 ‘주변 경관이 훌륭하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왜 난 정자들을 볼 때마다 하나하나 곰꼼이 따져보아야만 하는지. 그저 나도 남들처럼 정자려니 하고 지나치면 가슴 아픈 일도 없을 것을. 일일이 따져보다가 괜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산리, 죽산 입구 북쪽 냇가 산기슭에 정자가 서 있다. 작은 내를 건너 찾아간 곳은 내를 끼고 들어가는 곳이다. 정자 앞에는 상추를 심은 밭이 있는, 무주를 거쳐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난 만취정이다.

 

 아름다운 돌담과 좁디좁은 일각문, 그리고 뒤로 보이는 정자의 활주가 발길을 붙잡는다


길도 막혀버린 정자 만취정

 

만취정을 오르려는데 마땅한 길을 찾지 못해, 비탈진 곳을 찾아 기어오르듯 정자로 향했다. 담장을 두른 정자 정면에 작은 문을 두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정자가 그대로 방치되어 퇴락해져 가고 있다. 목조 누각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만취정은 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이 정자는 1929년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자에 걸린 게판에는 남평 문석린의 만취정 상량문을 비롯해, 숭록대부 예조판서 원임, 규장각 제한 안동 김종한 등이 쓴 만취정기가 보인다.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만취정 팔경이다. 성산귀운(聖山歸雲), 기령숙무(箕岺宿霧), 죽림청풍(竹林淸風), 국포추월(菊圃秋月), 반계어가(磻溪漁歌), 사평목적(社坪牧笛), 취봉낙조(鷲峰落照), 용림모우(龍林暮雨) 등을 들었다. 이 만취정 팔경만 보아도 이 정자가 얼마나 운치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퇴락해져 가고 있는 것일까?

 

퇴락해가는 정자, 주인은 어델가고

 

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꽤나 단아하다. 이 정자의 주인은 멋을 아는 사람이다. 한 눈에 보아도 정자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죽림청풍이라 했던가? 정자의 뒤로는 대나무가 서 있다. 바람이 부니 와사삭하는 대잎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소리를 만취정 팔경 중에 넣어 멋을 일궈냈다.

 

 

 

정자 옆 암벽에도 만취정이라 음각을 한 글이 보인다. 그것이 만취정의 멋을 더한다. 창호 하나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런 정자가 주인을 잃어 사그라진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 만취정 앞으로 내가 흐른다. 맑디맑은 물이 흐른다. 그리도 만취정 좌측 조금 떨어진 곳에 빨래터가 있다. 바로 이런 멋을 알기 때문에 만취정의 주인은 이곳에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앞을 흐르는 냇물과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 그 빨래터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정자에서 대바람 소리를 들으며, 술 한 잔과 시 한 수가 있었다면 이보다 더한 풍취가 어디 있을까? 만취정은 그런 자리에 몸을 낮추고 앉아있다.

 

왜 퇴락한 정자만 보면 눈물이 나는지

 

이 아름다운 만취정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이 아프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왜일까? 이런 아름다운 정자가, 어쩌다가 이리 손을 보지 못해 망가지고 있을까? 정자 뒤로 돌아가니 아궁이가 보인다. 뒤를 제외한 삼면에 마루를 내고, 그 가운데 방을 드렸다. 이곳에서 사시사철 주변을 돌아보며 세월을 낚았을 것이다.

 

 

 

그것도 부족하면 앞을 흐르는 내에서 작은 물고기라도 잡는 천렵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저 정자에 올라만 있어도 흐뭇하다. 모든 것을 상상만 해도 즐거운 정자. 그것이 바로 만취정이다.

 

만취정을 돌아보고 떠나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행여 저 만취정은 어느 날 다 사그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다. 몇 번이고 눈 안에 담아두고 떠나는 길에, 갈 까마귀 한 마리 저리도 서럽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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