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이 속리산에서 나뉘어져 서진하여 금북정맥을 만들고,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힘을 모아 일으킨 산이 바로 태조산이라고 한다. 고려 건국 이전에는 이곳을 동, 서 도솔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서기 930년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의 진산인 이곳 태조산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고, 용 다섯 마리가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는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地勢)’임을 알았다.

 

왕건은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판단하고 천안에 천안도독부를 두어, 민호와 군사를 상주케 함으로써 천안과 태조산의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을 위해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하고 머물렀던 곳이라 전해오고 있다. 태조산은 남쪽으로는 취암산, 북으로는 국사봉이 서 있으며, 일봉산과 월봉산은 해와 달로써 한복판에 남산을 놓고 다섯 용이 여의주를 갖고 서로 차지하려는 명당이라고 한다,

 

 

천안 12경 중 제6경 태조산 각원사

 

천안시에는 모두 12경이 정해져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절경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천안 12경이다. 1경은 천안삼거리, 2경 독립기념관, 3경 유관순 열사 사적지, 4경 아라리오 광장, 5경 병천 순대거리, 그리고 제6경이 바로 태조산 각원사로 정해져 있다.

 

천안시 명소 제6경인 태조산 각원사는 1977년 경해 법인스님에 의해 통일기원도량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태조산 각원사는 모든 건물이 웅장하다.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인 대웅보전이 건평 200, 관음전 건평 140, 경해원 100, 영산전 300, 개산 기념관 120평 등이다.

 

 

꿈에 나타난 청동아미타좌불상

 

천불전, 종루인 태조산루는 2층 루각 329평 성종 20톤으로 마련하였고, 이 외에도 설법전, 칠성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갖추어진 대사찰이다. 또한 각원사는 통일기원대불로 조성된 청동아미타좌불상으로 유명하다. 전체 높이가 14.5m이며 둘레 30m로 사용된 청동만 60톤에 달한다.

 

불상을 조성할 때 장인의 꿈에 아미타불이 나타나 "팔이 아프니 오른 손을 들게 해 달라"는 당부가 있어, 문헌을 찾아보니 아미타불은 오른 손을 드는 것이 옳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대로 조성했다고 한다.

 

 

홍익대 최기원 교수가 조각하기 시작해 2년여의 세월, 197757일 태조산 연화봉에 남북통일기원대불을 모셨다. 높이 15m, 둘레 30m, 직경(무릎과 무릎 사이 거리) 10m, 귀 길이 1.75m, 무게 청동 60톤을 자랑하는 거불이 마침내 탄생됐다. 원을 세운지 27년 만에, 사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불이 봉안된 이후 법인스님과 대원스님은 불사에 더욱 박차를 가해, 197711월엔 입구에서 대불로 통하는 산비탈에 무량공덕 계단이라는 203계단을 조성했다. 참배객들을 위해서였다. 다음해 36평의 설법전을 대불 옆에 세웠다. 참배객이 쉬면서 대불 불사의 개요를 들을 수 있도록 마련을 했다고 한다.

 

 

태조산에 자리하고 있는 각원사. 일반 절의 크기로는 가늠이 되지 않은 청동대불. 그 앞에 서서 한 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 청동대불로 인해 남북통일의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서편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일몰의 햇볕을 받아 길게 그림자를 끌며 서 있는 큼지막한 전각들이 왠지 피안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절은 왜 그토록 산을 올라 지어야할까? 높은 산에 있는 절을 찾아 산으로 오르면서, 늘 의문을 갖는다. 딱히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수도에 전념하고자 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천안시 안서동에 자리한 성불사. 고려 초기에 도선국사에 의해서 세워진 절이라고 한다.

성불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도선국사에게 명하여 전국에 사찰을 세우도록 했는데, 그 때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이 때 도선국사가 이 자리에 와보니 백학 세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바위를 쪼아 불상을 제작하고 있다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미처 불상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날아가 버렸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라 했다가, 후에 몇 번 중수를 거치면서 ‘성불사(成佛寺)’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 속의 성불사 마애불상군. 세 마리의 백학이 만들다가 날아가 버려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작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군

산비탈에 절을 조성한 성불사. 차로 오르면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대웅전을 찾아 오르다가 보면, 돌을 이용해 축대를 쌓은 것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높게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마련하였다. 산비탈을 이용해 터를 잡은 성불사는 여느 절집들처럼 웅장하지가 않다. 그저 작은 전각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대웅전을 바라보니 삼존불을 모셨는데, 중간에 부처님이 보이지를 않는다. 법당 안에서는 신도들이 무슨 큰 잔치라도 있는지, 기물을 닦느라 부산하다. 들어가 볼 수도 없어 밖에서 보니, 대웅전 뒷면이 유리벽으로 되어있다. 뒤로 돌아가 본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인 대웅전 뒤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다.



산 비탈에 축대를 쌓고 전각을 마련한 성불사(위) 대웅전(가운데) 가운데 석가모니불의 자리가 비어있다(아래)

그런데 그 바위에는 무엇인가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완성되지 못한 채 있는 마애불상군. 아마 도선국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 세 마리의 백학이 바위를 쪼아 만들던 그 마애불상인가 보다. 바위 양편을 갈라 대웅전 뒤편에는 불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겼고, 그 옆으로는 삼존불과 16나한상을 새겨 넣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내용 그대로인 마애불상군

세 마리의 백학이 절벽을 쪼아 불상을 제작했다는 성불사.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정밀로 놀랍다. 그냥 전해지던 전설이 아니었을까? 대웅전 뒤편 바위면에는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입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그러나 그 형태가 불입상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 부리로 쪼아 이 불상을 만들다가 그냥 놓아둔 채 날아가 버린 듯하다.



대웅전 뒤편에 있는 바위에 조각이 되어있는 마애불상군 

그 옆의 우측 절단면에는 삼존불을 비롯한 16 나한상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이렇게 새겨진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마애불상군은 전설 그대로이다. 채 완성을 하지 못한 마애불상군. 그리고 돌출이 되어있는 불입상의 형태 등이 그렇다.

삼존불은 연화대에 좌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와 좌우에 협시보살 입상이 새겨 넣었다.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연화대와 좌정을 한 석가모니불은 그 윤곽이 뚜렷하다. 그리고 좌우에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아직은 완성을 하지 못한 채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위 면을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16나한상은 각각 그 자세가 다르게 표현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완성인 불입상(위)과 그 옆 바위면에 마련한 삼존불과 16나한상(가운데, 아래)

수도를 하는 모습,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한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을 한 16나한상은 바위 면을 파내고 부조를 하였는데, 마치 감실에 있는 듯한 형태로 꾸며놓았다. 자연스럽게 조성한 삼존불과 16나한상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마애불상군의 형태이다. 이 마애불상군은 14세기 불화에서 보여주는 도상이 남아있고, 도식화가 덜 된 점 등을 보아 14~15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옛 전설 속에 전하는 그대로 남아있는 성불사 마애불상군. 그래서 산을 오르면서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불사 대웅전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천안시가지. 비가 오는데도 찾아올라간 성불사에서, 옛 스님들이 산 위에 절을 지은 까닭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비를 맞으면 찾아 올라간 성불사에서 내려다 본 천안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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