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영동시장은 벌써 시장을 개설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다. 영동시장은 2~30리 밖에서도 이용하는 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영정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5일장으로 열리던 시장은,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영동시장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영동시장은 수원천을 끼고 상가와 상점이 발달되어 있으며, 300개 점포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대형장이다.

 

한복 특화시장인 영동시장은 조선조 정조 시대에 만들어진 팔달문 앞의 시장 영역이다. 현재 화성 팔달문 인근의 장들이 모두 한 장터였다고 본다. 영동시장은 1919년 재래시장 등록 후, 문밖시장(팔달문 밖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성외시장(성 밖에 개장이 되어있어 붙여진 이름) 등으로 불리며 4일과 9일에 장이 서던 곳이다. 벌써 정식으로 장을 개설하고 난 후 95년이 지난 유서 깊은 장이다.

 

이러한 유서 깊은 영동시장이 2014826일 오후 430, 영동시장 앞 수원천에 걸린 지동교 위에서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사업 시행 선포식을 가졌다. 이 선포식에는 한정화 중소기업청장과 염태영 수원시장, 팔달구 국회의원인 김용남의원, 이철승 경기도의회 의원과 명규환 수원시의회 의원 및 22개 수원시 전통시장 상인회장들이 함께 자리했다.

 

 

전통시장이 살아가기 위한 모델 만들 것

 

이날 선포식은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추진단 양재학 본부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지역의 난타그룹인 JM타드락의 식전행사로 시작해, 이정관 영동시장 상인회장의 내, 외빈 참석자 소개, 그리고 이정관 상인회장과 김춘홍 육성사업단장의 선포식 선서로 이어졌다. 뒤이어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의 축사와 염태영 수원시장의 인사말로 이어졌다.

 

우리 수원은 22개소의 시장이 있습니다. 이제 영동시장이 중소기업청 등에서 지원을 받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영동시장은 전국 유일의 한복특화 시장입니다. 또한 문화관광형 육성사업단이 영동시장을 새롭게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합니다. 시장 옥상에 있는 건물들이 게스트하우스로 변화를 하고나면 영동시장은 시장이 변화되어 나가야 할 새로운 모델이 될 것입니다. 관계기관에서 앞으로 많은 지원을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영동시장에서 마련한 홍보차량을 이용한 현판 제막식을 가졌다. 영동시장 홍보차량은 앞으로 많은 시장을 돌면서 영동시장을 홍보하게 된다. 그 차량 안에 현판을 걸어놓고 제막식을 거행 한 것이다. 제막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본 한 시민은

전통시장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큰 행사를 갖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이제 어느 시장보다도 앞서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 전통시장을 좀 더 자주 찾아와 이용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기도.

 

장금이 요리교실음식으로 시장 경쟁력 키운다.

 

문화관광형 육성사업추진단에서 준비 중인 사업 중에 특이한 것은 바로 영동시장만의 음식을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진단에서는 영동시장 2층에 장금이 요리교실을 마련하였다. 이곳에서는 정조가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끓였다는 삼합죽과 된장 불고기 등을 개발하여 일반인 및 외국인들에게 판매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날 행사를 마친 후에는 요리연구가 김동희씨가 마련한 삼합죽을 선포식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시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위해 특별히 미음과 죽, 노인용 식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합은 허리와 다리를 튼튼하게 하며 해삼은 신장을 보하고 쇠고기는 당뇨와 부종을 낫게 한다.’고 했다. 이 음식이 바로 삼합미음이다.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음식 삼합죽

 

삼합죽은 추진단 회의에 참석한 김우영 시인에 의해 제안이 되었다고 한다. ()화성연구회 회원이기도 한 김우영 시인이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삼합죽을 개발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던 것. 그것을 추진단에서 받아들여 요리연구가에게 삼합죽을 선포식에 모인 사람들에게 시식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서 준비하도록 지시한 삼합미음은 효의 음식이다. 홍합과 해삼, 소고기를 이용한 삼합미음은 먼저 해삼은 불려 내장을 손질하고 잘게 다진다. 홍합은 마른 것을 곱게 빻아서 불리거나 생홍합살을 잘 다녀서 사용한다. 소고기는 기름기가 없는 곳으로 잘게 다져서 먼저 끓인다.

 

 

삼합죽의 조리법(4인분)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핏물을 뺀 소고기와 물 3컵을 넣고 육수를 만든다. 육수를 낸 소고기는 결대로 손으로 찢고, 적당한 크기로 다진다. 불린 쌀은 쌀알이 반쪽 정도로 빻는다. 불린 해삼은 손질 후 얇게 썬다. 홍합은 깨끗이 다듬어서 잘게 썬다. (이때 홍합 수염을 깨끗하게 제거해야 비리지 않는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준비한 소고기, 해삼, 홈합을 볶은 다음 3)의 쌀을 볶다가 물과 육수를 붓고 잘 저어가면서 죽을 쑨다. 쌀이 다 퍼지면 소금으로 간을 한다. 이날 삼합죽의 시식에는 쇠고기 장조림으로 간을 보탰으며 물김치도 함께 내주었다.

 

시식을 한 사람들은 담백한 것이 정말 영양이 풍부할 것 같다. 음식을 맛보면서 정조대왕의 효심을 느낄 수 있었다. 수원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등록한 후 판매를 한다면 좋은 것 같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삼합죽. 추석이 지나고 난 뒤 본격적으로 판매를 할 것이라는 이 음식 하나로 영동시장으로 더 많은 발길이 몰려들 것만 같다.

 

15일 수원역사 CGV에서 수원 특별 시사회

 

의궤는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가 끝난 후에 제작하는 일종의 행사 보고서이다. 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모든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에 끝난 뒤에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했다.

 

의궤의 제작은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 1인과 제조 34, 그리고 실무 관리자들인 도청 23, 낭청 48명 및 감조관 6명이 있다. 그 아래에 문서작성, 문서수발, 회계, 창고정리 등의 행정 지원을 맡은 산원과 녹사, 서리, 서사, 고지기, 사령 등도 임명한다. 외에 화원, 장인 등 실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부서별로 배치하였고, 의궤가 만들어질 때 이들의 실명을 기록하여 책임감을 부여하였다.

 

 

의궤의 가치는 행렬반차도, 각종 의물의 견양도, 배경이 되는 건축도, 행사도 등, 시각적인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데 있다고 한다. 의궤에 그려진 그림은 글로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글은 그림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의궤의 꽃

 

왕이 40, 50, 회갑이 되는 것 등을 기념하는 잔치가 끝난 후에는, ‘풍정도감의궤’ ‘진연의궤’ ‘진찬의궤’ ‘진작의궤등 잔치와 관련된 의궤를 만든다. ‘진연잔치를 베푼다는 뜻이며, ‘진찬은 음식을 대접한다는 뜻이다. 또한 진작작위을 올린다는 뜻이며, 왕실에 존호를 올리는 의식 후에는 존호도감의궤가 만들어졌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화성에 행차하였던 모습을 담은 책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여러 형식의 그림들이 본문에 앞서 별도의 권수에 실려 있는데, 의구에안에 그려진 그림들은 종류의 다양함과 정확성,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로 원근법과, 회화적 우수함 등에서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의궤 그림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수원과 관련된 의궤로는 화성의 축상 과정을 그대로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외에도 1795년 화성에서 치른 정조대왕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의 기록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 1800년에 승하한 정조대왕의 국장을 기록한 정조국장도감의궤’, 사도세자의 봉분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내용이 기록된 현륭원 원소도감의궤’, 정조대왕의 능침인 건릉을 조성한 내용을 기록한 정조 건릉 산릉도감의궤등도 있다.

 

다큐 영화로 만난 원행을묘정리의궤

 

15() 오후 430분에 수원에서는 특별한 시사회가 열렸다. 수원역사 내 CGV 수원 7관에서 열린 이 시사회는 바로 KBS에서 제작한 3D 역사 다큐멘터리인 의궤, 8일간의 축제였다. 최필곤 PD가 제작을 한 이 의궤, 8일간의 축제는 원행을묘정리의궤 8책에 수록된 내용을 3D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8일 동안 뒤주 안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했으며, 그 뒤에 왕으로 즉위하지만 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변에는 항상 왕이 죽이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들 모르게 은밀히 자신의 근위병사인 장용영의 병사들을 늘려나갔다.

 

 

그리고 1795년 을묘년에 정조대왕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한다는 이유로 대규모 병사들을 이끌고 수원으로 향했다. 이때 정조를 호위한 근위병들이 바로 장용영의 무사들이다. 정조는 8일간의 축제를 자세히 기록하도록 명을 했으며, 수권 1책을 포함해 본책 55, 부편 42책 등 총 8권의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3D 다큐로 제작된 이 의궤. 8일간의 축제2012년 제49회 수원화성문화재 때부터 제작을 시작하여 1년여 간의 제작과정을 통해, 지난 해 3부작으로 방영한 바 있다. 지난 해 1010, 17, 24일 세 차례에 걸쳐 방영이 된 다큐멘터리1편 사중지공, 2편 불취무귀, 3편 오늘은 기쁜 날이다.

 

의궤, 8일간의 축제73분짜리 다큐영화로 제작되어 이재준 수원시제2부시장, 수원교육지원청 김영일 교육장 및 경기도의원, 수원시의원, 종교단체, 문화관련 종사자들, 수원시민 등 280여 명을 초청해 시사회를 가졌다. ‘의궤 8일간의 축제417일부터 CGV 수원 등 전국 CGV 10개관에서 만날 수가 있다. 수원시민 특별할인 관람가격은 단체(20인 이상) 4,000, 일반 6,000원이다.

하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다산 정약용이 한 말이다. 다산은 신분타파를 위한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지난 날 드라마 이산에서 보이는 다산을 처음부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아마 다산의 그런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화성의 모든 축성과정을 그려내고 감독하는 소임을 맡았다. 화성을 축조할 때 다산은 서양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 결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축조에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다산은 대단한 학자요, 과학자였다. 이산에 다산이 처음 등장할 때 성균관 담을 넘는다거나,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허황된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장약용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최초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

 

요즈음 군인들이 도하작전을 할 때면, 강에 배를 연결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하작전이 다산이 최초로 사용을 하였다고 하면, 틀린 말이라고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 보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의 배다리인 주교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산을 다녀올 때 사용하였다.

 

당시 정조 이산은 1,779명의 문무백관, 나인, 호위군사 등과 함께, 779필의 말로 다리를 건넜다. 당시의 주교는 가로 4m, 세로 11m의 목선 나룻배 37척을 연결해 만들었다. 당시 이산의 능행차도에는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우리 기록문화의 최고봉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63쪽의 반차도(班次圖)는 기록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그림들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시 궁중 화원들이 그린 조선 최대의 기록화이다. 반차도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 화성문화재의 정조 능행차는 바로 이 반차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이론만 내세우는 인물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당시 서구에서 들어 온 서적은 거의 다 탐독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백성을 자신만큼 생각하는 정약용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외에도 탐구가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그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강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정조의 굳은 의지와, 애민사랑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화성은 정부와 행정, 그리고 학자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을 한 당대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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