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항상 서로를 생각하는 친구 두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삶이라고 합니다. 늘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죠. 엊그제인가 강원도 고성에 거주하시는 지인 한 분이 수원으로 오셨습니다.

 

지인이 거주하는 곳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 인근인데, 이번에 눈이 2m나 내린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의 20일 간이나 외부와 소통을 하지 못한 체 전화로만 안부를 묻고는 하다가, 이번에 20여 일만에 포클레인으로 길을 내고 단숨에 수원으로 달려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만으로도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시간을 따질 필요없어

 

사진을 찍어서 갖고 온 것을 보면 정말 쌓여있는 눈이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몇 년 전인가, 저도 속초에서 한 3년 정도를 산 적이 있습니다. 그 해도 2월에 눈이 내렸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1m가 넘는 눈이 쌓여, 아침에 난리를 피운 적이 있습니다. 그 뒤 며칠 후에 수원에 일을 보러 나왔더니 20cm인가, 눈이 왔는데 교통대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많은 눈을 보다가 보니 별로 쌓인 것도 아닌 눈에도, 사는 환경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 영동지역 사람들은 그 정도 눈은 눈 취급도 하지 않는데 말이죠. 고성에 사는 지인은 수원으로 오다가 여주에 사는 동생과 동행을 했습니다. 늘 보고 싶은 사람들이죠. 그리고 만나면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자들만의 모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닭골목에 있는 집에서 만나 통닭 한 마리 시켜놓고 그저 술잔만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남들이 들으면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수원에 사는 동생까지 합세를 했습니다. 제가 늘 좋아하는 사람들 중 반은 모인 셈이죠. 그때부터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하면서 또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수원의 아우네 집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냅니다. 딱히 모여야 할 이유도 없지만, 이렇게 한 번 모여서 술잔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곁에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

 

사람들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합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죠. 이 날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비슷한 아픔을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아픔의 종류도 다르고 강도도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고 나면, 더욱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소중해집니다. 그 소중함을 오래 간직한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먼 길을 눈을 헤치고 달려 온 지인. 불과 하루 저녁을 함께 보내고 또 황망히 길을 떠났습니다. 고작 아침 한 그릇을 함께 나누고요.

 

 

하지만 그 하루가 남들의 몇 날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몇 사람만 있다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단순히 사회에서 아는 사람, 혹은 직장의 동료나 친구.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내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침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고성에 사는 지인이 보내 준 눈 사진이 있습니다. 그 험한 눈길을 큰돈을 들여 포클레인으로 눈을 헤치고 달려온 길. 그리고 하루 만에 다시 돌아간 길. 그런 길을 함께 동행 할 사람이 곁에 있어 행복한 날입니다.

밀려오는 통증으로 인해 고집을 피우다가 병원을 향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통증이다. 이제 누구 말마따나 연식이 오래되어 폐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넘기고는 한다. 그런데 심각할 정도로 통증이 온다. 할 수 없이 병원 신세를 지는 수밖에.

원래 병원하고는 담을 싼 사람이다. 째지고 깨어져도 대층 넘어가는 판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아 가는 길이다. 가면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병원이라는 곳을 다녀왔는데도 다시 통증이 있다면, 이젠 정말로 농담삼아 하는 몸을 바꾸는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지 실실 웃어도 본다 . 아픔을 조금이나마 잊어보려고. 그런데 뒷 자리에서 아이 하나가 심하게 울어댄다. 이제 10개월이라는데 엄마가 진땀을 흘린다.

어린 엄마는 더 울고 싶을 것

뒤돌아보니 아이엄마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불편한 것인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몸도 안좋은데 아이까지 쉴 새 없이 울어대니 솔직히 짜증도 난다. 그런데 아이가 을어대는 것이 엄마의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아이 엄마의 나이가 이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 것만 같다.

곁에 탄 할머니 한 분이 아이를 추스려보지만 그것도 허사.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아이가 무엇이 불편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차 안이 덥다. 요즈음 일기가 다시 여름이 오는 것인지 며칠 간 여름날씨로 돌아간다고 이야기를 할 지경이었으니. 기사분에게 에어컨을 좀 틀어달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를 않는다. 아이엄마도 옆 할머니도 감당할 수 없는가보다. 

내리라는 사람, '너나 내려라'

두 시간 정도를 가는 버스이다. 고속도로에서 나이 어린 아이엄마는 울고 싶을 것만 같다. 그런데 버스에 함께 탄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아줌마 아이 데리고 내려요. 듣기 싫어 어디 사람이 살겠소. 자가용 타고 다니든지"

아이를 데리고 내리란다. 여기 고속도로인데 아이를 데리고 어디서 내리라고. 아이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 말에 사람들이 모두 동조를 하는 표정이다. 하긴 버스 안에서 아이가 한 시간이 넘게 울고 있으니, 짜증들이 날 만도 하다. 그렇다고 고속도로 인데 내리라니.

"아저씨 여기 고속도로인데 어딜 내리라고 해요"
"당신은 듣기 싫지도 않소?"
"나도 듣기는 싫죠. 그렇다고 일부러 울리는 것도 아닌데. 고속도로에서 내리라고 하면 되나요"


그런데 이 양반 바로 육두문자가 나온다. 결국 어린 아이엄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미안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옆에 탄 할머니께서 이제는 아이가 아니고 엄마를 달래고 있다.

"아저씨 세상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무엇이라 할 일이요. 아이가 우는 것이 엄마 탓도 아니고. 그런 당신이 자가용 타고 다니면 되지"

말이 험해지니 이 양반 바로 꼬릴 내린다.
 
"듣기 싫으니까 그러죠" 
"듣기 싫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고속도로에서 내리라고 하면 되겠소. 그렇게 능력이 좋으면 당신이 내리쇼. 차 없어 버스 타는 것도 서러운데 별 소릴 다하네"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차 없는 것이 무슨 죄인가? 아이 엄마를 보니, 아이아빠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20대 중반일텐데. 차 없는 것을 나무라다니. 어쩌다가 세상이 이리 되었는지. 없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살기가 힘들다. 그렇게 아이는 두 시간이 넘게 울었다. 어디가 불편했는지, 아니면 아팠는지. 아이엄마에게 병원을 가보라고 이야기를 한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고맙다고 말하는 어린 엄마. 우리 며눌아이도 차 없어 혹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늘을 본다. 가을 하늘이 참 높다. 어쩌다가 이 어린 사람이 엄마가 되어서 곤욕을 치루나. 세상이 조금만 이해를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야박해야만 하는 것일까? 따듯한 사람들이 그립다.

사람들을 만나면 참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때로는 세상을 조금 살았다고 하는 나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이야기들도 듣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속은 다 다른 법이라, 그것을 갖고 ‘맞다, 틀리다’라는 평가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결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들은 이야기지만 도저히 나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참으로 황당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러쿵저러쿵 할 처지가 아니라, 생각만으로 접어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그런 여자를 다시 데리고 살까?’ 하는 생각이다.

김계용님의 솟대 '사랑이야기'이다. 남녀사이, 특히 부부사이란 신뢰가 쌓여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딴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여자

어느 아이까지 달린 주부가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단다. 그것도 대충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아예 나가서 살림까지 차렸다는 것이다. 그러기 이전에도 2~3일씩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남편 되는 사람은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집을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 아이들을 두고. 6개월이나 집을 나가 딴 남자와 살림을 차린 이 여자.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살림을 차렸던 남자가 홀연히 떠나버렸다는 것.

문제는 이 여자가 다시 제 발로 집으로 들어왔는데, 남편은 그 여자를 다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하면서.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래서 그 남편은 그 여자를 다시 데리고 산다고?”
‘예전보다 더 잘 해준데요.“
“그 남자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런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산다고.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아예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딴 남자와 살림까지 차렸던 여자를”
“그래도 그 남자 이혼도 하지 않고 기다렸데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모르겠다. 그 남자의 속을 도대체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납득이 가질 않으니 말이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나?”
“예”
“나 같으면 받아들이지 않겠지. 어떻게 그런 여자를 받아들이겠어.”
“그런데 그 남자 분은 예전보다 더 잘해주고 있어요.”

이해가 가는 이야기인가? 그 남자란 분 얼굴이 보고 싶다. 도대체 공자도 하지 못할 그럴 일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정작 내가 더 걱정을 하는 것은, 한 번 그랬던 여자가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전에도 며칠씩 집을 비웠던 여자. 그리고 딴 남자와 소문까지 내면서 살림을 차렸던 여자. 과연 그런 여자가 이제 온전히 남편과 아이들을 지키면서,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도대체 그 남편이라는 사람의 속을 모르겠다. 아마도 그 속은 이미 숯덩이가 된 것은 아닐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참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다.

사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버릇처럼 집을 나갔던 여자가, 다음에 다시 나가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남자 분의 속은 어떨까를 생각하게 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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