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어라 뚫어라 물구멍을 뚫어라. 물줍쇼 물줍쇼 사해용왕 물줍쇼

 

거북이를 몰고 나온 질라래비가 우물 앞에서 하는 덕담이다. 놀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한다. “물주쇼 물주쇼, 사해용왕 물주쇼거북놀이는 우리나라 한수 이남의 놀이로, 추석에 연희되던 놀이이다. 수수잎과 짚 등을 이용해 만든 거북놀이의 거북이는 두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연희를 한다.

 

거북놀이는 거북이를 몰고 다니는 질라래비가 거북을 몰고 다니면서 간절하게 기원을 한다. 한가위에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면서 축원을 해주는 것이다. 거북놀이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0호인 이천 거북놀이로 지정이 되어있다.

 

 

정월 대보름과 추속에 즐기던 놀이

 

본인이 이천 거북놀이를 직접 이천시(당시 이천군) 전역과 근동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발굴을 해, ‘이천의 민속 거북놀이라는 책을 펴낸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다. 아마 이 조사보고서 형식으로 꾸며진 소책자가, 그동안 써온 20여권의 책을 엮게 된 기폭제가 되었는가 보다. 그러한 거북놀이를 이천이 아닌 수원시 영통구에서 만났으니 참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거북놀이는 기원성민속이다. 가내의 안과태평과 풍농 등을 기원하는 놀이이다. 거북놀이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날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짚과 수수깡으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즐기던 놀이이다. 이천지방에서는 대월면에서 이 놀이가 전승이 되어왔다. 거북이는 장수동물이요 부귀를 상징하기 때문에, 놀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놀이는 대개 정월 대보름 밤이나 추석날 밤에 하는 놀이로, 수숫대와 짚 등을 이용해 거북이 모양을 만든다. 거북이의 앞에는 2~4명 정도가 안에 `들어가는데, 앞 사람이 주기능자가 된다. 거북이를 몰고 다니는 질라래비도 옥수수 잎과 짚 등으로 머리에 쓰는 모자와 허리에 두르는 치마를 만든다.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놀이

 

거북놀이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연희를 하는데, 집 대문 앞에서는 문굿을 먼저 치고, 마당에 들어서면 우물굿(용왕굿)과 마당굿을 한다. 마당에서 굿을 하는 도중 거북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거북이 곁으로 몰려들게 된다. 이때 질라래비는 이 거북이가 동해를 건너(지역에 따라서는 서해를 건넌다고도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배가고파 쓸어졌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십쇼하고 소리를 치면 주인이 먹을 것을 내준다.

 

그렇게 밤새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준다. 대개 정월에 하는 거북놀이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가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한다고 하면, 추석에 하는 거북놀이는 풍농에 대한 감사로 행해진다.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초지리에서 전승이 되는 거북놀이는 한 때 중단이 되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재현을 하여 전승이 되고 있다.

 

 

이천거북놀이 조남걸(, 59)보존회장은

우리 거북놀이는 한수 이남과 금강 이북의 마을에서 주로 연희가 되어왔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거북놀이는 풍농과 안과태평을 위한 놀이였지만, 결국에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동의 놀이였습니다. 거북이를 놀이의 주체로 삼은 것도 알고 보면, 농사에 가장 필요한 물 때문은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거북이는 용왕의 심부름꾼으로 늘 등장을 하기 때문이죠. 오늘 이 거북놀이가 연희가 된 다음 비라도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농촌이 다 망가질 것 같습니다라며 간절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희를 한다고 한다.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축원을 하는 기원성민속인 거북놀이’. 오늘 한가위를 맞이하여 우리의 전통놀이인 거북놀이를 소개하는 것도,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만 가고 있는데 이렇게 마음이 풍요로운 거북놀이 하나가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반룡송.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소나무의 껍질이 마치 용비늘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은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스님은 이천 백사면 도립리와 함께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하늘로 오르고 싶은 나무

 

반룡송은 이천 백사면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1.7㎞ 떨어진 도립리 어산마을에서 자라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 뒤펴에 집이 있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주변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반룡송 주변에는 모두 밭으로 변해, 올해는 땅콩밭이 있다.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6월 17알 오후에 찾아간 반룡송. 이 인근을 지나칠 때마다 찾아가보고는 한다.

 

그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룡송의 상태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어느 때는 과거와는 달리 훼손이 되어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곳에 와서 반룡송을 보았을 때는, 어딘가 조금 튼실하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에, 더욱 궁금했기 때문이다.

 

 

승천하는 용과 같은 가지가 일품

 

반룡송의 높이는 4.25m, 가슴높이의 둘레는 1.83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져 넓게 퍼져 있으며, 하늘을 향한 가지는 마치 용트림하듯 기묘한 모습으로 비틀리면서 180°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용송이란 이름이 걸맞다는 생각을 한다. 한 가지는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나무이면서도 두 나무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에 늘어진 가지는 땅에 끌릴 듯 휘어져 있다. 벌써 6~7 차례나 찾아가 만난 반룡송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으면서, 언젠가는 하늘을 향해 승천을 할 날만을 기다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반룡송 앞으로 가 나무를 찬찬히 살펴본다. 지난해와는 달리 올해 만난 반룡송은 참으로 빛이 고운 것이 싱싱하다, 바라보면서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전설을 간직한 반룡송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신비한 나무인 반룡송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다. 그만큼 이 반룡송에 전하는 이야기는 많다. 구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아무도 반룡송에 해를 가하거나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반룡송의 나무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하여, 가급적 나무 근처에 가까이 가서 해를 입히려고 하지 않는단다.

 

 

반룡송은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히고 있다.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 도선스님이 심었다고 한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년 만에 다시 찾아간 반룡송. 지난해보다 더 잎의 빛깔이 곱고 생육이 좋은 반룡송을 보면서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1,100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서 용이 승천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룡송. 그 이름과 같이 만년송이 되기를 고대한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에 소재한 용화사. 그 경내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인 ‘이천자석리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 노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인 개석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이마 중앙에 백호가 표현되었다. 양눈썹과 는, 돌출된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용화사의 주존불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와 간결하게 처리가 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화사(龍華寺) 경내에 주존불로 노천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입상은, 높직한 석축을 쌓고 그 중앙에 석불을 모시고 있다.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기단이 이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조성을 한 것이다. 가슴 아래에 커다란 하나의 동과, 가슴 위 부분과 얼굴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모든 것이 간략하게 처리가 되어있다. 이는 고려 말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의 경우 이러한 석불과 마애불 등이 딴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 세웠다고?

 

일설에는 고려 현종 9年인 1018年, 장호원읍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그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개 시장이나 마을의 안녕 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석장승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석리는 본래 음죽군 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지역이다. 여주군 소개면의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과 흑석의 일부를 따서 자석리라 하였으며, 설성면에 편입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했다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화강암의 두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용화사 석불입상. 일반적으로 석불의 경우 몸에 팔을 조각하는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이 석불입상은 그저 통으로 두 개의 돌을 포개놓고 얼굴의 형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팔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많은 석불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에 가장 약식화 된 석불입상이었다는 생각이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떨 때 찾아갔던 용화사 자석리 석불입상. 올 가을이 짙을 때 이곳을 다시찾아, 가을의 풍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모습이 보고 싶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등을 답사하다가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바로 자연을 사랑하는 선조들의 마음이다. 깊은 산속에 지어진 절을 보면, 늘 선조들의 마음을 읽어내고는 감탄을 할 때가 많다. 꽤 많은 전각들이 절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좋게 절의 앞까지 길을 내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절은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런 것 하나도 섬김의 도라고 한다면, 그 섬김 안에는 항상 자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절을 다니면서 들러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자연을 벗어난 웅장함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사랑을 실천한 우리 선조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선조들이었다. 대표적인 축조물은 바로 수원 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라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내기 위한 거대한 축조물이지만, 화성은 그 어느 곳 한곳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스스로가 자연이 되어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 일이 있어 이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관고동에 자리한 이천시립도서관을 찾아가면, 그 바로 아래에 이천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천시 창천동 336번지에 소재한 이천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이다. 우르 수원의 경우에도 팔달산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아래 수원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향교라는 조선시대의 배움 터가 있기 때문에, , 주변에 도서관을 마련하는 듯하다.

 

 

새를 불렀다는 봉호탑(鳳呼塔)’

 

이천 향교를 들러보고 나오려는데, 옆 산 한편에 무슨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바위에 무슨 각자(刻字) 같은 것도 보인다. 올라가 보았더니 바위에는 봉호탑(鳳呼塔)이라고 바위에 음각을 해 놓았다. 바위를 네모나게 파낸 후 그 안에 다시 깊게 음각을 한 글씨이다.

 

말 그대로 하면 봉황을 불러들이는 탑이라는 뜻이다. 탑이라면 돌을 깎아 세워야 하는데, 그저 향교 옆 산에 있는 자연적인 바위에 이렇게 음각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앞 안내판에 쓰인 문구를 보니 이해가 간다. 이 바위에서 새를 부르는 의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고는 다시 한 번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지금도 이천향교 주변에는 큰 느티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주변에 큰 느티나무 숲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숲이 우거지다가 보니, 하절기가 되면 꾀꼬리 등 많은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향교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즐거워했을 것이고.

 

망치소리에 놀라 사라진 새들

 

그런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천 향교를 중수를 했다고 한다. 향교를 중수하면서 대목장들이 나무를 다듬기 위해 내는 망치소리에, 새들이 놀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유생들은 늘 듣던 새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아름다운 새소리가 그리워졌을 것이다. 유생 중에 박정수, 이면용 두 사람이, 이 바위 앞에 먹이를 놓고 새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봉호탑은 바로 먹이를 놓고 고사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관고동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 이야기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당시의 유생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 봉호탑을 보면서 또 한 번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 선조들처럼, 자연을 아끼고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을 해본다. 바위에 새겨진 각자 하나, 그것이 주는 교훈이다.

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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