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기분 좋게 사진을 몇 징 찍었습니다. 반찬이 좋아 소개를 좀 할까 해서. 그런데 정박 밥은 찍을 생각도 않고, 반찬도 찍었다는. 이런 경우 이걸 어쩌나하고 후회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나이가 먹더니 벌써 치매 끼가 온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천시 관고동 503-5 번지에 소재한 이천 쌀밥 한정식 집인 동강’. 이천 마란다 호텔 앞에서 곤지암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우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마치 거대한 방주같은 이천중앙교회가 자리를 하고 있어, 누구나 찾기가 수월할 듯하네요. 이 집은 외형적으로는 그저 단순한 조립식 건물입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으리으리한 한옥이죠.

 

 

건물 안에 한옥이 있어

 

정말 반전입니다. 건물 안에 이렇게 멋진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그런데 점심을 먹으로 들어갔는데, 이 집에서 먹는 점심이 가격이 싼 편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천의 쌀밥 집을 들어가면 한 사람 당 2만 원 정도의 식사대가 나옵니다. 거기에 비하면 조금은 씬 편입니다. 17,000원 이니까요.

 

경기도가 선정한 음식점인 동강. 반찬이 그런대로 꽤 먹을 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찬만 찍었지, 정작 밥을 찍지 못했습니다. 밥 먹는다고 빠져서 그랬죠. 아마도 이 집의 음식이 입에 맞았던지, 나오자마자 먹는 것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나, 이젠 맛집 소개 그만 두어야 할까 봅니다.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원~.

 

아무튼 반찬이라도 죽 올려드리렵니다. 17,000원이나 받는 밥상이기 때문에....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을에서 마국산 줄기가 있는 부처박골로 들어가는 길. 마을을 지나 하천을 따라 500m 정도를 지나면 동물의 분뇨를 갖고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난다. 이곳에서 500m 정도를 작은 내를 건너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문화재 관리소'란 작은 가건물이 있고, 숲길 안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떨어진 나뭇잎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그런가, 떨어진 낙엽들이 그대로 쌓여있다. 밟는 촉감이 좋아 이리저리 길을 벗어나 낙엽을 밟아본다. 마을에서 '부처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바위인줄만 알 정도로 희미한 선각처리가 된 마애불. 현재 이 마애여래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바위 주변에는 누가 쌓은 것인지 여기저기 돌탑이 쌓여져 있고, 하천도 큰 돌을 이용해 잘 정비가 되어있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조금 떨어진 우측에는 돌로 쌓은 작은 네모난 돌집 안에 부처를 모셔놓기도 했다. 그동안 누군가가 이곳을 관리를 잘 해온 듯하다. 커다란 바위는 주변에 보호책을 쳐놓았다. 불상은 높이 7m 가 넘고 동편을 바라보는 편편한 바위를 다듬어, 부조 한 후 선각처리를 하였다.

 

  
부처바위에 선각한 마애여래좌상. 얼굴 주변에는 7겹의 두광이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결가부좌한 모습.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상으로 보이는 이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난 탓일까? 육안으로도 잘 식별이 되지 않을 만큼 선이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오른손의 수인은 육안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두광은 머리주위를 일곱 겹으로 동심원을 둘러놓았고, 몸 주위에도 두 겹의 신광을 표시하였다. 얼굴이 둥글고 눈은 가늘며 입술이 엷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애로운 아미타여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왜 이곳에 들어와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이런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어떻게 이 호젓한 산중에 이런 커다란 마애불을 새겼을까? 늘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그리도 간절했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들어와 이런 작품을 조성한 것일까? 쉬지 않고 질문을 해보아도, 알 수가 없다.

 

  
부처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에 고려 초기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보이는 이 마애불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인가 이곳에 들려 마애불을 찾겠다고 비료공장까지 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로 길을 돌아간 적이 있다. 이렇게 선각처리를 해서 육안으로도 확연히 볼 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때 비를 맞더라도 올라올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그때 비를 맞더라도 부처바위 마애불을 보기 위해 올라왔으며, 좀 더 정확한 선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비를 맞으면 선이 더 확연하게 들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보면, 늘 후회를 하는 일이 생긴다.    

 

  
누군가 마애불 가까운 곳에 돌로 집을 짓고 부처를 모셔놓았다


부처바위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 산중에 있었다. 1979년 이천문화원에서 답사를 할 때까지, 이 산중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수많은 시간을 이렇게 바위벽에 앉은 채로 기다려온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이 호젓한 산중을 찾은 나그네에게 진정 인연을 알려주고 싶어서일까? 엷은 미소를 띠는 미소가 한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설봉산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이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불이라고 하지만은 그 모습은 오히려 나한상에 가깝다. 이 자연암석에 조성한 마애불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보인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화좌대와 광배

 

사람들은 꼭 국보나 보물이라야 문화재인줄로만 알고 있다. 물론 국보나 보물이 더욱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유형문화재나 향토유적 등도 같은 문화재이다. 그것을 어디서 지정을 한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지자체에서 지정한 향토유적이라고 해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은근히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천시 향토유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영월암 창건 장시에 조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는 이 광배와 연화좌대가 주불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주불은 없어지고 광배와 연화좌대만 도괴되어 있던 것을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 놓고, 그 위에 1980년에 새롭게 불상을 조성해 놓았다.

 

마모가 심한 광배

 

광배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배형으로 조성한 광배는 많이 마모가 되어 문양 등을 쉽게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2조로 된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현재 좌불상이 있어 뒤편에 있는 복판을 촬영하기는 무리였지만, 원을 중심으로 단엽 8판을 연잎을 둘렀다.

 

중앙의 연잎 주위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화염문과 당초문을 조성하였다. 두광의 상부와 신광의 좌우에는 화불이 3구 조성되어 있으며, 불상을 주착했던 흔적이 나 있다. 광배의 전체높이는 156cm, 폭은 118cm이며 두께는 45cm 정도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연화좌대

 

연화좌대도 대좌에 조각한 것들이 많이 마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 마디로 장엄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화좌대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8각으로 조상한 안상, 그 위편에는 앙련좌와 복련좌를 쌓아 올렸다. 4부분으로 조성한 좌대는 각각 1석을 사용해 조성하였다.

 

전체높이가 107cm인 연화좌대는 생동감이 넘친다. 앙련좌 위에 올린 팔각형의 석주에는 나한상을 조각한 듯하다. 그러난 심하게 마모가 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 광배와 연화좌대 주변에는 몇 개의 석물이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이 영월암의 역사로 보아, 옛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월 23일, 한 낮의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른 영월암이다. 그저 몇 발자국만 걸어도 땀이 비오듯 한다. 이런 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문화재라고 해서 늘 좋은 날씨에만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더위에 올라 만난 수중한 문화재 한 점.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안흥지라는 크지 않은 네모난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로 구만리 뜰의 논에 물을 대어, 천하제일미라는 진상미인 이천 자채벼를 생산했다. 진상미인 자채벼를 생산하는 논을 서민들이야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고려와 조선조의 대신들은 이 구만리 뜰 방죽 앞에 자채논을 갖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하니, 언감생심 서민들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여지도서』에는 이 방축의 둘레가 약 388m(1250척)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안흥지는 이천시 미란다호텔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연못이다. 애련정기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인 1456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안흥지가 처음으로 있던 시기를 지역에서는 통일신라 이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기록에 보이는 애련정

 

‘애련정기(愛蓮亭記)’에 따른다고 했으니, 이곳에는 ‘애련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애련정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임원준의 <애련정기>를 말한다. 또한 『이천읍지』에 보면 객사 남쪽에 정자가 있어, 그 창건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 10년인 1428년에 중건하고, 세조 12년인 1456년에 이천 부사로 취임한 이세보가 지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애련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천 객관 동쪽에 작은 정자가 있었으나 돌보지 않아 기울어져 있었다. 이세보가 이 정자를 수리하여 전보다 더 크게 세웠다. 정자는 낮지도 높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다. 정자 아래는 자연습지였는데,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대에 왕들도 찾았던 유서 깊은 정자

 

결국 애련정은 그 이전부터 있었고, 자연습지였다는 것을 보아 방축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애련정은 영의정 신숙주가 정자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꽃이 핀 경치가 좋아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역대의 왕들이 이 애련정에 들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능인 영릉에 참배를 하고 돌아가던 중종은 이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연희를 베풀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숙종과 정조 등이 이곳에 들렸다. 중종 23년(1528), 숙종 14년(1688), 정조 3년(1779)에 영릉에 들려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왕들이, 이천행궁에 들려 연꽃이 아름답게 핀 애련정을 돌아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산대군과 조선조의 대문호 서거정의 글도 보인다

 

이러한 애련정은 1907년인 순종황제 원년에 일어난 정미의병 때 일본군이 이천읍내에 483가구를 불태웠는데, 당시 애련정도 소실이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애련정은 1998년 이천시가 애련정기 등을 기반으로 복원한 것이다.

 

애련정의 이야기를 되살려

 

지금의 애련정은 안흥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안흥지의 중간에 인공 섬을 만들고 양편에 구름다리를 놓았다. 예전의 애련정은 어떠했는지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의 애련정을 보면 연못에 핀 연꽃이며, 유유히 유영을 즐기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경치가 남다른 풍광을 자랑했을 것이다.

 

당시 이곳에 들린 월산대군 이정(성종의 형) 서거정, 조위 등이 애련정에 올라 글을 남겼다고 했고, 임원준과 김안국의 애련정기와 애련루기는 지금도 전해진다. 애련정을 처음 찾아간 것은 2002년 10월이었나보다. 당시에도 아름답다고 느낀 애련정이었지만, 찾아갈 때마다 애련정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다.

 

 

 

이천 시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애련정은 주변이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유영을 즐기고 있고, 사람들은 이런 애련정에 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한 곳을 여러 번 찾아가는 것은, 달라진 점이 있지나 않을까해서다.

 

애련정처럼 보기 좋게 달라져 기분이 좋은 곳도 있으나, 어떤 문화재는 훼손이 되어 안타깝기도 하다. 두세 번 반복해서 찾아가는 것도 우리문화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공 섬 위에 올라앉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애련정. 그 정자에 전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가지 못함이 아쉽다. 언젠가는 정자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그 많은 이야기를 다 풀어내고 싶다.

마음 한 자락을 덜어놓고 가도, 한 점 미련이 남지 않을 듯한 암자. 넓지 않은 경내에는 그저 어디서 털버턱 주저 앉아도 마음이 편한 것만 같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영월암. 1300여 년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암자다.

 

영월암은 원래는 ‘북악사’란 이름으로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는 고찰이다. 영월암 중건기에 따르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나 금석문 등은 전하지 않는다.

 

 

더운 날 오르면, 오장까지 시원한 곳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오른 영월암. 입구에는 수령 64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옹대사가 식수하였다고 전한다. 수고는 37m에 둘레는 5m가 되는 보호수이다.

 

은행나무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영월암, 설봉산 주봉 아래에 고즈넉히 자리를 잡은 이 암자는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다. 그저 얼핏 구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설봉산을 넘어 흐르는 구름을 따라, 그렇게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암자이다.

 

대웅전을 지나 왼편 암벽 위에 서 있는 삼성각으로 오른다. 영월암 삼성각에는 중앙에 유리로 앞을 가리고 뒤편 암벽에 판 후 독성을 모셔놓았다. 그 독성이 혹 나옹선사가 아니었을까?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 멋 적어 허공에 빈 웃음을 날려본다.

 

삼성각 곁에는 와편을 쌓아 올린 굴뚝이 서 있어 멋스러움을 더한다. 전국의 수많은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보면 그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지만, 그 중에도 눈에 띠는 이러한 조형물 하나는 꼭 있기 마련이다.

 

구름에 떠가는 듯한 느낌이

 

삼성각 앞에서 내려다 본 영월암. 그저 조용하게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다. 그 많은 날들을 그렇게 조용히 앉아, 참선에 든 수도승처럼, 영월암은 그렇게 지내왔는가 보다.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기와들이 참 정연하단 생각을 한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그러한 마음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누군가 도토리 몇 알을 게단 한편에 모아놓았다.

 

삼성각에서 내려오는 계단 밑을 보니 석조 안에 꽃들이 가득하다. 저런 것 하나도 저리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마음이 있어, 영월암은 구름을 닮았나보다. 우물 뚜껑 위에는 영월암 스님이 닦아서 말리려는 듯 다구들이 늘어져 있다. 깨끗하게 닦여진 다구들. 세상에 찌든 마음을 저렇게 닦아낼 수만 있다면. 오늘 영월암에 올라 나도 구름을 닮은 마음을 가져본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그 앞에서 마음을 멈춘다.

 

보물 제822호 마애불을 바라보며 오르다가 보면 좌측에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를 볼 수가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주불이 없어 안타깝다.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일부가 훼파되거나 사라진 문화재가 있어 마음이 아프다.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이 되었다고 하면 천년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국을 돌면서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문화는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며 그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낙서에 훼파를 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갈 수가 있을까?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성된 마애불은 그런 속된 세상이 보기 싫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나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닮은 마음을 갖고 있는 영월암. 설봉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찌든 마음 하나를 훌훌 털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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