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400년이 되어가는 역사를 간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입구에 서 있다. 이 나무는 여름이면 마을 주민들이 논, 밭일을 할 때 잠시 동안이라도 쉬라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이 나무가 누군가가 속빈 곳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도 수술을 거쳐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금산길 42(대안리)에서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279원성 대안리 느티나무이다. 말이 수령이 400년 가까이라고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역사를 다 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마을의 주민들이 10대가 넘게 바뀌는 것을 보아 온 느티나무, 어찌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겉모양으로 만도 압도당해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목(亭子木)으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대안천을 따라 난 도로를 대안리 방향으로 따라가다가 보면 대안교가 나온다. 다안교를 지나기 전이나 대안교를 지나 우측으로 길을 잡아 들어가면 좌측 마을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쉽게 구별이 갈만큼 거대목이다. 높이가 24m 정도나 되니 원거리에서도 눈에 잘 띤다.

 

 

이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는 나이가 40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24m, 가슴높이의 둘레가 8.1m, 근원부의 둘레 10.11m, 가지 밑의 높이가 1.7m이고, 수관 폭은 동-26.4m, -21.3m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 옆에 서 있는 정자목으로 마을에서 위하고 있는 나무이다.

 

누군가 이 느티나무에 불을 질렀다고?

 

대안리 느티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튼튼하게 보인다. 수세도 건전하고 수형도 실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상에서 6m 정도 올라간 부위의 밑 부분이 썩어 들어가서 밑 부분까지 공동(空洞)이 생겼다. 그 뿐만 아니라 누군가 이 비어있는 부분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불에 타 탄화된 부분을 1993년 수술을 하였다.

 

 

다행히 수술을 한 후에 수세가 좋아지긴 했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 노여움이 인다. 수백 년을 한 자리에 서서 마을의 온갖 역사를 다 보고 있었을 느티나무 한 그루. 숱한 비바람과 태풍, 추위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나무들이다. 이런 천연기념물을 해치려고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국의 천연기념물을 돌아보면, 생각 밖으로 피해를 당한 나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딘가의 소나무는 땅 주인이 농약을 쳐서 죽이려고도 했고, 수령 500년이 넘은 소나무는 갑자기 이유 없는 고사를 하기도 했다. 고사를 한 나무가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이런 답답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 우리가 꼭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천연기념물이다.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면, 더 이상은 이 나무가 아픔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더 많은 세월을 우리 자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이곳이 어디라고 하면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주 거돈사지라고 한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아! 그곳'하고 알 수도 있다. 부론면 소재지에서 정산리로 가는 고갯길은 넓지가 않다. 가다가 큰 차라도 만나면 비탈 옆으로 바짝 차를 붙여야만 할 때도 있다. 어제부터 내린 눈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다행히 명절 때라 고향으로 찾아올 사람들 때문에 도로에 눈은 말끔히 치워졌다.

 

석장승 2기가 길 가에 서 있어

 

삼거리에서 정산1리를 지나 2리로 들어가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우측에 석장승 2기가 마주하고 서 있다. 장승은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게 자리를 잡지만, 정산 2리의 석장승은 길가 우측에 마주하고 있다. 길에서 보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지하여장군이고, 길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천하대장군이다.

 

 

이 석장승의 옆에는 각각 솟대를 세워놓았다. 천하대장군은 사모를 쓰고 눈과 코는 돋을새김을 하였다. 그리고 이빨을 큼지막하게 선각으로 처리를 하였다. 복판에는 네모나게 자리를 내고 천하대장군이라 한문으로 썼으며, 허리 부분을 금줄로 묶어 지하여장군과 연결해 놓았다. 지난해 친 금줄은 낡고 색이 변했지만, 이 마을이 장승제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하여장군은 비녀를 꽂은 형상이다. 그리고 눈과 코 이빨은 천하대장군과 다름이 없다. 복판에는 지하여장군이라 한문으로 음각을 하고, 허리에 금줄을 묶어 천하대장군과 연결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줄은 각 장승과 함께 있는 솟대에 연결을 했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아 두르는데, 한번 두른 금줄은 다음 해에 새로운 제를 지낼 때까지 그대로 놓아둔다.

 

천하대장군인 숫장승은 귀가 크고 눈과 코를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하여장군은 비녀를 지른 형태로 조형을 하였다.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솟대는 위에 기러기를 올린다. 기러기는 멀리 날 수가 있다고 하여. 멀리서 오는 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거돈사지 앞에도 장승이

 

정산2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정산 3리가 된다. 이곳에는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가 있다. 신라 때에 창건된 거돈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거돈사를 들어가기 전 우측에 폐교가 된 학교가 있다. 그 담장 밑에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여러 기가 서 있었다. 눈길을 달려 온 것도 기축년을 보내고 경신년을 새롭게 맞는 날에, 묵은 것을 장승에 빌어 다 털어버릴 생각에서다. 그리고 눈이 쌓인 목장승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한 5 ~ 6년 전인가 이곳 거돈사지를 찾았을 때 만났던 목장승군. 아마 7 ~ 8기나 되어 보이는 목장승들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돌무지 위에 서 있었다. 그 목장승군이 그렇게 정겨워보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가니 목장승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 대신 정산 2리의 석장승과 같은 장승이 이곳에도 마주하고 서 있다.

 

매년 해를 거르지 않고 제를 지내는 정산리. 그런데 왜 목장승을 없애고 석장승으로 대체를 한 것일까? 물론 목장승은 매년 새로 깎아서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서 바꾼 것일까?

 

정산3리 거돈사지 앞에는 이런 목장승이 서 있었다.

 목장승을 대체한 정산 3리의 석장승

천하대장군. 밑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얹었다.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정산 3리의 장승은 색다르다. 먼저 기단인 네모난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세웠다. 천하대장군은 폐교 담장 쪽에 서 있고, 지하여정군은 길 쪽으로 서 있다. 이곳도 두 장승이 마주하게 놓았는데, 지하여장군은 길을 등지고 서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정산 2리의 장승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 장승들을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솟대가 나무를 깎아 대를 세우고 그 위에 기러기를 올린 것이 아니고, 장승의 머리 위에 크게 기러기를 깎아 올려놓았다. 천하대장군의 머리 위에는 검은 색 기러기를, 지하여장군의 머리 위에는 붉은색 기러기를 올려놓았다. 허리춤 밑으로 묶은 금줄도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몇 년만에 찾아온 정산리. 바쁘게 달려와 목장승 머리에 쌓인 눈을 보고 싶었는데, 그 대신 이렇게 돌로 깎아 색다르게 변한 장승을 보게 되다니.

 

천하대장군의 머리 위에는 검은 기러기를 올렸다

지하여장군의 위에는 빨강 기러기를 올려 놓았다.

 

그러나 그런 형태를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장승을 세우고 정성을 드리는 것은, 모두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함이다. 이곳 정산리의 주민들과,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모두 평안한 경인년이 되기를 바란다. 눈이 쌓인 곳에 발을 묻고 있는 장승들. 그 차디찬 석장승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계사년에는 좋은 일만 생기려나.

험상궂은 괴수의 얼굴을 하고, 머리의 양 옆 귀 뒤에는 물고기 지느러미와 같은 형상을 한 용머리. 그리고 몸은 거북의 몸체에, 발톱은 용의 발톱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는 보물 제78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 이 탑비는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소재 사적 제168호 거돈사 터에 자리하고 있다.

 

거돈사지를 찾아가면 우측 한편에 서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의 고승인 원공국사(930 ~ 1018)의 행적을 적은 탑비이다. 비문은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라는 김거웅이 써서, 현종 16년인 1025년에 세웠다.

 

왕사를 지낸 원공국사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속성은 전주 이씨인데, 자는 신칙이다.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8세의 어린나이에 동진출가를 하여,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홍범삼장에게 출가하였다. 광종 6년인 955년에는 오월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광종 21년인 970년에 15년 만에 귀국하여 대선사, 왕사가 되었다.

 

 용머리에 거북이 몸을 갖고 있는 탑비의 받침돌

 비문에는 원공국사의 일대기가 적혀있다. 최충이 글을 지었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현종 3년인 1012년에 왕사가 된 원공국사는, 1016년 병을 얻어 현종 9년인 1018년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입적하였다. 이러한 원공국사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이 비는 형식적으로는 신라비의 형태를 취했으나, 세부적인 기법이나 고려초기의 비 받침에서 나타나는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조각 솜씨에 절로 감탄이

 

받침돌 위에 네모난 돌을 올려 비를 받치고 있다.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시대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연곷문양과 만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문을 적은 비의 몸돌이 받침이나 머릿돌보다 적다.

 

한 겨울에 찾아간 거돈사지. 눈이 쌓인 빈 절터에는 탑비와 반대편에 석탑 1기,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석조물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원공국사승묘탑비이다. 받침돌인 거북의 잔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 안에 '만(卍)'자와 연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눈이 쌓인 거북의 뒤편도 눈을 치워놓고 보니, 육각형 안에 똑같이 만자와 연꽃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비몸은 머릿돌인 이수와 받침에 비해 작은 편이다. 거북의 몸에는 사각형의 편편한 돌을 얹어 비 받침을 장식했는데,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 때의 탑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새겨 넣었다. 탑비는 전체적으로 높이가 499.7cm, 폭은 비신의 폭이 123.8cm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탑비이다.

 

비의 머릿돌에는 구름위에 요동치는 두 마리의 용이 가운데 놓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밑 부분에도 꽃잎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머릿돌의 뒤편 역시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머릿돌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반대로 하고, 뛰쳐나갈 듯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있다. 아래편 비 받침의 용머리가 전설 속의 괴수와 같은 모습이라면, 머릿돌에 조각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머릿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보주를 자기 위해 다투고 있는 형상이다.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탑비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 탑비의 머릿돌인 이수를 옮기려고 수 십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어 움직이려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머릿돌을 움직여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근처 농가에 가서 소 한 마리를 빌려와 끌어보았더니, 바로 움직였다고 한다.

 

머릿돌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뜻일까? 탑의 주위를 돌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정말 답답하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전설 하나로,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눈밭에서 서성이다니. 오후의 햇살이 흰 눈에 반사가 되어, 눈이 부시다. 저녁 햇살을 받은 탑비의 용머리가 더욱 괴이하다. 또 몇 날인가 이 해답을 얻기 위해 골이 아플 듯하다.

부원군에서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그 뒤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영욕의 세월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딸이 왕후가 되어 부원군이라는 칭호를 듣던 김제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자는 공언이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로 뽑히자, 연흥부원군으로 책봉이 되었다.

 

‘역사는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헛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역사가 사람을 만든 주인공을 만날 수가 있는 곳이 있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2차선 도로 길가 안쪽에 있는 신도비는, 그러한 슬픈 역사의 주인공을 말하고 있다.

  

슬픈 역사의 주인공 김제남

 

원주 법흥사지로 들어가는 길목 오른편에는 높이 35m에 둘레 6m, 수령 500년인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쓸쓸히 서 있는 신도비 1기가 자리를 한다. 현재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된 김제남의 신도비다.

 

 

신도비란 묘역에 세우는 일종의 비석이다. 그러나 아무나 신도비를 세울 수는 없다. 임금이나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야만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대개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이 신도비는 그 품계가 아니라고 해도, 저명한 공신이나 유학자의 경우에는 왕명에 의해서 세우기도 했다.

 

역사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이라 했던가. 1602년 연흥부원군으로 책봉이 되고, 광해군 5년인 1613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1616년에는 인목왕후의 폐모론이 일자,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 죽은 후에 큰 죄가 드러났을 때 처하는 극형으로, 무덤에서 관을 꺼내어 시신을 참수하는 것으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형벌이 아니던가. 그리고 ‘인간만세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1623년, 인조반정 으로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으며 영의정으로 추증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리를 뒤로 돌린 귀두, 세상이 보기 싫었을까?

 

김제남의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비를 바라보듯 뒤를 향하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가득 새겨 있다. 많은 신도비를 보았으나, 거북의 머리가 비문를 바라보듯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는 것은 보질 못했다.

 

그런데 왜 이 신도비의 거북이는 머리를 돌리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 우리 후대들에게 주는 교훈인지 모르겠다. 즉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지 말고, 지나온 어려움의 발자취를 돌아보라는 뜻인가 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영화를 고개를 돌리고,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닐까?

 

이 신도비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신도비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 너무나도 이 시대에 걸 맞는 듯도 하다. 2차선 도로 길 건너에 있는 사당인 의민사는 1923년 세워졌으나,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소실이 되었다. 현재의 사우는 196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김제남의 신도비가 주는 역사의 교훈, 우리는 그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송도 명기인 명월이 황진이가 벽계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이다. 세월은 덧없는 것이라. 황진이의 시는 전하지만, 벽계수는 대체 어떤 이유로 첩첩산중 찾는 이 없는 외로운 곳에 유택을 마련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곳을 다녀온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문막에서 원주로 가는 도로 우측 편에 보면 ‘동화사’라는 이정표와 함께, 벽계수 이종숙 묘역이라는 입간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큰 돌 하나를 세워 세종대왕의 증손인 벽계도정 후손묘원이라고 썼다. 양편으로 밭이 있고 임도를 따라 조금 들어가다가 보면 벽계수 묘역이 우측 산길로 400m 라는 표시가 보인다.

 

 

찾는 이 없는 벽계수를 찾아가다

 

조금은 가파르다 싶은 산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고묘가 한기 보이고, 그 앞에 벽계수묘역이 100m 전방에 있다는 표시를 본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 바로 벽계수와 부인인 해평 윤씨가 함께 잠들어 있는 유택이다. 세종대왕의 증손으로 알려진 벽계수는 왕족이다.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영해군이 태어났고, 영해군의 차남은 ‘길안도정’이다. 이 길안도정의 3남이 바로 황진이와 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뻔한 벽계도정 벽계수이다. 여기서 도정이라 함은 세자의 증손 혹은 대군의 손자나 세자의 아들 및 적증손 에게는 정3품 계자를 제수하고 도정이라고 했다. 벽계수 또한 도정이라는 품계를 제수 받았다.

 

 

 

현실과 거리가 먼 벽계수의 사랑

 

벽계수는 중종 3년인 1508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사망한 년대는 불분명하다. 품계는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휘는 종숙, 호는 현옹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싫어하며, 빗대어 쓴 시가 많이 전한다. 35세인 1542년에는 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드라마 속의 벽계수를 기억한다. 황진이와 서로 사랑놀음을 하면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자신이 연모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리가 먼 것일까? 황진이는 송도 부근 성거산에 있는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그를 유혹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는 다시 서경덕을 찾아가 스스로 송도에 꺾을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화담 서경덕이요, 셋째는 바로 황진이 자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송도삼절이 생겨난 것이다.

 

벽계수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일까?

 

그러나 막상 청산리 벽계수의 주인공인 벽계수는 황진이의 그 애간장을 녹이는 시조 한수로 그만 낙마를 하고, 황진이의 마음속에서 멀어졌다. 문막읍 동화리 산 속에 있는 벽계수 이종숙의 묘, 묘지 위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있다. 앞에 석물 몇 기는 최근에 후손들이 세운 듯하다. 묘역 한편에 있는 석물을 보니, 꽤나 오래된 돌이다.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묘역은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이 배향한 방향을 보니, 이 길로 가면 송도로 가는 방향은 아닐까? 한참이나 묘역 앞에 앉아 벽계수와 황진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누군가 묘역 앞에 술병을 치우지 않고 갔다. 그럴 줄 알았으면 막걸리라도 한 통 받아올 것을. 내려오는 길에 숲속에서 나무 부딪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커다란 노루 한 마리가 산등성이를 향해 치닫는다. 아마도 벽계수의 영혼이 그리운 황진이를 찾아 뛰어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 사라진 숲만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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