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은 일개 지자체로서는 전통사찰이 가장 많은 곳이다.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대둔산 서남쪽 자락에 자리한 안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7년인 서기 638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이 될 사찰이다. 6·25 동란 이전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를 가진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6·25 때 불에 타버리고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부도와, 안심사 비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년고찰 대둔산 안심사

 

 

토요일이라 그런지 나들이객으로 인해 길이 막힌다. 안심사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답답하게 막히던 길이 전주 시내를 벗어나면서 시원하게 뚫렸다. 완주군 운주면은 충남 금산과 논산과 접해 있다. 운주면소재지를 지나 논산 양촌면으로 가는 지방도로에서, 좁은 마을길로 3km 이상을 대둔산을 향해 들어가다가 만나게 되는 안심사. 현재 안심사에는 대광전과 산신각, 삼성각, 요사가 있고,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나 부도 등이 있을 경우,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유리 등으로 벽을 내어 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전각이다. 안심사 계단 옆에는 대웅전을 세우기 위해 많은 돌들을 나열해 놓았다. 아마 이곳에 묻혀 있던 주초 등을 찾아낸 것인가 보다. 커다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보니, 과거 안심사의 규모를 대충은 짐작할 만하다.

 

 

 

뛰어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안심사 석조계단

 

보물 제1434호 안심사 석조계단은 부처님의 치아사리 1과와, 의습 10벌을 봉안하기 위해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반 이후 1759년 이전에 조성하였다. 안심사 석조계단은 1613년 조성된 대구 용연사의 석조계단과 친연성을 갖고 있으나, 조각수법 등은 용연사의 석조계단보다 월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심사 석조계단은 앞면과 옆면에 장대석 돌을 놓아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비슷한 크기의 돌 판을 한 줄로 얹었으며 계단 면석에는 연화문과 격자 문양을 조각하였다. 계단의 중앙에는 석종형 부도가 서 있고, 네 귀퉁이에는 장군모양의 차림새를 한 신장상을 사방에 놓았다. 이 신장상들은 신체 부위와 갑옷의 조각기술이 뛰어나다. 앞쪽으로 서 있는 양편의 신장상은 조금 크며, 뒤편의 신장상은 조금 작다.

 

 

 

석종형 부도는 높이가 176cm 정도로 아래는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부도를 올렸다. 아래편의 받침돌에도 조형을 하였다. 위편 봉우리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엷게 조각을 했다. 석조 조형물들은 그 조형 수법이 탁월하고 연화문과 격자문양의 조각수법은 장식성과 섬세함이 뛰어난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신장상들의 표정이나 갑옷 무늬 등의 수법은 능에 세워놓은 문인상이나 무인상들보다 더 세련되며,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였다.

 

눈 부라린 신장상에 반하다

 

석조계단의 네 귀퉁이에서 사로 마주하고 있는 무인모습의 신장상. 아마도 사방을 둘러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는 석종형 부도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보다. 신장상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투구를 쓰고 칼을 양손으로 잡고 있다. 칼끝은 아래로 했는데, 금방이라도 무엇을 벨 수 있을 듯하다. 툭 불거진 눈에 주먹코, 굳게 다문 입에 어깨까지 내려온 귀. 얼핏 보아도 석장승과 석불을 혼합시킨 듯한 모습이다. 그러한 신장상들의 모습은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이 앞선다.

 

 

 

갑옷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표현을 한 안심사 석조계단의 신장상. 어느 곳을 가보아도 이렇게 세밀한 조각수법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안심사 석조계단의 가치를 더 높이는가 보다. 토요일 바쁜 걸음으로 달려간 대둔산 자락 안심사에서, 또 하나의 희열을 맛본다. 불거진 눈으로 사방을 지켜내고 있는 신장상들로 인해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전주에서 순창으로 나가는 국도(면 소재지인 원기리를 통과는 도로는 옛 길이다. 지금은 마을 뒤편으로 전용도로가 생겼다)에서 구이면 소재지 방향으로 접어들면, 좌측에 있는 원두현의 마을 안쪽에 정자 하나 자리하고 있다. 원두현은 통천 김씨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마을의 형성 시기는 600년 정도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남계정. 남계 김진이 자시의 호를 따서 세운 정자이다. 남계정 마루에서 내다보면 앞으로 모악산이 지척에 보인다. ‘어머니의 산’이라는 이 모악산을 바라다보면서, 남계 김진은 어떤 생각을 라며 살았을까? 벼슬도 마다한 남계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고목과 어우러진 남계정, 운치 있어

늦은 가을 날 찾은 남계정. 계단 앞에 느티나무 고목은 이미 앞을 다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남계정 앞에 선 작은 산죽들은 푸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남계의 곧은 성격을 알려주는 듯하다. 볼품이 없다고 한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따듯한 정자이다, 남계정은 그렇게 모악을 바라다보며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다.

남계 김진은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남계정이란 작은 정자를 하나를 지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오직 아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정자는 그래서 더욱 따스함이 배어있다. 남들은 벼슬을 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벌이는데, 남계정의 주인은 초연히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이런 남계 김진이 바보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깊은 속을 아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을 듯하다. 남계 김진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다. ‘남계(南溪)’는 그의 호로 자는 ‘이온(李溫)’이며, 본관은 통천이다.

김진의 검소한 성품이 보이는 정자

김진은 조선조 중종 22년인 152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했다는 김진은 25세에 초급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여 생원이 되었다. 선조 7년인 1574년에는 합천에서 훈도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오직 학문과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이 남계정은 김진이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은 정자이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훈장을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남계정은 선조 13년인 1580년에 처음으로 지었다. 조선조 헌종 14년인 1673년과 1859년에 두 차례 중수를 하였다. 남계정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목을 비켜 서 계단을 오른다. 정자는 붉은 벽돌로 담을 둘러쌓고, 안으로 들어가는 담장에 걸린 문은 잠겨 있다. 아마 후손들이 정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잠을 통을 채운 듯하다. 정자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며, 앞쪽으로는 마루가 연결이 되어있다. 정자 안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등이 김진의 높은 덕을 기리는 글들이 걸려있다.


그저 초야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생을 받친 남계. 벼슬길도 마다하고 이곳에 들어와 생을 마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악의 정상에 걸린 구름 한 덩이가 세월의 덧없음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잎이 떨어진 고목나무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민토종축제인 ‘제11회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가, 2011년 4월 17일(일) 모악산 대원사 일원에서 열린다. 산사에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함께 시절음식인 화전을 부치며 베풀어지는 이 축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소년 축제로 자리를 잡고 있다. 화전축제에는 5만 여명이나 되는 관람객들이 참가를 하고 있기도 하다.

걸어 올라야 하는 축제장

길도 없어 주자창에서 30분 정도를 산길을 걸어 올라야 하는 화전축제. 그런데 사람들은 이 축제장을 왜 찾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참가하는 사람 누구나가 이 축제장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에는 축제장마다 식전행사로 행해지는 인사말이 없다. 그저 올라오는 대로 각자가 축제장의 주인공이 되어 즐기면 된다.



사람들은 이런 화전축제를 좋아한다. 도식적이지 않고 자유스럽다는 것이다. 굳이 인사를 할 사람들은 공연이 베풀어지는 중간에 잠시 인사를 한다. 그 인사라는 것도 거창하지가 않다. 축제를 마음껏 즐기고 가라는 인사가 모두이다.

글짓기, 그리기, 동영상 UCC, 사진촬영, 모바일 삼행시 등의 경연도 펼쳐진다. 전국에서 이 화전축제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매년 3,000명이 넘는다. 축제장은 하루 종일 온통 시끌벅적하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한편에서는 화전을 부치고, 어른들은 산사에 오르느라 탄 목을, 시원한 막걸리 한 잔으로 풀어낸다.

경내에서는 하루 종일 청소년들의 각종 공연이 펼쳐진다. 온통 박수소리가 산사를 메운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느라 골몰한다. 이제는 그런 광경을 스스럼없이 모두가 즐기고 있다.


축제를 준비하는데 지게질만 200회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 달이나 되는 기간을 지게질을 한다. 축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모두 져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 찻길이 없는 산사의 오르막길을 지게를 지고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벌써 10년을 지게질을 해서 축제를 열었다. 한 해에 200회 이상의 지게를 져야 축제를 준비할 수가 있다. 이제는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짐을 들어다 준다.

참가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축제. 이것이 바로 축제의 묘미이다. 누구나 다 이 축제장에서는 최고의 주인공이다. 그만큼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는 부담이 없다. 모든 것은 다 준비를 해놓고 있다. 그저 와서 즐기고 가면 된다. 그래서 매년 산사에서 펼쳐지는 축제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젊음과 전통이 어우러지는 축제,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의 특징은 전통과 젊음이 넘친다는 것이다. 매년 더해가는 젊음의 열기는 이제는 전국적으로 그 어떤 축제도 따라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학생 댄싱 팀들은 이제는 모악산화전축제 무대에 서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공연을 하겠다고 지원하는 댄싱 팀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11년 제11회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 이상직 제전위원장(이스타항공그룹 회장)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로 자리를 잡은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는, 젊음이 넘치는 축제이다. 이 축제에 가면 관이 주도하지 않는 축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볼 수가 있다. 순수 국민축제로 참가하는 사람들이 행사의 주축이 되는 이런 축제가, 정말로 바람직한 축제일 것이다’ 라고 한다.


올해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무슨 재미난 이야기꺼리를 축제장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기대해도 좋은 축제이기 때문이다. 4월 17일,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모악산으로 가, 젊음의 열기에 취해보자.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의외의 모습에 가끔은 놀랄 때가 생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국보나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자리한 송광사. 송광사에는 모두 네 점의 보물이 있다. 한 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지금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 중 한 곳으로 번성하였다.


십자각으로 지어진 특별한 종루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다. 흔히 종루라고 이야기하는 이 누각은 열십자로 축조를 하였다. 이층형 누각으로 지어진 이 전각은 범종이 걸려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을 덧붙였다. 지붕 역시 중앙에서 한 곳으로 모여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2월 23일,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송광사로 달려갔다. 수차례나 찾아간 송광사지만, 늘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송광사로 달려간 것은 종각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송광사에 있는 소조사천왕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물로 지정된 소조사천왕상은 일반적인 전각과 달리 문을 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십자각이 눈에 걸리는 것인지. 일몰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바쁜데도, 종각에서 발길이 멈추고 말았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 북, 운판을 각각 돌출된 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방향으로 돌출된 남은 한 칸에는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동종을 두었다.

누마루 밑의 기둥이 자연일세.

송광사 종각에서 보이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층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목조 기둥으로 마련을 한 이 기둥은 중앙 칸을 중심으로 각 면에 두 개씩의 기둥을 두고, 열십자로 빠져나온 곳마다 다시 2개씩의 기둥을 놓았다.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한 방향에는 4개씩의 기둥이 나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둥을 보다가 손바닥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보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아마도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저 종각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그 종각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이제 보니 그 기둥들이 각양각색이다.

어느 기둥은 원형으로, 또 어떤 것은 사각형으로 되었다. 밑에 바친 주추도 모두 제각각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을 하였다. 누각을 조성할 당시 이만한 절에서 보기 좋게 조형을 한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기둥도 자연에다 받친 주추도 자연이다. 송광사 종루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란한 조각이 돋보이는 종각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 중에 유일한 십자각이라는 송광사 종루. 처마 밑으로는 익공과 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종각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주심포, 주간포, 귀포 등 일일이 명칭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눈을 현란케 만든다. 아마도 이렇게 복잡한 건축기술로 인해 송광사 종루가 유명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상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일깨운 종각의 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문화재 답사.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시간을 정할 수가 없다.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을 떠갈 때마다, 조금 일찍 시작하지 못했음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국에는 ‘태실, ’태봉‘ ’태재’ 등의 이름을 가진 곳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는 모두 왕족의 태를 묻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다. 왕자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을 택해 ‘안태사.를 보내 태를 묻게 했다. 『경국대전』에 예전에 보면 지방은 관찰사가 왕과 왕비, 왕세자의 태실을 모두 살피게 되어 있다.

영조 22년인 1746년에 펴낸 조선 후기의 법전인『속대전』에는 태왕태실의 경계는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정해, 이 경계 안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되어있다. 태실은 대개 한 사람의 것을 묻지만, 사적 제444호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성주세종대왕 자태실은 모두 19기의 태실이 몰려 있는 곳도 있다.


태실은 어떻게 꾸미나?

태실은 대개 산의 봉우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전주 경기전 안에 있는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일반 평지에 자리를 하고 있어 의아스럽게 생각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태실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구이초등학교 뒷산 정상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태실이 어떻게 해서 경기전 안으로 옮겨온 것일까? 태실은 태항아리라는 태를 담은 석실을 만들게 되어있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무늬를 새긴 앙련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는 둥근 모양의 중동석을 놓고 개첨석을 올린다. 머리에 해당하는 덮개석은 복련과 보주로 구별된다.




이와 같이 땅 위에 있는 것과 달리 지하에는 기단석 밑으로 토석을 깔고 그 밑에는 개석을 놓는다. 태를 담은 태항아리는 돌로 만들고 그 안에 석함을 놓는다. 전체적으로는 땅 밑에서부터 태항아리, 석함, 개석, 토석, 기단석, 앙련, 중동석, 개첨석, 복련, 보주 등의 순서로 위로 올리게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파 해쳐진 예종대왕 태실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예종대왕의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에 태실을 만들었고, 영조 10년인 1734년에 고쳐지었다. 이렇게 태실을 고쳐지을 때는 예조의 당상관 및 감역관이 감독을 하는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이러한 예종대왕의 태실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실에 있는 태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가 되었다.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정책을 편 일제는 숱한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태실에 보관 중이던 태항아리도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70년에 태항아리를 잃고 폐허가 되어있던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를 경기전 안으로 옮겨 복원하고, 전북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하였다.



그나마 석물은 보존이 잘 되어있어

다행인 것은 태항아리를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하지만, 태실과 비의 석물들은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예종대왕의 태실은 팔각형의 돌난간을 두르고, 그 안에 기단석을 놓았다. 그리고 배가 불룩한 둥근 중동석을 놓고 지붕돌을 덮은 형태이다. 태실 한편에는 비가 서 있는데 이 비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이라 적혀있으며, 뒷면에는 건립년대를 적고 있다. 뒷면에 적힌 연대를 보면, 이 태실이 ‘만력 6년 10월 초 2일’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 11년인 1578년이다.

비는 받침석을 거북이로 했는데 특별한 조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의 덮개석에는 뿔이 없는 용을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이틀 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훼손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숱한 문화재들이 있는데, 이 땅에 있는 문화재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현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보다는 먼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 혈안이 되어있는 국적 없는 문화를 선호하는 우리민족의 우둔함이 더욱 가슴을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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