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은 건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을 말한다. 담은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중 경미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안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반대로 성벽·성곽과 같이 대규모인 것도 있다. 담의 기능에는 공간의 구획,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들여다보는 것의 방지, 화재 등의 위험방지, 위엄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등 담은 그 재료 등으로 담장의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는 과연 경계이고 차단일까?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담장이 이웃과의 경계를 가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담은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다. 그리고 외부와의 차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담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담과 가진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바람 정도만 막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같은 민초들끼리는 서로 피가 통하기 때문이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담장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집으로, 또 그 다음집으로 담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자들이다. 가진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장의 철학이다.

 

 

 

 

 

담은 공유를 하는 것이다

 

가진자들은 늘 소통하고 보여주는 민초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감추고 가리는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들은 서민을 위해서 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집의 담을 낮추고, 마음의 담을 낮추지 않고는, 절대로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민초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다. 담장의 철학은 사람들을 일깨우지만 그들은 그 속내조차 모르고 산다.

 

우리의 담장이 주는 철학. 내가 쌓은 담은 안편에서는 우리 담이 되지만 밖으로는 상대의 담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담장의 마음이다. 하나의 담장이 서로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높은 담을 가진 자들. 이제 스스로 그 높은 담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그들과는 절대로 담을 공유할 수가 없다.

 

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 두 곳(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화성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암문은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형을 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역할을 하던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와 팔달문 양편에 적대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많은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수문 옆 지장물 철거가 주는 의미

 

현재 남수문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약간 휘어진 곳에서 성이 끊겨있다. 남수문은 1846년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 대홍수 때 남수문이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가 남수문이 복원되어 현재는 42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2012년 수원시는 90년 만에 남수문을 복원하였다. 동남각루 경사진 곳에서부터 새로 성을 축성하고 남수문을 복원한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것을 감안해 수문 안쪽으로 장마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들을 걸러낼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물이 급격히 불어나도 많은 물이 수문에 영향을 주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2년 남수문을 복원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 이상의 공사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다시 화성의 끊긴 부분을 공사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이미 화성의 자리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화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언제 만날 수 있을까?

 

27, 남수문 안쪽에 현수막이 한 장 걸려있다. ‘남수문 옆 소공원 지장물 철거공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남수문 안쪽 성벽이 끊어진 곳에 서 있는 건물에 공사용 가름막이 쳐져있다. 이제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먼저 성터에 서 있는 건물들을 매입하고, 지장물을 철거한 후 성벽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

 

이번 화성사업소에서 하는 공사는 현재 그동안 남수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상가건물들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234~2, 33~6, 35, 32~2번지 등으로 현재 수원남문고객센터 건물만 남겨놓고 그 인근 건물이 모두 철거대상이다. 이 건물들이 철거돼야 끊어진 성벽과 잇대어 공사를 할 수 있고, 남암문과 남공심돈을 복원할 수 있다.

 

202013일까지 지장물 철거공사를 마치고나면 남수문 옆에서 끊어진 채로 놓여있던 화성의 일부분이 다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 공사를 마친다고 해도 화성전체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공사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구간이라도 이렇게 연결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수원화성이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지장물 철거공사 안내판을 보면서 벌써 남공심돈과 남암문의 모습이 그려진다.

참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음 뷰로 다시 돌아온 지가. 어제보니 그 동안 1,000개의 글을 다음 뷰에 송고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이 1,000개의 글은 딴 분들의 글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여행블로거들이나 문화에 대한 글을 쓰시는 분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조금은 할 테지만 말이다.

 

다음 뉴스였을 때 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 앉았다가, 2007년도에 2,000개가 넘는 글을 하루아침에 삭제를 해버리고 다음을 떠났다. 그리고는 한 3년 정도를 블로그를 떠나있었다. 그동안에 내가 느낀 것은 솔직히 ‘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인가 조금 허전하다’라는 생각이었다.

 

 

다시 돌아온 다음 뷰, 아쉽게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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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년도에 다음을 떠날 때도 그랬다. 뉴스가 뷰로 바뀌더니 문화, 연예가 한데 묶이고 나서부터, 문화는 아예 찬밥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다음뉴스 시절에는 문화기사도 가끔은 메인 창에 버젓이 자릴 잡았고, 그런 기사에 30만 명 이상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와 글을 읽고는 했다.

 

그런데 뷰로 옮겨가더니 이것은 온통 문화는 사라지고, 연예기사가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연예기사를 올려야 하는 다음의 곤란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 허전하게도 문화는 그야말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문화재 글을 주로 송고를 하는 문화전문 블로거로써 참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작 글 1,000개, 하지만 나에겐 장난이 아니야

 

말이 그렇지 2009년 11월에 티스토리 초대장 한 장을 이웃블로거에게서 받아 개설을 해놓고도, 사실은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글을 올리기에는 지난 울화가 채 가시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글을 송고하기 시작한 것이 2010년 8월 경 부터이다.

 

이런 계산이라면 22개월 동안 1,000개의 글을 뷰에 송고를 했으니, 날마다 1~3개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글이 모두 문화재에 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횡성수설 지껄이기도 했고, 어쭙잖은 연애이야기도 쓰기도 했다. 그 중 750개 정도의 글이 문화, 문화재에 대한 글이다. 결국은 문화나 문화재에 대한 글을 매일 한 개 이상의 글을 송고를 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화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야만 했을까? 한 번에 답사를 나가면 보통 1박 2일로 돌아온다. 요즈음은 숙박비와 차량을 움직이는 비용이 만만찮다. 1박 2일에 기본적으로 30만원 정도의 경비를 써야한다. 지금은 뜸한 편이지만 일주에 1~2회 답사를 나간다.

 

어떤 날은 7월 복중에 50리를 걷기도 했다. 다리는 붓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그렇게 돌아다닌 세월이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일주에 경비를 50만원 정도 썼다고 하면, 한 달이면 200만원 정도를 답사 경비로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들어갈 때가 많다. 왜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결국 일 년에 2,400만원, 그동안 5,000만원 정도를 답사비로 날렸다. 그 금액으로 답사를 한 글을 다음 뷰에만 보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에서 2년 동안 들어온 돈은 얼마일까?

 

다음 뉴스 시절, 그 시절이 참 그립기도 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상금과 애드박스 등에서 들어온 돈은 고작 2년을 다 합해야 300만원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 왜 이 짓을?’ 하고 묻는 분이 계시다면 할말이 없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짓을 할 것인가? 결국 그 미친 짓이 지난해 년 말에 문화연예 부분의 뷰 블로거 대상을 받기도 했다. 결국 나에게 그 대상은 5,000만원 짜리라는 셈이다.

 

 

나에게는 이 사진 한 장마다 다 사연이 깊다. 그래서 사진이야 어떻든 소중한 자료가 된다. 위는 보물인 함안 방어산 마애불, 아래는 천연기념물인 전남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난 나의 길을 간다고 마음을 다진다.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더 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1,000개의 글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알고 보면 참 마음 아픈 글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10월 15일(토) 오후 3시에 남원에 있는 선원문화관에 갑자기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학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은 금방 문화관 홀을 가득 메웠죠. 지난 번 10월 1일 행사 문예공모전에서 글과 그림을 응모해, 수상을 하는 학생들이 모여 든 것입니다. 수상자 전체 인원 80여 명 중에서 이 날 참석을 한 학생 수는 60명이 넘었습니다.

좁은 홀 안에 가득 메운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이렇게 시상식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선원문화관 이사장과 7733부대장, 수상을 하는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개막 테이프 커팅을 마친 후, 일일이 호명을 하여 상장과 상품을 전달했습니다.




아이들 그림 속에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

시상식을 마친 후 학부모와 아이들은 모두 전시관인 ‘갤러리 선’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80여장의 아이들이 국군의 날 그린 그림들을 돌아봅니다. 그 안에는 자신들이 그린 그림들도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 앞에서 수상을 한 인증샷을 찍기도 합니다. 그리고 딴 학생이 그린 그림도 꼼꼼히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림을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아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를 두고 말입니다. 그냥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제 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그림 몇 장을 돌아봅니다. 그 그림 안에 아이들의 생각이 들어있다면, 정말 요즘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 듯 그런 철부지가 아니란 생각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무엇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듯도 하고요.

과연 그냥 그린 그림일까?

한 아이가 전도를 그려놓고 그 겉을 칠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빨강색으로 북쪽은 파랑색을 칠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는 손을 서로 내밀고 있는데, 두 손을 마주잡지는 않았습니다. 잡을 수도 있을 텐데, 잡지 않은 손. 아마 손을 잡은 것이 그리기가 어려우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색을 바꿔 칠한 것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칠을 하다 보니 그렇게 색을 칠한 것일 테죠.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 현실과 참 잘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이상한 것 압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그림 한 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 한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출렁이는 바닷물에 뜬 천안함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천안함은 영원해요’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남은 천안함의 아픈 기억입니다. 멀쩡했던 천안함은 두 동강이가 났지만, 아이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천안함이 제대로입니다. 아이는 두 동강이가 난 천안함이 싫었을 테죠. 누구나 다 아팠을 겁니다.



아이들의 그림 속 세상. 그 안에는 예전의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아이들이 벌써 나름대로의 사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그림이 더욱 소중하단 생각입니다. 내년에는 또 어떤 그림들을 만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주장. 그냥 여주에 있는 장이 아니고, 500년 긴 성상을 한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여주 5일장에 대한 책이다. 2009년 10월 가을이 깊어갈 때부터 시작해, 2010년 6월 더위가 막바지로 치솟고 있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5일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가을부터 여름까지 4계절을 장에서 지낸 셈이다. 그렇다고 장돌뱅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다

여주는 전통 있는 고장이다.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여주는 예전부터 땅이 비옥하고 풍부한 농산물에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주변의 도시와는 달리 여주는 목(牧)을 둘 정도로 큰 도시에 해당했다. 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나루, 광나루와 함께 이포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이 중 여주에 이포와 조포가 있을 만큼 여주는 수운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이러한 여주의 5일장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된다. 그러나 아직 여주 5일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고 책을 쓰기위해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료라고 나온 것은 다만 몇 줄에 불과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었다. 9개월의 여주 5일장 순례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여주 5일장은 독립운동의 시원지

여주 5일장. 그냥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여주 5일장에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난 뒤, 여주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유림을 위시한 많은 여주사람들은 일제에 항거를 시작한다.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일본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여주장에 숨어들어 일본군 등 50여명을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주의 마을들이 일본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3, 1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13도 의병 총사령관을 여주 출신 이인영대장이 맡기도 했다. 결국 여주 5일장은 구국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주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

여주 5일장을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물론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외에도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세상 이야기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부부장꾼, 비가오나 눈이오나 제 자리를 지키면서 몇 명 안되는 단골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멀리 꿈을 안고 이국으로 와 피곤한 삶을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는 이주노동자들. 손톱이 다 뭉그러지도록 하루 종일 마늘을 까고 계시는 할머니. 대물림인 뻥튀기를 하는 어느 분의 이야기. 그 안에 삶의 모습이 있었다.



‘마을 사람은 장으로, 도독은 마을로’

5일장은 인정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말만 잘하면 그냥도 준다’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5일장으로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마을은 텅 비어버린다. 장으로 다 나가기 때문이다. 꼭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다. 5일 동안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친하지 않아도 친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5일장이다.

여주 5일장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접고 또 접었다. 한정된 페이지에 글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 중에서 이야기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많은 고민도 했다. 그 중 어느 이야기 하나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9개월의 작업 끝에 작은 책자 하나를 펴들었다. 『500년 세월의 여주 5일장』 비록 책은 볼품이 없지만 땀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주 5일장’ 책 안에는

이 책 안에는 5일장의 의미, 5일장의 역사, 5일장의 기능, 그리고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5일장 책을 집필하면서 느낀 한담을 적은 ‘강한루 마루에 땀을 식히다’로 되어 있다. 발품을 수도 없이 팔아 만들어 진 책이다.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 컬러사진 한 장 넣지 못했다. 한정판이기 때문에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줄 수도 없다.



21번째 쓰는 책이지만 이번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그만큼 다리품을 팔아야만 했다. 손이 얼어오고, 몸에서 쉰내가 날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손에 받아 든 책이다. 이것이 여주 5일장의 모두는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여주 5일장이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500년 세월의 여주5일장’

발행일 : 2010년 6월 25일
발  행 : 여주문화원
발행인 : 이 난 우
지은이 : 하 주 성
디자인 : 김 금 자
비매품, 한정판 158쪽

(주) 이 책은 비매품 한정판이므로 많은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혹 꼭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제 방명록에 비공개로 받으실 주소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6분께만 드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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