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아침부터 비 소식이 있더니 오후 들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화성시 서신면 궁평항에서 ‘2014 1회 화성 백중놀이를 연다고 하여 궁평항으로 향했다. 궁평항에 도착했을 때는 빗줄기가 꽤 굵어졌는데, 주차장 안에는 차를 댈 공간조차 없다. 휴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궁평항을 찾아온 것이다.

 

궁평항 한 편에 마련한 무대에는 한창 백중놀이가 잔행이 되고 있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칸막이도 없는 노천에서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한 행사는 화성시 국악명인 추모제로 이어졌다. 화성시의 국악인 중에서 7명의 고인이 된 명인을 기라는 추모제이다. 이 행사는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것으로 ()한국국악협회 화성시지부가 주관을 하고 화성시와 화성시의회 그리고 예총이 후원을 했다.

 

 

망혼일혹은 우란분절로 부르는 백중

 

백중일은 음력 715일을 말한다. 810일이 바로 백중절이다. 백중 때가 되면 체소와 과일 등이 수확을 할 수 있는 시기로 100가지 과실이 나온다고 하녀 백종(百種)이라고도 했다. 이날은 망혼일, 혹은 불가에서 우란분절이라고 부른다. 우란분절에 불가에서는 하안거를 해제하고, 망자들을 위한 제를 올린다.

 

예전 목력존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은 백가지 과일과 꽃을 차려놓고 스님들을 청해 우란분회를 열어주라고 일렀다. 신라나 고려 때는 이 우란분절을 민가에서도 행했으나, 조선조에 들어 민가에서는 사라지고 사찰에서의 풍습만 남게 되었다,

 

 

백중일을 머슴 날로도 불러

 

백중일이 되면 김매기가 다 끝나게 된다. 하기에 이 절기에는 호미를 잘 씻어 다음해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호미를 씻어 낭대(=農旗)의 버레줄에 매달아 놓는 호미걸이를 한다. 그리고 이날 집에서 부리는 머슴들에게 용돈을 나누어주는데, 이 돈을 갖고 장에 나가 술도 사 먹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는 했다.

 

이날은 집집마다 모든 머슴들이 장에 나오기 때문에 이날 열리는 장을 백중장이라 불렀으며 머슴장이라고도 했다. 이날 장터에서 열리는 많은 놀이를 백중놀이라고 했으며, 백중놀이의 가장 큰 판은 역시 씨름판이었다. 대개 백중장의 씨름에서 최후의 승장인 판막음에게 돌아가는 상품은 황소 한 마리였다.

 

 

비가 쏟아지는데 열린 대감굿

 

이날 화성 궁평항에서 열린 백중놀이 잔치판에는 화성대감굿보존회가 질펀하게 판을 벌인 신장, 대감놀이가 무대에 올랐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주무 임영복(, 59)과 보존회 회원들이 그 비를 다 맞으면서도 굿판을 벌였다.

정말 이 빗속에서도 이렇게 궁평항과 백중놀이를 위해 기꺼이 굿판을 열어 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풍물과 사물놀이, 선소리 산타령 모두 비를 맞으면서 공연을 해주셨는데, 정말 고맙게 구경하고 갑니다.”

 

 

궁평항에 가족들과 함께 다니러왔다가 좋은 구경을 하고 간다는 이모씨(, 44)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공연을 하고 있어 놀랐다고 한다. 이날 백중놀이는 모든 출연자들이 열심히 공연에 참가를 했지만, 진행의 미숙함이나 공연을 하는데 공연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것은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백중일을 맞아 지역의 국악인들의 위령굿을 겸한 ‘2014 1회 화성시 백중놀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무사히 공연을 마친 많은 출연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무당(巫堂)’, 사회에서는 심심찮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부 종교에서는 심할 경우 마귀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당은 한 때 최고의 권력자요, 신을 대신하는 집제자이기도 했다. ‘()’란 글자를 혹자는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늘(무자의 위 획)과 땅(무자의 아래 획)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무자 안의 두 개의 사람 인). 그리고 그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l이을신자이다) 것이 바로 무당이다.

 

무당은 본인이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당은 신내림이라는 무의식을 통해 태어나거나, 지연신통(自然神通)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무당이 된다. 하기에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접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강신무(降神巫)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세부터 신병을 앓았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6에 거주하는 임영복(, 59). 굿판에서는 소리 잘하고 춤 예쁘게 추는 무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지금은 내놓고 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무당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수많은 외래종교가, 혹은 사회가 이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고통 속에서 살아왔단다.

 

어려서부터 정말 힘들게 살아왔어요.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요.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그냥 사용하려고 했데요.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나서 아버지를 따라 증평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집을 하나 구해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가 몹시 편찮으셔서 그 집과 땅을 처분하고 고모네 집으로 들어갔죠.”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환란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몸이 자주 아프고 병치레를 해 고모가 점집을 찾아갔더니, 무당이 하는 말이 그 아이를 무당 집에 양녀로 주어라. 그래야 그 아이가 살 수 있다고 하더란다. 그때만 해도 남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면, 말이 좋아 양녀지 식모나 종과 다름없이 부려먹고는 할 때였다. 할 수 없이 고모가 데리고 살다가 23세에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부터 이미 신병이 시작한 것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젊어서 결혼을 해 벌써 37년이란 세월을 살았네요.”

 

결혼 후 심해진 환각과 환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역시 하나 뿐인 딸을 찾았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시집을 오고 나니 시집에는 시부모님들과 삼촌들까지 대가족이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연탄불에 밥을 해야 하는데, 매일 5개씩의 도시락을 싸야 했단다.

 

그런데 밥을 하고 솥뚜껑을 열면 밥 솥 안에 구더기 같은 것들이 뱀처럼 바글거렸어요. 그러면 놀라서 곁에 있는 설거지통에 물을 들이붓고는 했죠. 아침마다 수도 없이 골목길을 파고 한 솥씩 밥을 갖다가 묻었어요. 이 집에서 오래 살다가는 아무래도 제 명을 못 살 것 같아 남편을 졸라 분가를 했죠.”

 

 

그렇게 나가서 생활을 한 곳이 바로 병점이라고 한다. 집에 있으면 날마다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프고 배가아파 기침을 하면 병원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피가 넘어오는데도 병원에서는 신경성 위장염이라고 했단다.

 

의사에게 욕을 하고는 했어요. 각혈을 하는데 무슨 신경성 위장병이냐고요. 남편은 그런 나를 믿지 않고 사람으로 대우도 해주지 않았어요. 그런 상태에서도 제가 계속 내림을 거부하니까 잡자기 둘째가 아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겁이 덜컥 났죠.”

 

믿어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고통도 받아

 

이미 신통이 되어있는 상태라 환청과 환각으로 참을 수가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심지어는 3개월이나 6개월씩 대소변을 받아내고는 할 정도로 심하게 몸이 망가졌다. 몸무게도 40kg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에게 사업을 그만두라고 했다. 남편이 망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남편은 무시를 하고 듣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는 것이 눈에 보여 그만두라고 했더니 네가 뭔데 그만 두라느냐고 무시를 하데요. 결국엔 말 그대로 망했지만요. 내림을 받고서도 풍파는 가시질 않았어요. 우선은 시집에 알릴 수도 없었지만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도 친구를 마음대로 집으로 한 번도 데려오질 못했으니까요. 거기다가 집에서 징소리가 나면 아이들이 제 시간에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요. 부모님들을 거역하기 일쑤였죠.”

 

 

그렇게 내림을 받고도 한참이나 고통을 받았단다. 현재 살고 있는 수원 연무동 시장 인근에서 고기 집을 시작했는데 그것도 다 날려버렸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생전 장사라고는 해보지 않았으니, 남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기자(祈子)라면 제대로 굿을 해야

 

한 번은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에 스님이 찾아 오셨데요. 그런데 남편을 보고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손금을 좀 보자고 하더니 손금 안에서 여인이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이더라고 했데요.”

 

그때는 이미 내림을 받고난 후였다. 처음에 내림을 받고난 후에는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일도 꽤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심하게 단속을 시작했고 애꿎은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굿은 보통 밤에 하기 때문에 밤새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디 가서 누구와 무슨 짓을 하고 왔느냐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참 힘든 세월이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없애고 나서 전안 문을 걸어 잠가놓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죠. 거기서 단판을 지으려고요. 참 울며불며 매달렸더니 제자야 나하고 같이 팔도유람이나 하자는 말이 들렸어요. 그리고는 벌써 10년 정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지금은 남편이 제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어요. 아이들도 이젠 다 커서 이해를 하고 있고요.”

 

 

무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누구나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영복씨는 어려서부터 신병이 와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벌써 신내림을 받은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제가 기자들에게 굿과 소리를 가르치는 것은 저라고 남들보다 잘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신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절차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떻게 신령의 이름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굿거리 제차를 무시하면서 밥을 먹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지하에 조그마한 연습실을 조성해 놓고 사람들을 일대 일로 가르치고 있어요.”

 

60년 세월 중에서 50년을 시달렸다. 그나마 이제야 겨우 좀 편안해졌다고 한다. 앞으로도 신령의 사람으로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내 운명이 그렇다면 좀 더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단다. 문을 나서는데 인사를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오랜 여운을 남긴다.

 

어차피 이렇게 고통을 받고 살 운명이라면, 차라리 아프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당을 택했어요. 남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32살에 내림을 받았습니다. 그 전부터 이미 신통이 되었는데 계속 거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너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제가 종가집에 종부인데 어떻게 이 길을 걷겠어요. 당시만 해도 무당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할 때인데요. 그리고 시집이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아무도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죠.”

 

사연이 없는 기자(祈子)란 없다. 누구나 내림을 받기 전에 고통을 먼저 받는다. 대개는 이를 무병(巫病) 또는 신병(神病)이라고 한다. 신병은 여러 가지로 찾아온다. 물질적으로 오는 경우는 이유 없이 많던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딱히 돈을 나갈 이유도 없었지만,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시집을 와서 찾아온 신병

 

또 한 가지는 정신적인 신병이다. 헛것이 보이는 환시(幻視) 현상에, 소리가 들리는 환청(幻聽) 현상까지 겹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함께 찾아오면 그 누구도 버티기가 힘들다.

 

결국엔 내림을 받게 되고 만다. 그리고 나서야 아프던 몸도 나아지고, 우환이 들끓던 집안도 잠잠해진다. 신병을 앓으면서도 계속 내림을 받기를 거부하면 급기야는 인다리현상이 나타난다. 주변에 가족들이 한 사람씩 죽어나가는 것이다. 인다리란 사람으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병이다.

 

남편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신병이 있다는 것을요. 참 갑갑한 시간이었죠. 결국엔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이 가루가 되는 듯한 고통이 와서야 내림을 받았죠. 세류동에 거주하시던 정종화 선생님께 내림을 받았는데, 당시는 수원에서 가장 잘 불리는 분이셨어요.”

 

 

신혼 초부터 이상한 것들이 보여

 

23세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 때 시집의 조상을 보았다고 한다. 종가집이다 보니 집안에 식솔들이 많아 새벽 4시면 일어나 밥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있더라는 것. 세를 들어 사는 집 손자가 말썽을 피우고 도벽이 있어 할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마당을 서성이는 줄 알았다고 한다.

 

저는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시집을 와서부터 시집의 조상님들을 보기 시작했죠. 그 할머니한테 아이가 속을 썩이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보이지 않고요. 대개 시어머님이 시장을 저녁에 가는데 그날따라 일찍 장을 보러 가자고 하시데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시할머니 제사다라고 하시잖아요. 제가 본 할머니가 바로 시할머니였던 것이죠.”

 

그런데 시할머니 제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하더라는 것이다. 살아서 잘해주지 죽은 다음에 잘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더니 억울하고 분하다라는 말이 튀어 나왔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너무 몸이 아파서 내림을 받았지만, 남편은 사람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눈물로 점철 된 시간이 흘렀다.

 

 

재주는 신령이 주지 않아요.”

 

남들은 신을 받고나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고 했는데, 신을 받고나서도 고통은 가시지를 않았다. 벌써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세 번이나 변한 것이다. 그동안 남편도 사업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지금은 임영복 소장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을 왔을 때 큰 농장을 운영했어요. 연무동에서 갈비집도 크게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면서 쪽박 하나가 그 물에 둥둥 떠다니더라고요. 한 마디로 쪽박을 찬다는 뜻이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12거리 전수소 임영복(, 59)소장. 굿판에서 만난 그녀는 굿이 남다르다. 요즈음 들어 선거리 굿을 한다고 하면 소리 지르고 껑충대고 뛰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임영복 소장의 굿채는 남다르다. 품격이 느껴진다. 곱게 걷고, 소리 잘한다. 그런 임영복 소장이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5 자신의 자택 지하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경기지방의 굿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성주기도도차서(巫堂城主祈禱圖次序)에 기인한다. 그런 굿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옛말처럼, 제대로 굿채를 익힌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주를 모든 기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요즘 기자들의 굿을 보면 저것이 과연 굿인가 할 정도로 민망할 때가 있어요. 굿은 장단, 사설, , 소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입니다. 거기다가 신탁인 공수까지 곁들여야죠. 그런데 그런 채가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12거리 전수소를 열고 1:1로 재주를 알려주려는 것이죠.”

 

굿판에서 만난 임영복 소장의 굿은 아름답다. 장단 잘 치고 소리 잘한다. 풍부한 문서까지 익혔다. 그래서 늘 굿판에 불려 다닌다. 이런 만신들을 보고 청배만신이라고 한다. 벌써 10년 세월 그렇게 팔도를 다니면서 굿판에 섰다. 그 재주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언제 또 그 신명나는 굿을 볼 수 있을지.

 

굿판이 들썩인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어깨가 절로 출썩인다. 그 중에는 잘한다’, ‘좋다라고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도 있다. 18일 오후 6시부터 수원시 장안구에 소재한 만석공원에 마련된 수원시 제2야외음악당에서는,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가 주관하는 경기안택굿한마당이 열렸다.

 

오후 6시부터 3시간이 넘게 계속된 경기안택굿의 각 거리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전해진 제인청 춤이 무대에 올랐다. 경기도 안택굿에서는 굿을 하기 전에 먼저 대문 앞에서 풍물패들이 지신밟기를 한다. 풍물패들이 한바탕 무대 위에서 풍장을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버나잽이의 접시돌리기로 한껏 달아올랐다.

 

 

쌀쌀한 날씨에도 구경꾼들 신바람 나

 

낮에는 조금 덥다고 느끼는 날씨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찬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계절이다. 하지만 객석에 앉은 관람객들은 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순서가 연이어 계속되면서 시간이 흐른다. 오후 830분 경. 날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안택굿의 굿거리 제차 중에 창부거리가 시작이 되었다.

 

창부는 무격들이 섬기는 예능의 신이다. 무격들에게 재주를 주고, 노래와 춤을 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격이다. 하기에 창부거리에서는 재미난 재담과 소리로 흥을 돋운다, 경기도 안택굿은 재미있다. 각 거리마다 딴 굿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보인다. 이렇게 뛰어난 예능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안택굿이지만, 전통 경기도 안택굿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요즈음은 그저 대충 굿이 유행한다. 지역적 특색도 별로 없고, 소리나 춤 등도 없다. 거의 공중으로 껑충껑충 뛰며 악이나 박박 쓰는 그런 굿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굿이 특징이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해서 굿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그렇게 지역적으로 특성이 있는 굿을 지키고자 함이다. 굿을 종교가 아닌 전통문화예술로 접근하자는 시도이다.

 

관중을 사로잡는 창부굿

 

잽이라는 악사들의 음악이 흐드러지게 울려댄다. 피리, 대금, 해금과 장고, 바라 등이 조화롭게 흥겨운 가락을 만든다. 먼저 무대에 창부의상을 입은 임영복(. 54) 무녀가 등장을 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흥겨운 노랫가락조로 소리를 뽑아댄다. 잠시 후 남무인 고성주(, 60)가 술상을 차려들고 무대로 나왔다.

 

 

경기도의 안택굿이 딴 굿과는 다르다는 것은 창부거리에서도 구별이 간다. 경기도 안택굿의 창부굿에서는 창부가 둘이다. 남창부와 여창부가 서로 재담을 풀어가면서 관중을 흥이 나게 만든다.

 

거기 창부는 어디로 오셨소?”

난 저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재주를 배우러 가려고 천안삼거리를 거쳐 이곳까지 왔소.”

한양은 무엇 하러 가시오.”

거긴 춤 선생도 소리선생도 많다고 하기에 재주 배우러 가오.”

그 양반 참 몰라도 너무 모르네. 여기 수원이야 말로 효의 도시요. 예능의 도시요. 거기다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있소. 산 좋고 물 맑은 이런 곳에 어찌 재주 많은 선생이 없단 말이요. 굳이 한양까지 갈 필요 없소

 

 

남녀가 풀어나가는 대화에 관중석에서는 맞소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두 무격은 꽹과리를 치면서 소리를 멋지게 풀어나간다. 경기도의 안택굿에서만 볼 수 있는 굿의 모습이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김헌선 교수의 사회로 세 시간이 넘게 진행된 경기안택굿한마당. 한 관람객은 연신 소리를 치면서 구경을 하는 바람에 목이 아프다고 한다.

 

경기안택굿이 이렇게 재미난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춤과 노래 등이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요. 창부거리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으면서 하는 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어요. 우리 지역에 이렇게 대단한 굿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이렇게 재담이 뛰어나고, 춤과 소리가 어우러진 안택굿은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는 이런 굿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2~3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얼른 지정을 해서 보존해야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저승을 간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 저승이란 곳이 어디일까? 상여소리의 사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라는 대목이다. 저승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우리 소리가 갖는 극단적인 여유요, 어찌 보면 표현의 잔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천도 의식이라고 하는 지노귀(진오기)굿을 한다. 전문적인 무격(巫覡-무는 여자무당, 격은 남자무당을 말한다)에게 굿을 일임하여,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자 함이다. 사람이 죽어서 49제 안에 하는 굿을 진진오기라 하고, 49일이 지난 다음에 굿을 하면 묵은 진오기라고 한다.

 

 

일본에서까지 찾아 온 경기도 굿판

 

823().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에 소재한 고려암. 고려암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대문 앞에는 경기 안택굿 보존회라는 현판이 걸린 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무격이 전안(신령을 모셔 놓은 신당)을 모셔놓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4대 째 경기도 전통 안택굿을 이어오고 있는, 남무 고성주의 집이다.

 

고성주(, 58)18세에 내림을 받은 강신무이다. 어려서부터 춤과 소리를 배운 탓에, 내로라하는 굿 잘하는 무격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날 진오기굿을 의뢰한 사람들은 남양주시에 사는 여흥 민씨의 자손들이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천도굿을 뒤늦게 하는 묵은 진오기 굿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날 굿판에는 굿을 하는 무격과 악사, 그리고 집안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 외에, 멀리 일본에서 이 굿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동경에서 찾아 온 Efubun-no-ichi-inc 의 디렉터인 Ayumu Yasuhara(安原 步)이다. 사전 답사를 나왔다고 하면서 굿을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질문을 하고, 일일이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상차림

 

고성주의 전안은 상당히 넓다. 아마 우리나라의 무격들의 전안 중에서는, 가장 넓고 깨끗하다고 악사들이 말을 한다. 악사들은 굿판을 전문적으로 다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은 무격의 집을 방문하기 때문에 많은 무격들의 전안을 보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부터 전을 부치고 과일을 씻어서 쌓고, 각종 떡을 진설한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다 마친 것이 오전 930분경.

 

 

이날 굿판에는 주무 고성주를 비롯해, 여무(女巫)인 서정숙(67), 임영복(59), 홍형순(40)과 악사 김상건(, 61) 등이 굿을 진행했다. 굿은 고성주의 앉은부정으로 시작해 임영복의 산거리, 서정숙의 불사거리, 고성주의 대안주와 이어서 서정숙과 임영복의 조상, 군웅 등을 마친 후 진오기굿인 바리공주의 차례로 진행이 되었다.

 

굿판은 열린 축제이며, 지켜가야 할 문화유산

 

우리는 흔히 굿판을 일러 열린 축제라고 표현을 한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안택굿을 여는 집이 있으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를 한다. 진오기굿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생전에 고인과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해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함께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우리의 축제인 굿이 언제부터인가,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종교적인 심한 박해와 주변의 반대로 인해서, 전문적인 굿을 하는 굿당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다행히 고성주는 자신의 단골들의 굿은 언제나 자신의 전안에서 행한다. 그만큼 자신의 단골들에게 당당히 행한다. 이날 굿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 시작한 굿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준비를 한 시간부터 따지면 11시간 정도가 소요가 된 셈이다. 굿의 끝판에 천기를 벗긴다.’고 하여, 제가 집 부부를 앉혀놓고 그 위에 오색천을 덮고 악귀를 쫒는 의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때쯤이면 모두가 지쳐간다. 더구나 날이 무더워 평소보다 더 많은 고생들을 했다.

 

 

 

미신(迷信)’ ‘혹세무민(惑世誣民) 이라는 일제와 유교적 배타와 함께,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이종교의 배척 등으로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열린 축제인 굿. 그나마 근근이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경기도의 전통적인 굿 한 마당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외국에서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경기도의 굿이, 정작 지역에서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경기도의 전통굿이 제대로 전승, 보전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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