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작가가 보여주는 각종 시작을 보다

 

시작이라는 말은 늘 설렌다. 사전적 의미의 시작은 순서의 처음을 삼다무슨 일이나 행동을 처음으로 행하거나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시작이라는 용어는 처음과 상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쉬었다가 또 시작하는 행위는 다시라는 표현이 따르기 때문에 다시 시작이 된다. 하지만 순수하게 시작이라는 말은 중단했다가 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처음이라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 지금(Now on)'이라는 것이다.

 

팔달구 화서문로 76-1에 소재한 예술공간 봄의 전시실을 찾아가면 다양한 시작을 만날 수 있다. ‘8회 십년의 약속 회원전으로 열리는 ‘2019 시작(Now on)’이다. 권혁인, 임교수, 최대용, 박성진, 박주극, 최시영 등 6명의 작가가 보여주는 ‘2019 시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 23일 오전, 갤러리가 문을 여는 시간을 기다려 전시실을 찾아갔다.

 

일단 시작했습니다. 생각도 마음가짐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쉬운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시작에 한 발을 올려놓습니다. <시작>에는 늘 설레임이 있습니다. 스스로 북돋는 용기와 다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가벼운 긴장감도 있습니다. 또한 시작은 너무나 풍성하고 다양한 의미들을 가집니다

 

 

작가들이 생각하는 시작의 의미

 

작가들은 ‘2019 시작전을 준비하면서 설레었다고 한다. 6명의 작가는 각기 다른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공간 봄의 시작전이 열리는 공간을 들어서면 중앙홀을 중심으로 좌측에 작은 두 개의 전시공간, 그리고 우측에 조금 넓은 한 개의 전시공간이 있다. 이 공간을 6명의 작가가 나누어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사랑의 시작은 권혁인 작가의 작품이다. 모든 만물의 시작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작가는 곤충의 사랑으로부터 인간의 사랑까지를 사진으로 담아냈다. 박성진 작가는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사람의 발을 테마로 삼았다 두분의 발을 촬영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고생한 분의 얼굴엔 쑥스러우면서도 청순 미소를 띠었습니다.’ 작가의 설명이 없었다면 흙발을 포갠 발의 주인공이 어떤 상태였는지 몰랐을 것이다.

 

박주국 작가의 첫시작20081122그날 우리 모두 함께 처음 떠난 첫 출사라는 이름의 시작 그 첫날이 오늘까지 함께하는 시작이었다.’면서 첫 출사에서 담아 온 바닷가의 정경을 보이고 있다. 임교수 작가는 오늘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어제는 지나온 일정의 글을 쓰고 내일은 다가올 미래의 꿈을 꾸면서 행복한 오늘을 시작한다.’고 오늘의 시작을 작품으로 담아냈다.

 

 

작가마다 다른 시각의 시작을 만날 수 있어

 

최대용 작가는 ‘Begin Again(다시 시작하다)'이라는 제목으로 운동선수들을 담아냈다. ’2009년 이임생 감독은 김호-차범근-윤성효-서정원 감독의 뒤를 이어 5대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2009년을 맞이하는 수원블루윙즈는 잠시 잃었던 빛을 내기 위해 새로운 캐치프레이즈 를 선언했다고 했다. 벽면에 전시된 작품에는 땀범벅이 된 선수들이 부둥켜안고 있다.

 

그리고 최시영 작가의 ‘Now on'은 새벽의 핑크 빛 물위에 작은배를 탄 새벽의 사람을 담아냈다. ’핑크빛 새벽을 담는 순간 현실의 끝 추억의 시작이라는 글과 함께. 작가들은 서로 다른 시선들을 가지고 출발한 한 발, 한 걸음의 발품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어떤 공점들이 있을지 또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지 기대됩니다.‘라고 했다.

 

10년의 약속 회원전은 이번 전시가 8회째다. 2009년 제1낯선풍경전을 한양대학교 스퀘어갤러리에서 전시한 후 2013년 제2회 전시는 각인각색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구문화원 예문갤러리에서 가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2019년 제8시작(Now on)’이라는 제목으로 예술공간 봄에서 1031일까지 전시를 갖는다. 6명의 작가가 전하는 시작의 의미, 이 가을에 또 다른 시각으로 시작을 만나보길 권한다.

 

사람은 몸이 아플 때 혼자인 것이 세상에서 가장 서럽다고 한다. 솔직히 남들보다 긴 세상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아직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본 기억은 없는 듯하다. 성격 자체가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누워 있지를 못한다. 그저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몸을 다스리고는 했다.

 

3일 째, 장염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십 번을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남들이 장염이라고 하면 그저 장에 탈이 좀 생긴 것이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아직 장염이라는 병을 한 번도 앓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장염이라는 병이 생겼다. 이렇게 힘든 것인 줄을 몰랐기에 그저 약방에 가서 약이나 사다 먹으면 나으려니 한게 병을 키웠나 보다.

 

하루 저녁에 화장지 한 롤을 다 사용해

 

그런데 저녁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급기야 탈이 난 것이다. 화장실을 가면 그저 좍좍 쏟아내는 것이 염 심상치가 않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시간이 점점 더 바빠진다. 나중에는 화장실 문을 닫기가 바쁘게 다시 화장실을 열어야 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하루 저녁에 두루마리 화장지 한 롤을 다 사용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다음날 부터였다. 물 한모금만 마셔도 바로 배가 아프면서 화장실로 직행을 해야만 했다. 토요일엔 여기저기 취재약속을 해 놓은 곳이 있었지만 탈수증상까지 겹쳤다. 힘이 하나도 없고 자꾸만 잠만 쏟아진다. 막말로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겠구나 하는 불안한 생각까지 든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

 

사람은 몸이 불편할 때 곁에 사람이 없으면 서럽다고 했던가? 그 말이 정말 맞는 듯하다. 하루 반나절을 혼자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한 없이 서글픈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대문 밖 출입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떨어졌다. 지인 한 사람이 전화를 걸었다. 연락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소식을 들었다고 죽이라도 사갖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 말로만이라도 위안이 된다. 사람들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아플 때 보면 알 수 있다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이 난다. 정말 이웃이란 내가 힘들 때 조건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근처에 사는 아우가 약을 들고 왔다.

 

자신도 바쁘게 살아가는 아우지만 그래도 형이라고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곁에 있는 아우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약을 먹고 시간이 지나자 배가 아픈 것과 설사를 하는 것이 조금은 가신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먹고 꼬박 2일을 보낸 셈이다. 사람이 탈진이 되기 시작한다.

 

 

이런 이웃이 있기에 행복하다

 

아침 일찍 아우가 전화를 했다. 밤새 좀 어땠느냐고 묻는다. 설사는 좀 나아졌다고 하니, 약을 지어갖고 올 테니 기다리란다. 2일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더니 사람이 기진맥진이다. 물이라도 마셨으면 좀 나으련만 물만 먹어도 화장실을 가야하니 정말 죽을 맛이다. 꼬박 3일을 굶었더니 사람이 탈진이 되었는가 보다. 누가 문을 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더니 아우가 들어왔다.

 

문자를 하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아 집까지 몇 번을 찾아왔지만 들어오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죽을 사 갖고 오겠다고 나간 아우가 오래지 않아 죽과 약을 갖고 왔다. 토요일인데도 약속이 있어 나가야 한다면서 죽 먹을 시간과 약 먹을 시간을 꼼꼼하게 일러주고 간다. 죽을 먹고 약을 먹은 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설사도 멎은 듯하고, 그렇게 살살 아프던 아랫배의 통증도 조금 가신 듯하다. 3일간의 장염이라는 병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알려준 것 같다. 우선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진정한 이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병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하면, 먼 거리에서 달려올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구차하게 누구에게 내가 아프다는 소리조차 못하는 인사인지라 애써 참았다. 그리고 내 몸은 내 스스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갑오년 1월에 얻은 교훈이란 생각이다. 또한 아우와 같이 걱정해주는 사람 한 두 명이 곁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고 행복하단 생각을 한다.

자장가에 숨은 힘

 

우리소리의 힘은 어디까지 일까? 그 해답은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예전 부모님들의 품안에서 자라난 시대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지금처럼 패륜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시대에 따른 불효야 있었겠지만, 그 불효라는 것이 지금의 패륜과는 차이가 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하게 변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소리를 잃어버린 후다. 어머니의 살가운 정이 느껴지는 자장가를 잊고 난 후 아이들이 변한 것이다.

 

얼마 전인가 며칠 사이에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연이어 접했다. 후배를 시켜 가족들을 죽인 사건. 강남에서 살고 싶어 어머니와 누나를 방화를 죽게 만들고, 본인은 그 시간 딴 곳에 놀라가 있었다는 얄팍한 머리를 쓴 사건이다. 더구나 출타 중이던 아버지를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했다는 이야기에 정말 어의가 없다. 며칠 후 술이 취해 어머니를 괴롭힌다고,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또 발생 해 세상을 경악시켰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왜일까?

 

 

자장가를 잃은 세대, 정이 없어

 

그저 우리 것은 모두 불량품이나 골동품 정도로 알고 있는 사고, 외국의 것이라면 ‘개똥도 보약’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이 나라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남이야 잘못 되어도 관계없다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물론 가정교육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교육현실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인성을 제외하고 주입식 교육에 치중한 사회가, 이런 불행한 아이들을 양산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 우리 전통에 대한 내용은, 고작 몇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교육이 정체성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는 교육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놓고도, 자리배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필요로 할 것인가?

 

‘우리’라는 개념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국제화만 부르짖는 정책. 그리고 제나라 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남의 나라 말부터 가르치는 정책. 이런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황폐화시킨 것이다.

 

 

 

어머니의 자장가에는 모든 교육이 들어있어

 

그 자손이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이 허릴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 금자동아 은이로구나 금이로구나,

만첩청산의 보배동아 순지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귀염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주면 너를사고, 금을준들 너를 사랴

 

회심곡의 한 부분이다. 이런 소리를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재우면서, 또는 등에 업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불러주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아이들은 잠재적으로 이 소리를 기억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충신이고 효자로, 동네방네 사랑을 받는 예의가 바른 아이로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리는 잠재적인 기억으로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잠재적인 기억이야말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따스한 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란아이, 나쁘게 될 수 없어

 

소리는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어느 누구는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슬프게 되어버렸다. 누구는 무명시절 ‘쨍하고’를 부르더니 그야말로 쨍하고 해가 떠버렸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지도 모르는 말을 떠들어 대면서 연신 건들거리고 사는 아이들이, 과연 온전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오륜가를 들어보소. 부모 없는 자식 없고 임군 없는 신하 없다.

부모 공을 알려거든 제 자식을 길러보고, 군의신충 모르거든 효양부모 옮겨가리.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이면 임군에게 충성한다.

존장을 존대하고 친구 간에 신 지켜라. 부부간에 화목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이러고야 사람이지 저마다 사람이냐. 철모르는 짐승의 기특함을 들어보소.

 

오륜가(五倫歌)의 사설 중 일부분이다. 오륜가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갈 도리를 알려주는 소리다. 이런 좋은 소리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나쁜 일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게 모르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 새를 보고 개구리를 보고도 그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바로 어머니의 따스한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다. 어머니의 자장가는 그저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부르는 소리다. 특별한 곡조도 없다. 아이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 소리를 할 뿐이다. 그 소리 안에는 어린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러한 소리를 일어버린 요즈음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어있다. TV에서는 선정, 폭력이 난무하고, 컴퓨터 게임에서는 살인과 폭력이 저질러진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제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 어머니의 가슴에서 울려지는 살가운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피부로 맞닿는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그 따스함을 온전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전국공무원노조 수원지부장 김해영의 인생이야기

 

초등학교 6학년생이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남학생이, 두 동생을 이끌고 사회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나이 33살에 수원시청에 기능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 뒤 18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중, 고 검정고시를 보아 대학을 들어갔다. 그리고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 마디로 놀라울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사과정도 4곳의 학교를 동시에 다녔다. 하지만 두 곳은 중간에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시 수원대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국공무원노조 김해영(남, 51세) 수원지부장의 이야기이다.

 

 

 

“어려서 뛰어 든 사회생활, 별거 다 해보았네요.”

 

1962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했다. 그 산골에서 시작된 김해영지부장의 인생이야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의 이야기의 시작은, 갑자기 부친이 작고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재가를 하셨는데, 계부 쪽에도 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4남매 중에 한 명만 남기고 동생들과 함께 집을 나오게 되었죠. 가장인데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계부가 중국집 주방장이라,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중국집에서 배달부터 시작을 했죠.”

 

그렇게 시작한 사회생활이다. 서울 홍대 앞에서 중국집에서의 생활서부터 시작해, 수원과 화성 등지에서 전기공사와 가스배달업, 전자제품 판매원과 모터 수리, 대형트럭 운전사, 동해시와 수원에서의 공인중개사, 그리고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전기 기사직으로 1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원시의 기능직으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자격증 몇 장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았다. 하기야 20여 년 전에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낯 뜨겁습니다. 한 마디로 배우지 못했기에, 제 스스로를 몰랐던 것이죠. 이제 배우고 나니 그 때 제가 얼마나 유치하고 남들에게 비웃음을 샀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배움으로의 끝없는 도전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가 공부를 해 온 과정이 ‘미쳤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중, 고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들어갔다. 직업을 갖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마칠 수 있었단다.

 

“제가 있는 곳이 가정집의 물을 관리해 주는 곳이었어요. 3층까지는 물이 올라갈 수 있도록 수압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산 중턱에 큰 저장고가 있어, 한 사람이 12시간씩 2교대로 24시간 관리를 합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저는 야간만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대학을 마칠 수가 있었고요. 다 주변의 직장선배님들과 동료 분들의 도움이 컸죠.”

 

낮에는 학업에 정진하고 밤에는 근무를 했다.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배움으로의 끊임없는 열망이 지탱을 하게 했다.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공부까지 한다는 것이 힘도 들었지만, 그래도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가 있었단다.

 

김해영지부장은 성균관 대학교에서 유교철학을 공부해 3년 조기졸업을 했다. 또한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을 했다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에서 리더십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문화정보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노조활동은 천명(天命)이다.

 

수원시에 재직을 하면서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정발전연구단과 시청 공무원 중 1%에 해당하는 24명이 꾸민 혁신선도팀에서도 활동을 했다.

 

“제가 노조활동을 한 것은 2004년부터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때문이죠. 그리고 2009년부터 지부장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노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저를 있게 해 준 수원시에 무엇인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이유입니다. 저희 공무원노조 수원시 지부는 현재 회원이 1,700명 정도입니다. 2,580명 정도의 전 공무원가운데 노조에 가입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이 1,900명 정도로 보면, 90%에 가까운 시 공무원이 노조원인 셈이죠. 인구 100만을 넘은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높은 비율이죠.”

 

 

김해영지부장은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투쟁을 일삼지 않는다고 한다. 머리띠 두르고 노조원 조끼를 입었다고 해서 일이 해결이 된다면, 머리띠를 몇 개라도 두르겠다고. 먼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연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희 노조가 주장하는 것이 ‘공직사회의 개혁’과 ‘부정부패척결’입니다. 사실 노조라는 곳이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입니다. 시정은 노조가 관여를 할 수 있지만, 노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부패하기가 좋은 조직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기 그렇게 썩어 있으면서 부정부패척결을 하자고 한다면, 그 누가 따라줄 것입니까? 저희는 노조원들이 내는 회비도 상당합니다. 그것을 회원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죠. 그래서 체육대회도 열고, 건강검진도 2년에 한 번씩 받던 것을 매년 받기로 했습니다. 또 어려움에 처한 회원이 있으면 도와도 주고, 일 년에 두 차례 장학금도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용’이란 소리도 듣는다고 한다. 그럴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것.

 

“공무원이 매달 받는 급료를 ‘봉급’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을 섬기라는 뜻이죠. 시민들의 삶을 질을 높여주라고 주는 돈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일 년에 3~4천만 원씩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서 일벌백계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노조원인데 그런 말을 했다고 어용이라는 겁니다.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시정에 반발하는 것은 안 되죠. 봉급을 받으면 그만큼 시민들을 위해 일을 열심히 해야죠. 지금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놀아도 될 때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힘들게 내는 세금입니다.”

 

11월 1일 오후 5시, 수원시청 청사 한편에 자리한 노조사무실에서 만난 김해영지부장.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 수원시의 인구가 114만입니다. 그런데 공무원이 2,580명 정도입니다. 우리시와 비슷한 딴 지자체에 비해 적은 숫자죠. 공무원의 수를 늘려야죠. 그래야 격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건강해야 시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수원시는 인구는 많은데 구가 4개뿐입니다. 이제 분구를 해서 5개 정도의 구를 가져야죠. 집행부를 도와 이것을 반드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정안전부에 연신 드나들고 있습니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아마 그런 열정이 있어서 많은 일을 감당해 내는가 보다.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하겠다는 김해영지부장.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며 웃어댄다. 대담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그의 책 <변화와 희망을 위한 철학에세이>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올해 51세 지천명에 이르렀다는.

 

‘천명(天命)이 있긴 있나보다. 하고자 한 게 아닌데 하고 있고, 이르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르러 있는 것을 보면, 묘하게도 맞아 떨어지는 얘기로 들린다. 10년 주기설. 사람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는, 대개 10년 주기로 찾아온다고 한다.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를 반추해보면 그리 부정할 일도 아닌 듯해 보인다.’

참 오랫동안 춤을 추어오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이 갖고 있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춤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세상살이를 하는데도 기본이 되었다. 항상 춤 속에서 생활을 하다가보면, 세상 모든 것이 춤과 연결이 되어 진단다. 춤꾼 김진옥은 그렇게 50년 이상을 춤 속에서 살아왔다.

 

4월 2일 용인시 기흥 민속촌 인근에 있는 경기도 국악당의 제1강습실. 장구를 둘러멘 사람들이 열심히 장단을 치면서 춤을 배우고 있다.

 

“손을 이렇게 끌고 오다가 아름답게 넘겨야지. 그래야 태가 아름답게 되지. 그냥 위로 올리면 그건 춤이 아냐”

 

 

어린 나이부터 춤을 시작해

 

춤을 추는 춤꾼들은 거의가 어릴 적부터 춤에 입문을 한다. 춤을 배우게 되는 계기 역시 흡사하다. 어머니들이 춤을 좋아해, 어머니들의 손에 이끌려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12명의 강습생들에게 ‘정민류 교방장고촘’을 가르치고 있는 김진옥(여, 64세) 역시 어린 나이에 종로 5가에 있는 정민무용학원을 찾아간 것이,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을 춤과 함께 살아오게 된 계기이다.

 

“참 그동안 정말 열심히 춤을 추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저는 제 나름대로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를 해요. 앞으로도 저는 제 춤 길을 갈 것이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는 제자들을 가르쳐야죠.”

 

 

 

그래서인가 강습생들에게도 길을 유난히 강조를 한다. 아마도 그런 자신이 평생을 쌓아올린 춤에 대한 열정이 그 말 한 마디로 함축되는 듯하다.

 

“아무리 바빠도 춤은 춤길이 있다. 그 춤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춤이 아니다”

 

춤이 곧 인생일 수밖에 없어

 

다음 카페 ‘정민류교방춤보존회’에 소개된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끝이 없다. 그만큼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경기도 국악당에서 강습생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대학 강의 등 하루 종일 빡빡하게 일정이 잡혀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일정을 소화를 해내는 것을 보면, 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무용과 객원교수, 국립한경대학교 사회교육원 전임강사, 정민류 교방춤 보존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용인시지부 고문,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서울시연합회 안무장, 경기 토속민요 연구회 이사, 한.얼무용단 수원지부, 용인지부, 과천지부 예술총감독, 한맥예술단 예술감독, 서초 체육쎈타(YMCA) 한국무용 강사, 창무회 화랑 회원

 

카페에 소개된 이력의 앞부분이다. 그 밑으로는 한참을 내려가야 할 만큼 일 년에도 많은 공연무대에 섰다. 많게는 일 년에 10여 차례의 공연을 가질 만큼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이다. 그렇게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대 위에 올랐다.

 

“원래 정민선생님은 김해랑 선생님의 제자예요. 김해랑 선생님은 1953년도에 서울에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를 설립하시어 초대 이사장직과 마산 경남무용협회 초대 지부장을 역임하셨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을 신무용으로 발전시키신 분입니다. 정민 선생님과 최현 선생님의 최초의 스승이기도 하시고요. 안타깝게 55세의 나이로 타계를 하셨죠.”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

 

그런 김해랑 선생에게 사사를 한 고 정민 선생은 대구에 머물 때 밤마다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춤을 배웠다. 당시 기생들은 교방이 폐청되고 난 후, 살아가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대구에서 교방춤을 배운 정민선생은, 북가락과 장고춤 등 나름 교방춤으로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정민 선생님은 1928년 11월 4일 일본에서 태어나 2006년 1월 5일 79세 일기로 타계하셨어요. 5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 선생은 광복이전부터 연극과 노래를 하면서 예능계에 데뷔하며 일본예술단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제1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 승무로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1955년부터 각 대학과 고등학교의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개인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연을 열어 우리 춤의 보급에 앞장을 섰던 분이시죠“

 

 

그런 정민 선생에게 교방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춤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고 한다. 이미 한영숙류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임인 벽사춤 아카데미의 이사이기도 했던 김진옥 선생은, 벽사춤과 함께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민선생님의 교방춤은 정말 우리 민속춤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생님은 대구에서부터 나중에 일본에 가신 후에도, 교방의 기생들에게 춤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수십 가지가 넘는 교방춤을 그렇게 전수를 해주셨죠.”

 

정민류교방춤의 제1호 이수자이기도 한 김진옥 선생은 교방춤을 보급하고 알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는 서울본부를 비롯해, 부산광역시지부, 경기도지부, 인천남동지부, 경남지부, 전북지부, 김해지부 등이 있다.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보존회 회원들은 일본 오사카본부를 비롯해 동경지부와 교토지부가 있으며, 미국 LA에도 본부가 있다.

 

“지난 해 추석 때는 미국에서도 공연을 가졌었습니다. LA에서 공연은 정말 감명 깊었죠. 1,300석을 꽉 메운 관중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올해는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보존회의 이름으로 정민선생님을 기리는 공연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그대로 춤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그래서 춤꾼들은 사는 일상이 춤이라고 하는가보다. 평생을 춤으로 살아온 김진옥 선생. 교방춤의 멋을 후대들에게 온전히 전할 때까지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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