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늘 혼자 있는 것이 무료하다고 하였더니, 누군가 새를 키우면 정서에도 좋고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하면서 새집을 하나 선물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새집을 받고나니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디. 그냥 새집이 아니고 작품으로 만든 새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 새집 이름이 ‘자경당의 새소리’ 라고 한다.

 

혜경궁은 정조대왕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말한다. 젊은 나이에 비명에 횡사한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들인 이산을 보면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아마 정조대왕이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 화성 행궁에서 베푼 것도, 어찌 보면 한양 성 내에 있는 궁궐에서 한다는 것이 부친으로 인한 아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혜경궁홍씨를 기리는 자경당의 새소리

 

‘자경당’이란 이름은 정조대왕이 즉위하면서 그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커다랗게 집을 짓고 ‘자경당’이라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자경이란 자친, 곧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게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종 4년에 자경전이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비로소 경복궁에 자경전이 자리를 잡았다. 고종 때 자경전이 완공될 무렵에는, 이곳에서 고종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고종 10년 12월에 큰 불이 나서, 그 일대 건물들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화재 직후 곧 다시 지었으나, 1년 반쯤 뒤인 고종 13년 11월에 또 불이 나서 타버렸다. 이렇게 자경전이 잦은 화재로 소실이 되자,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간 뒤에 자경전을 다시 지었다.

 

자경전은 44칸 규모로 서북쪽에는 필요할 때만 불을 때서 난방을 할 수 있는 침방인 복안당이 있다. 그리고 낮 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쪽의 다락집인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에는 행각 수십 칸과 일각문들이 있다. 자경전 후원에는 십장생 무늬를 새긴 굴뚝이 있는 담과, 서쪽의 꽃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담이다.

 

 

보물 제810호 십장생 굴뚝을 담아 내

 

자경전에 있는 보물 제81호인 십장생 굴뚝은 담의 한 면을 한 단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전돌로 조성하였다. 굴뚝 벽면 중앙에는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했다.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물,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 포도, 대나무, 국화, 새, 연꽃 등이다.

 

둘레에는 학, 나티 불가사리, 박쥐 당초무늬 등의 무늬를 조성하였다. 해, 바위, 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나티 불가사리 등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이다. 굴뚝 윗부분 역시 모양을 낸 벽돌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에는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인 연가를 10개 올려놓아 연기가 잘 빠지도록 하였다.

 

 

수를 놓아 만든 새집인 ‘자경당의 새소리’

 

사실 이 새집은 새를 키우도록 만든 것이 아니고,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영동시장 2층에 자리한 아트포라 입주작가인 김춘홍 작가가 직접 천에 10장생 수를 놓고, 그것을 새집에 배접을 한 후 칠을 했다. 새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해, 이곳에 새를 키우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이런 새집을 선물로 받아놓고도 고민이다. 이 새집에 새를 사다가 키워야 하나? 무료하다고 해서 새를 키운다면 그 또한 번잡할 것만 같다. 요즈음은 혼자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답사를 떠나고, 그런 것들이 더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행궁동 일대를 돌면서 땀을 흘리고, 저녁이 되면 사진정리에 기사를 쓰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그런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작가의 마음이 담긴 새집 ‘자경전의 새소리’. 이젠 저 아름다운 새집에다가 마음의 새를 한 마리 키워보아야겠다.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치장을 한 화예는 꽃꽂이를 말한다. 18일부터 21일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19에 소재한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그 라비에 마련된 가온나래 북 카페에 6월 18일 오후 5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라수홍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비롯해 이 날 15인 화해초대전 개막식에 참가를 한 사람은 50여명 정도.

 

꽃꽂이를 작품으로 한 화예전에 모여든 이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듯, 분위기가 어디 조용한 잔치 집에 온 사람들 같다. 5시가 조금 넘어 사회자의 안내로 한 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여성가족회관 정진숙 관장의 화예 15인 초대전을 열 수 있게 되어 감사를 한다는 개막 인사에 이어 라수홍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의 축하 인사로 이어졌다.

 

 

좋은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시길

 

“오늘 이렇게 좋은 화예작품을 전시하면서 초대를 해 주신 것에 대해 먼저 가족여성회관 관장님과 작가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수원시 화예작가 15인 초대전으로 아름답게 장식을 한 이런 좋은 공간이 마치 북 카페가 어디 정원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21일까지 열리는 이 초대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 여기며, 작가분들도 좋은 작품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라고 했다.

 

초대작가 15인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보면, 정말로 어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연상케 한다. 이 초대전에 작품을 낸 작가 이혜준은

 

“제 작품은 모두 폐자재를 활용한 것입니다. 올 9월에 열리는 생태교통 수원2013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앞에 이 원 모양의 것은 지구를 상징하는 것이고, 이 안에 물이 담긴 페트병은 모두 사용을 하고 난 것들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묶어 꽃이 자라나게 한 것이죠.”라고 한다.

 

 

마치 아름다운 정원에 온 느낌이

 

화예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꽃꽂이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꽃꽂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더 예술적인 작품을 말한다. 나무와 꽃 도구 등을 이용해 작가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도출 시킬 수 있는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날 15인 초대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가온나래 북 카페 안에 진열되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초대전에 구경을 왔다는 신아무개(여, 43세)씨는

“참 아름답게 표형을 했네요. 화예라고 해서 단지 꽃꽂이란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일반적인 꽃꽂이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화예’라는 명칭도 꽃을 갖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란 뜻으로 볼 수 있는데, 아름답게 꾸민 이 작품들을 보니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듯합니다. 오늘 이런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어 행복하기도 하고요” 라고 한다.

 

 

관람을 하고 있는 오아무개(여, 39세)씨는 작업과정이 상당히 복잡할 것 같다고 하면서

“화예라고 해서 그저 꽃을 아름답게 꾸며놓은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이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할 것 같습니다. 우선 나무와 꽃 도구 등을 이용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면서, 이렇게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더구나 이렇게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 다 살아있어야 하니 그 또한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할 듯하네요.”라고 하기도.

 

21일까지 계속될 15인 화예작가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가온나래 북 카페. 이곳을 찾아가 화예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를 권한다.

아름답다, 아름다움만이 아니고,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415()부터 19()까지 수원시청 로비에서 만나볼 수 있는 맥간공예 금빛에 반하다전은 맥간공예가인 이수진(, 41)씨가 2인 전으로 연 전시회이다. 맥간공예란 자연 고유의 소재인 맥간(麥稈·보리줄기)을 이용해, 모자이크 기법과 목칠공예기법을 도입해 만드는 독특한 예술장르이다.

 

사람들은 언뜻 이 맥간공예 기법을 이용한 금박공예를 나전칠기로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전칠기가 조개껍데기인 자개를 잘라 붙여 만든다면, 맥간공예는 보릿대를 평평하게 펴서 이를 모자이크 방식으로 붙인 뒤 목칠공예로 마무리기 때문에 그 공정과정은 더 어렵다고 한다.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맥간공예

 

공예가 이수진씨는 삼성전자를 다니면서 동아리 활동으로 처음 맥간공예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수진씨에 따르면 맥간공예는 수원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맥간공예는 수원에서 처음으로 시작이 되었어요. 맥간공예의 창시자인 이상수 선생님께서 수원에서 시작을 하셨죠. 하기에 맥간공예를 배우시는 분들은, 전국 어디서나 수원으로 와서 습득을 해야 했고요.”

 

이상수 선생에게서 맥간공예의 기법을 배운 이수진 공예가는 벌써 21년 째 맥간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단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했으나, 배우기 시작한지 2년이 지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어렵고 힘든 전문 공예가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할 때 맥간공예의 창시자인 이상수 선생님께서 지도를 해주셨죠. 작품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 재미에 빠져들었어요. 결국 전문 공예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죠

 

맥간공예 금빛을 만나다전은 맥간공예의 기법을 이용, 금박시트지를 재료로 삼아 작품을 만드는 새로운 금박공예이다, 이 금박공예 역시 현재 수원에만 공예가가 있다는 것.

 

 

어렵고 힘든 작업, 그러나 보람도 있어

 

맥간을 이용한 금박공예는 수많은 손질을 해야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고 한다. 금박은 금이나 금빛 나는 물건을 두드리거나 압연하여,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작품을 만든다. 금박공예는 금박시트지를 이용하여 순금을 이용하지 않고도,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금속공예의 한 장르이다.

 

맥간금박공예는 송곳을 이용해 수없이 금박시트지에 줄을 그어서 입체감을 불러오죠. A4용지 한 장에 1,200번에서 1,400번을 선을 그어야합니다. 촘촘하게 줄을 그어 결을 만들어 내어 맥간공예와 마찬가지로 결에 의한 입체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죠.”

 

금박공예는 이제 새로 시작한지 3년이 되었다고 한다. 3년 동안을 준비를 해, 이번에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고.

 

정말 작품 하나 완성하기가 어려워요. 대작인 용이란 작품의 경우 금박시트지가 9장정도 들어간 작품인데, 한번에 1,200회의 선을 송곳으로 그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만 번이 넘게 송곳으로 금을 그은 셈이죠. 또 조금만 힘이 덜하거나 더해도 입체감이 살아나질 않아요. 그래서 더욱 세심한 주의를 요하죠.”

 

그렇게 힘들여 만든 작품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것. 용이란 작품 하나를 제작하는데 만도 한 달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맥간 금박공예가 이수진씨는 현재 권선동에 맥간아트 및 아카데미 대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12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 협의회 선정으로 전통, 연희 부문에 특별예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회의 개인전과 아세아미술초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북경 문화당미술관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금박공예는 화려하죠. 고급스럽기도 하고요. 누구나 다 금빛을 좋아하잖아요. 저희들이 시청로비에서 전시회를 하는 것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까요. 많은 분들이 와서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원에서 처음 시작하였다는 맥간공예. 그리고 그 맥간기법을 이용해 조형한 금박공예. 공예가 이수진씨의 금빛에 반한 작품을 수원시청 로비에서 만나보기를 권한다.

絹五百 紙千年(견오백 지천년)’, 비단은 오백년을 가지만, 한지는 천년을 간다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한지의 우수성을 알리는 글이다. 한지의 우수성은 조선 시대에 한지로 만든 지갑(紙甲)’이라고 하는 갑옷이 있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가 있다. 지갑은 임진왜란 등 전쟁에서도 병사들이 착용하고 나갔다고 한다.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에도 지갑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런 우리 전통한지를 갖고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을 통칭 한지공예라 한다. 한지공예는 오색 색지공예또는 지함이라고 하며, 현재 박물관에 조선중기 이후의 유물들이 현존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부터 구한말 까지 가장 성행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공예의 하나이다.

 

 

15년 동안 오직 한지에만 매달린 정성

 

이혜순(, 54. 인계동거주)씨는 한지공예가이다. 200115()한지공예문화교육원에서 한지공예지도사범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도사범이란 남들을 가르치는 사범을 양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말한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작업을 하는 공방에는 땀이 맺힌 많은 작품들이 가지런히 전시가 되어있다.

 

한지공예는 두꺼운 종이나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한지를 여러 번 바르고 오색 색지를 발라서 완성 하게 됩니다. 또 그 위에 갖가지 전통문양을 오려 붙여 모양을 내고, 전체적으로 풀칠을 한 다음 마감 처리를 하여 여러 생활 용품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공정은 상당히 까다롭기도 하지만, 많은 노력을 요하고 있다고 한다. 이혜순 작가가 한지에 매료되어 공예를 시작한 것은 올해로 15년째라고 한다. 그동안 강산이 한 번 반이 바뀌었다. 결혼을 하고나서 수원에 정착한 후, 우연히 만나게 된 한지공예가 지금은 삶의 전체가 되어버린 듯하다.

 

사실 결혼을 하고나서 한지공예를 시작했지만, 여기까지 올 줄은 저도 몰랐죠. 저는 90이 가까우신 시부모님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런 공예품을 만드는 작가활동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동안은 작품을 만들기보다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에 더욱 많은 사간을 할애했죠.”

 

 

한지의 매력에 빠져버린 이혜순 작가

 

한지공예는 한지를 재료로 제작되기 때문에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과 함께, 오랫동안 지녀도 싫증이 나지 않으며 정감을 줍니다. 한지를 주재료로 하여 제작되는 한지공예는 다른 공예품에 비하여 작품 자체가 매우 가볍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여러 가지 문양의 활용과 더불어 현대 감각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로의 재구성을 통해, 전통 문화의 창조와 계승,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지에 대한 자랑은 끝이 없다. 그만큼 이혜순 작가에게 한지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창작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한지공예는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몰입을 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스트레스도 풀린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몰입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라는 것을 느끼게 되죠. 아마 지금의 내가 바로 그런 듯합니다.”

 

 

어려서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혜순 작가는, 서예를 하다가 한지를 접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종이는 약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여러 겹으로 배접하면 화살도 뚫기 어려운 질기고 견고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반해 시작을 한 것이다.

 

작품을 돈으로만 계산하는 사람들 아쉬워

 

한지공예는 작품 제작을 위한 재료의 구입이 용이하며, 기법 또한 어렵지 않아서 누구든지 조금만 배우면 손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실내장식을 위한 조형미와,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으로서의 실용성을 함께 갖추고 있어 누구나 배울 수가 있죠.”

 

한지를 만질 때마다 그 질감이나 신축성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혜순 작가. 마침 공방에 외국인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작품들을 돌아보다가 전등갓에 마음이 끌리는지 얼마인가를 물어본다. 우리 돈으로 12만원이라고 대답하자, 그냥 가버린다, 아마도 그들에게 비싼 가격이었던 것 같다.

 

 

저분들은 외국인들이라 우리 것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여기저기 싼 것들도 많거든요. 저들에게는 작품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더 슬픈 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죠. 한지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한지의 우수성을 깨달아야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부아가 치민다. 1m 50cm 정도의 삼단 농을 하나 만드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한 달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가격을 이야기를 하면 한 마디로 비싸다라고 말을 한다는 것. 작품을 갖고 가격을 논하는 것도 아쉬운데, 정작 사람들은 작품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보고 가격을 논한다는 것이다.

 

한지공예는 주로 여성들이 많이 한다. 섬세함을 요구하는 것도 있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한지공예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르죠. 우선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요. 시간과 많은 노력을 요구하고 있죠. 그리고 한지공예는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요하고 있어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강인해야죠.”

 

 

아름다움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한지공예는 그런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해, 작가의 땀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 한지공예가 이혜순 작가는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한 제9회 대한민국 한지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리고 각종 기예능 경진대회의 심사를 맡아보았다. 아직 개인전을 갖지 못했다는 이혜순 작가의 개인전이 열릴 날을 기대하는 것도, 누구보다 한지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칠보공예작가 김난영의 칠보사랑

칠보란 ‘금·은·구리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이나 그 혼합물을 발라 구워서 여러 가지 무늬를 나타낸 세공’을 말한다. 보석의 대용품으로 처음 등장한 칠보는 후에 영구적인 색감과 독특한 기법으로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는 칠보화(七寶畵)·갑옷, 장신구, 성배, 성골함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걸쳐 다양한 모습의 장식 목적으로 널리 발달되어왔다.

이 칠보에 마음을 뺏긴 사람이 있다. 수원시 팔달구 '아름다운 행궁길‘에서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난영 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칠보를 시작한지는 7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칠보에 대해서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말하기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표현을 할 정도이다.


다양한 칠보의 아름다움

칠보의 기법은 다양하다. 가는 금속선을 디자인의 외곽선을 따라 바탕금속 위에 붙이고 이 외곽선 안쪽을 유약으로 채워 소성시키는 기법인 유선칠보. 유선칠보는 식은 다음 표면을 연마하여 광을 내며, 금장신구에 많이 쓰인다. 유선칠보(有線七寶 cloisonné)· 조금칠보(彫金七寶 champlevé)는 유선칠보와 반대 기법으로, 금속물의 표면을 디자인대로 파내고 그 안에 주엽을 채운 후 소성하는 것이다.

채유칠보는 칠보색이 금속의 외곽선이나 선으로 그려진 홈에 의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기법은 앞에서 언급된 기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기법에서는 젖은 유약을 쓰더라도 우선 건조시켜야 하는데, 이는 젖은 상태에서 유약이 흘러 서로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한 7년 정도 되었나요. 원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처음에는 악세서리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칠보의 매력에 빠져들었죠. 2006년도에 처음으로 공방을 개설하였는데, 이상하게 저는 적자를 보지는 않았어요. 만들어 놓으면 많은 분들이 좋다고 사가고는 했으니까요.”

왜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것일까? 아마도 작가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좋으면 남들도 좋다는 말이 정설인 듯해요. 저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었어요. 상품과 작품을 철저히 구분을 한 것이죠. 그러다가 보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 되었죠.”



철저한 프로근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칠보공예를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작품을 만들기 시작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이렇게 칠보공예에 빠지게 된 것은 스스로도 놀랍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예요. 작업을 하느라고 해와 달이 어떻게 뜨고 지는지를 몰랐다고 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저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저 칠보공예의 화려함에 빠져 들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칠보는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작업에 몰입을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1년을 했으면서도 남들의 10년같이 작업을 했다는 김난영. 벌써 자신에게서 칠보공예를 배워 나간 사람들 중에 사범이 될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 15명, 그리고 10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고.



“저는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도 칠보공예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을 해요. 작업만 하고 있으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에 밀려 오거든요. 이 칠보공예는 결국 제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죠”

칠보공예 박물관을 이룩하고 싶은 꿈


김난영의 경력을 보면 재미있다.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위해 뒤늦게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들어갔다. 창작 21 문학 동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칠보공예에 빠져 든 2006년부터응 온통 칠보에 관한 내용을 수를 놓고 있다. 본격적으로 공방을 차리고 칠보공예를 시작한 2007년부터의 경력이 A4용지 두 장에 빼곡하다.

“문학은 칠보공예를 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글을 쓰고 표현을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칠보공예를 설명을 할 때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는 김천에 박물관을 짓는 것이 꿈이에요. 난영칠보박물관을 짓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죠. 앞으로 몇 년 후면 아마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해요”

참으로 이야기를 해도해도 끝이 없을 듯하다. 아마도 몇 년 후 칠보공예가 김난영을 보기위해 김천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노력을 해온 결과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주요약력)

2007, 1, 17 나녕공방 개업
2007, 10, 12 금하칠보 지도자과정 수료
2007, 12 제12회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대전 장려상 및 입선
2008, 12 제2회 불교문화상품 공모전 특선
2009, 2, 27 제30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입선
2009, 4, 21 불교 탬플스테이 홍보관 개관식 및 수상작 입점
2010, 7, 두 번째 김난영 칠보공예전
2011, 11, 10 남원 실상사 가을바람전
2012, 2, 24 제34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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