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행복이란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정작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이 움켜잡으려고 눈을 벌겋게 뜨고 잡으려고만 하다가 보니,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또 없는 사람들은, 늘 안타깝게도 찌든 생활에 시달려 행복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듯하다.

 

과연 행복이란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의 행복이란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순간순간 누구나가 느낄 수가 있다. 내 남편이 승진이 돼서, 혹은 내 남편이 나에게 선물을 해서, 우리 아내가 정말 아름다워서, 혹은 자녀들이 좋은 소식이 있어서 등, 순간의 기쁨과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가 있다.

 

산행 후 찾아간 지인의 시골 집

 

가끔 여주를 간다. 좋아하는 아우부부가 사는 이집은 정말로 찾아가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시간까지 행복하다. 하지만 꼭 이집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지난주에 3일간 산행을 했다. 여기저기 몇 곳을 돌아다녔다. 남들처럼 등산을 간 것이 아니다. 주변에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이다.  

 

 

지난 목요일(530) 길을 떠나기 전 3일간 비가 내렸다. 숲으로 들어가니 땀이 비 오듯 한다.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미끄럽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짚거나 힘의 안배를 못하면, 그저 미끄러져 어디가 까지기 일쑤이다. 그런 날 산을 오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럴게 묻는다. “돈도 안 되는 짓을 왜 그렇게 힘들여 가면서 하느냐?”. 하지만 빈말이라도 사람들과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산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산을 오르내리며 채취한 산더덕 등을 가져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

 

그리고 61() 수원에서 두 곳을 돌며 일을 마친 후, 세 사람이 다시 길을 나섰다. 요즈음 주말마다 함께 산에 올라 땀을 내는 수원시의 팀장 한 사람과, 용인시 원삼이 고향이라는 또 다른 팀장이다. 그곳을 가서 산을 두 곳이나 옮겨가면서 산을 뒤졌지만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하기야 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갖고 올 수 있다면, 그것은 전문적인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행복한 밥상을 받았다.

 

1일 오후에 출발을 했기 때문에, 원삼 길을 안내해 준 지인이 알려주는 산을 세 시간 이상 돌아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 지인이 그곳 고향마을에 형님들이 살고 계시다고 한다. 6형제 중에 막내인 지인은 주말이면 이곳을 내려와 형님들을 돕기도 한다고. 그 집으로 가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니, 마늘 쫑을 따러가잔다.

 

 

마늘이 쫑이 나올 때 따주어야 마늘이 실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을 나가니 마늘이며 양파, 감자 등을 심어 놓은 밭에는,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 내외가 열심히 마늘 쫑을 따고 계셨다.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해 보지만, 농사일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하면서 잠시 하던 일을 마치고, 지인의 셋째 형님네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에 둘째 형님은 면으로 나가 돼지고기를 사오시기도. 집 앞 마당에는 금방 상이 차려졌다.

 

이 반찬들은 모두 셋째 형님 내외분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것입니다. 장에 나가 사온 것은 하나도 없어요. 향수님께서 직접 다 반찬을 준비하신 것이죠.”

 

지인이 직접 텃밭에서 따온 상추까지 푸짐하게 한 상 차려졌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면에 나가 사온 돼지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면 익어가고 있고.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반찬들이 좋다. 고소한 쌈이 좋다. 표고버섯을 잘라 넣고 끓인 된장찌개가 일품이다. 어떻게 한 그릇을 먹었는지 모른다. 가장 행복한 밥상을 받은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밭에서 캐온 양파와 마늘 쫑까지 자루에 넣어 주신다. 땀을 흘리며 지은 농산물이라 그냥 받아오기가 죄스럽다. 하지만 나눌 줄을 아시는 이분들은, 이것저것 더 가져가라고 하신다. 이분들이 정말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나눔의 행복이 모든 사람들이 느꼈으면 한다. 대가없는 나눔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열반을 하실 때의 모습이라는 와불(臥佛)을 모신 절들은, 대한불교열반종에 속해 있는 절들이 많다. 현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마지막으로 설법을 하신 대반열반경의 경전을 연구하는 불교의 종단인 열반종의 사찰은, 전국에 85개 정도의 절이 속해 있다.

 

대한불교열반종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고구려시대(서기 623~650년경)에 보덕화상이 창종한 종단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에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경흥대사, 대현대사께서도 대한불교 열반종의 종조인 보덕화상에게 수학한바 있다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종단으로 알려져 있다.

 

 

 

구산선문 중에도 끼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는 5개의 종단이 있었는데, 보덕선사의 열반종, 자장율사의 율종, 원효대사의 법성종, 의상대사의 화엄종, 진표율사의 법상종 등 5개의 종단이 있었다. 그 후 9개의 산에서 참선을 하는 스님이 있었으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하였는데, 고려시대에 와서 대각국사께서 천태종을 창종하고, 보우대사가 조계종을 창종하였다.

 

조선조시대에 들어와서 태종에 의하여 7개의 종단으로 축소되었으나 열반종은 지속되었다. 세종 때에는 종단의 이름을 모두 없애도록 하여, 종단 이름이 없는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칭하였다. 현재 전국에는 고구려시대부터 창건된 수많은 열반종의 사찰이 있으며, 백제시대 창건한 열반종의 총본산인 경복사가 복원불사를 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1962214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창종되었으며, 1970년에 한국불교 태고종과 그 후 여러 종단의 창종으로 이어졌다. 1970년 대한불교열반종은 중흥한 이후 총본산 와우정사의 창건불사를 하였으며 현재 전국에 열반종사찰에서는 포교와 청정하게 수행정진을 하고 있다.

 

열반종의 총본산인 와우정사를 찾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 산43에 자리하고 있는 와우정사. 512() 찾아간 와우정사의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들로 인해 북적이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깝고, 더욱 휴일을 맞아 많은 불자들과 관광객들이 와우정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와우정사는 입구에 조형한 커다란 석단 위에 올려놓은 불두(佛頭)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남북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국내유일의 사찰로 통일의 등불이 되고자, 김해근 삼장법사께서 창건불사를 봉행 중에 있는 와우정사는, 용인의 연화산(해발 304m)에 자리하고 있다. 와우정사에는 신라의 호국가람인 황룡사의 종과 같이 조성된, 국내최대의 황금범종인 <통일의 종>, 화랑도가 추구한 미륵보살을 청동으로 조성한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이 있다.

 

그러나 와우정사라는 사찰 명을 갖게 한 것은, 인도네시아 산 통 향나무를 붙이지 않고 다듬어 조각한, 해탈의 부처님인 <누워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와불>, 황동 8만근으로 10년 세월동안 조성된 <장육존상5존불>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와우정사에는 스리랑카의 고승일행이 직접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와우정사의 여기저기 둘러보지만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절집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은 돌로 쌓은 탑이 많다는 것도 그렇지만, 나무에 걸린 등이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반가사유상 뒤편으로 조형이 된 꽃밭도 아름답지만, 한 곳 한 곳 놓치고 싶은 부분이 없다.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열반상이 모셔진 곳으로 가 잠시 고개를 숙인다. 복잡한 곳을 워낙 싫어하다가 보니. 아무래도 초파일날은 가까운 작은 절집에나 들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따라 누워계신 부처님의 상이, 더욱 편안하게 다가온다.

20047월 경전철 사업계획을 확정한 용인시는, 민간투자사업(BTO) 방식으로 132억 원이라는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경전철을 건설했다. 당초 하루에 16만 명이 탑승할 것이란 예측과는 달리, 2011년 경기개발연구원 조사에선 하루에 32천명이 이용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계획 수립 당시 수요예측치가 과다계산으로 부풀려진 것이다.

 

용인시는 향후 30년간 25천억 원이라는 막재한 자원을 ()용인경전철에 물어줘야 할 것으로 예측되자, 국제소송 끝에 협약을 변경했다. 운영비와 인건비 등으로 연간 295억 원을 분기별로 나눠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전철 건설에 따른 지방채 발행액 5159억원을 2015년까지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이래저래 세금낭비 논란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용인 경전철은 당초 20107월 완공과 동시에 개통할 예정이었으나, 용인시와 운영사인 용인경전철이 최소수입보장비율(MRG)을 놓고 법정다툼을 벌이면서 210개월간을 끌어왔다. 이렇게 탈이 많던 용인 경전철이 마침내 426일 오후 2시 용인시 문화복지행정타운 광장 무대에서,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참석을 한 가운데 개통식을 가졌다.

 

친환경 교통수단인 경전철

 

용인 경전철은 기흥구 구갈동 기흥역에서 동백지구를 지나 처인구 포곡읍 전대에버랜드역까지 달리는 친환경 교통수단이다. 이 경전철은 용인시의 교통수요와 동서 균형발전을 위해 중요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용인경전철 에버라인 전구간은 총 15개 역사가 있으며, 기점인 기흥역에서 종점인 전대에버랜드역까지 18.143km 구간을 약 30여분간이 소요된다.

 

 

용인경전철 이용요금은 교통카드(신용카드 포함) 사용시, 성인은 1300(10km)이며, 청소년 1040, 어린이는 650원이며 1회용 승차권(토큰) 사용시 성인 및 청소년은 1400(10km)이며, 어린이는 700원이다. 장애인과 국가유공자는 무료이다.

 

경전철은 오전 530분에 첫 출발해 오후 12시까지 총 18시간 30분을 운행한다. 왕복 운행시간은 60분이며, 전대·에버랜드 역 방향, 기흥역 방향 막차는 각각 오후 1130분이다. 역 정차시간은 30(기흥역 95)로 평일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출근시간대 배차간격은 3(주말 및 공휴일은 6)이며 오전 5307(평일, 주말, 공휴일 10), 오전 9오후 5(평일, 주말, 공휴일 6), 오후 58(평일 5분 주말 및 공휴일 6), 오후 810(평일 주말, 공휴일 6), 오후 1012(평일, 주말, 공휴일 10) 등으로 나눠 운행한다.

 

 

주요역 연계 용인시티투어 기차여행코스개발

 

용인시는 경전철 운행을 시작으로 다양한 체험과 테마별 관광지를 연계한 기차여행 관광상품을 개발, 전통문화 유적지와 관광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원스톱 서비스로 편의를 제공할 방침이다.

 

전국 희망자를 대상으로 ()블루스카이시티투어(031-292-3118, 295-3117)를 통해 예약을 통해 신청 받는다. 시티투어 경전철체험 테마코스는 기흥역시청·용인대역(시청탐방 여행코스) 기흥역운동장·송담대역(재래시장 기차여행 코스)으로 나눠 운영할 계획이다.

가을이 무척 좋아서

밝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강에 비추어 물결이 움직이고

메뿌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터럭이 희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용인시 기흥읍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고택의 담 밖에 세운 문학비에 적힌 시다. <추월(秋月)>이라는 이 시는 민족문화추진위원 이필구 역으로 적혀있다. 음애 이자(李자)는 성종 11년인 1480년에 출생하여,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자는 정치가며 도학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5대손으로,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이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홀연히 관직을 사직하고 초야에 묻혔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 우승지,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판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정치개혁에 선봉에 섰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낙향한 이자는 음성, 충주, 용인 등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용인 지곡리에는 고택과 유택이 있고, 조광조 등과 함께 노후를 생각해 지은 사은정이 있다.

 

음애 이자의 시문은 3656편이라는 대단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며, 현재는 120여 편의 시문이 실린 음애집이 남아있다. 1533년 54세로 운명하니, 중종은 이자를 관직에 복위시키고, 1577년 선조 시에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팔각형의 기둥이 있는 사랑채

 

이자 고택은 부와산을 마주하는 낮은 야산을 뒤로하고 동향으로 앉아 있다. 처음의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부엌으로 연결이 되어 ㄷ자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자형의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튼 ㅁ자 형의 집이었던 것이 지금은 행랑채는 없어지고, ㄷ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좌측 남서쪽 모서리에 마루로 놓은 신주를 모시는 청방을 두었다. 이 방이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이 아닌 것은 창호에서 나타난다.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의 경우 정면과 측면을 모두 창호로 내는데 비해, 이자 고택의 마루방 측면의 문은 판자문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방이 사당 역할을 하는 청방임을 알 수 있다. 과거 집의 규모가 크지 않은 중류 주택에서는 사당을 별도로 짓지 않고, 사랑채나 안채에 일부를 사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돌출이 된 청방의 옆으로는 두 칸 사랑방이 있다. 이 사랑방은 두 칸으로 넓게 트여 있으며, 청방과 사랑방의 사이는 전체를 문으로 해달았다. 사랑채의 우측 맨 끝에는 부엌을 들였는데, 위는 다락방이다. 그리고 사랑방의 우측 끝에는 문을 달아 높은 다락을 만들었다. 이 다락은 사랑방 앞에 놓은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이 기능하다. 이자 고택의 사랑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랑방 전면에 있는 기둥이다. 네모기둥의 모서리를 긁어 팔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이런 팔각기둥은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자 고택만이 갖고 있는 멋이다.

 

간결한 안채의 꾸밈이 돋보여

 

이자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공간을 별도로 했으며, 이어지는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고 한 칸 건넌방이 있다. 이어서 두 칸의 대청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다시 두 칸의 부엌을 두었다. 한 칸의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을 했다.

 

 

안방은 길게 두 칸으로 만들었으며, 부엌 위 한 칸은 다락을 꾸몄다. 그런데 그 다락을 올려다보면 굽은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굽은 목재를 이용했다는 것은, 집을 지은 목수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이자 고택은 치목 수법이 뛰어나며, 평면과 입면의 짜임새가 도드라진다. 조선조 후기 경기도 지역 중류주택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안채 대청의 뒤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툇마루가 또한 일품이다. 길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두터운 통나무를 그대로 툇마루로 이용을 하였다. 그 옆에 연도를 놓아 올린 굴뚝도 낮게 만들어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이자 고택을 돌면 주춧돌에 눈길이 간다. 다듬지 않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집안의 주추를 놓았는데, 그러한 흐트러짐이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 다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이라니.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이런 데 있다.

 

 

이자 고택의 안채 부엌에는 아궁이 옆에 광을 두고 있다. 이렇게 아궁이 곁에 광을 둔 것도 이자 고택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집안의 여인들이 생활을 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졌다. 안채의 부엌과 사랑채의 부엌 사이에 놓인 우물을 보아도, 이 가옥이 여인네들의 동선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나타난다. 

 

흰 눈이 녹지 않아 설원으로 변한 이자고택.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자 고택은 운치가 있다. 눈을 밟고 집안 구서구석을 돌아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크지 않으면서도 멋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짜임새가 돋보인다. 대문으로 사용하는 일각문을 나서면 담장 모서리 위에 올린 기와가 눈길을 끈다. 눈이 덮인 담장의 기와는 모두 감추어졌는데, 한 장의 기와가 밖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그 또한 아름다움이라. 이자 고택이 주는 즐거움이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4 - 4에 소재한 이주국 장군 고택. 집안을 돌아보면 안채에 붙은 부엌과 광을 손본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민속자료를 넘을 그런 집이다. 꾸밈도 그렇고 집안의 조경 수법이나 채의 구성, 공간의 사용 등이 매우 뛰어난 집이다. 더욱 사랑채 하나만 놓고 본다면, 얼마나 고쳤는지는 몰라도 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753년에 지어진 이주국 장군 고택

 

이주국 장군은 조선 영조와 정조 때의 무신이다. 이주국(1721∼1798) 장군은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조선조 경종 1년인 1721년에 원삼면 문촌리 현재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원삼면 문촌리에 전하는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 터 등이 전한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장군의 후손들이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정병하씨 소유의 가옥이다.

 

 

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가 -자로 길게 늘어섰다. 대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는 바로 꺾인 담장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 칸의 사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안채의 마당이 있다. 이런 집의 형태를 볼 때 과거에는 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안담이 있고, 중문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안채는 좌측으로 퇴를 달아낸 건넌방과 세 칸의 대청, 안방 그리고 꺾인 날개채에 부엌과 광을 두었다. 현재는 날개채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부엌은 부엌방으로 개조를 하고, 맨 끝에 광도 방으로 개조를 하였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안채의 망와(望瓦)에서 '건륭 18년 계유일 조작(乾隆十八年癸酉日 造作)'이란 글씨가 발견이 되어 영조 29년인 1753년에 최초로 건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다락방이 정말 좋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는 - 자형 네 칸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앞에서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청방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은 방과 마루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좌측의 맨 끝은 다락방과 부엌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방문은 모두가 이중의 겹문으로 되어있다. 안쪽의 문은 모두 범살창으로 구성이 되어 단조롭다.

 

사랑채는 청방을 전체적으로 놓고, 가운데 두 칸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툇마루가 끝나는 곳에 한 칸의 다락방이 있다. 이 다락방으로 올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툇마루에 접한 부분은 간단한 문이지만, 양편의 창문은 모두 띠살문 네 짝으로 달았다. 이렇게 띠살문을 달아 열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 다락방을 사랑채의 주인이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양편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문. 이 다락방이 누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정말 작지만 아름다운 누정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만한 공간이다.

 

사랑채의 다락방 밑으로는 개방된 아궁이가 있고, 그 위는 다락이다. 그런데 이 아궁이 역시 특이하다. 한편 다락방의 밑이 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짜임새 있게 제 각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네 칸으로 꾸며진 사랑채. 앞쪽 끝의 다락방은 양편을 띠살문으로 했다. 정자의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문은 겹문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문은 범살창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아궁이 다락방 뒤에 다락을 두고, 그 밑을 개방된 아궁이를 조성했다. 다락방 밑은 광이다.

 

날개 잃은 공(工)자 형의 안채

 

안채는 ㄱ 자형의 집이다. 전체적으로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세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안방과 꺾인 부분에 두 칸의 부엌과 광을 들였다. 현재는 부엌과 광은 개조를 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특이함은 바로 이 안채의 구성에 있다. 건넌방의 앞으로는 반 칸의 퇴를 냈다. 높은 마루를 깔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 문 위에 편액이 걸려있어 다가가 보니 '사당방(祠堂房)'이란 글을 적었다. 안채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을 달아내어 사당으로 꾸민 것이다. 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묵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주국 장군의 후손들이 떠나고, 현재의 주인이 이 사당도 묵는 방으로 사용한 듯하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공(工)'자의 한 날개가 잘린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기단이 모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마감을 했다. 건물의 주춧돌도 마름모형의 다듬은 돌이다. 이런 기단이나 주추로 보아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지을 때,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문채와 사랑채는 손을 보았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높게 한 중문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반칸을 달아내어 높은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드렸다.

 
안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칸을 달아낸 방이 있다. 방문 위에는 사당방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세칸의 넓은 대청. 기단이나 툇돌, 주춧돌 등이 모두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메주가 익어가는 집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돌다가 안채의 건넌방 옆으로 돌아가니, 벽 앞에 메주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만난 할머니에게 '집을 좀 찍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청소를 잘 안 해. 시골집은 다 그렇지 머'라고 하셨는데, 이런 메주를 보니 정말 시골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무에 걸린 메주들을 보면서, 고택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정감이 가는 집들이 우리 가옥인데, 우리는 점차 생활의 불편함만 늘어놓으면서 멀리 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너무나 시골스러운 모습이다. 건넌방 옆에 메주를 달아 놓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