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로 된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수덕사라는 고찰의 일주문 곁에 자리하고 있는 이 고택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인 이응로선생사적지’. 이 집은 한 때 여관으로 사용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이라는 간판을 아직도 달고 있다.

 

이 수덕여관은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은 이응로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이다. 또한 이응로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택이다.

 

 

수많은 고초를 받은 이응로화백

 

1904112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한 이응로화백은, 향년 84세인 19891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최종국적은 프랑스였다. 이응로화백은 동양화, 서양화는 물론 판화까지도 두루 재능이 뛰어났다. 홍성에서 출생을 하였지만 어린 시절은 예산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이응로화백은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2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었다. 1965년에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 화단과는 단절되다시피 했으며, 주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이 되었다.

 

 

여류화가 나혜석도 살다간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1988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이응로 화백은 집 앞에 있는 바위에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추상화하여 표현한 작품 두 점이 남아있다.

 

이 수덕여관은 수원출신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덕사의 경내가 아닌 이 수덕여관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수덕여관이야말로 우리 미술사에 남녀 거장이 묵었던 곳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곳이다

 

 

방이 많은 것은 여관으로 운영했기 때문

 

수덕여관은 자형의 초가집이다. 정면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들였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듯하다.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은 한편은 6.5, 또 한편은 4칸으로 꾸며졌다.

 

집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측의 날개채는 모두 6개의 방을 드렸다. 아마 이곳에서 손님들이 묵었을 것이다. 객방의 방문 앞에는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으며, 중앙에도 방이 있다. 정자마루를 올라갈 수 있는 이 방은 사랑채 대용으로 사용이 된 듯하다. 좌측 날개채는 안채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좌측은 넓은 툇마루를 놓았으며, 뒤편으로는 장독과 우물이 있다. 이 고택의 앞으로는 덕숭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시원하게 소리를 낸다.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마 이응로 화백이 이 집을 사들인 것도, 주변의 경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수복여관 앞에 더덕구이 집들이 즐비했어요. 그 때만 해도 상당이 싼 값에 더덕구이를 먹을 수 있었죠. 개천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더덕구이에 동동주 한 잔하면, 세상시름을 다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오랜만에 수덕사를 찾아왔더니 입구에 늘어선 점포들로 인해 절의 분위기까지 달라졌다는 관광객의 푸념이다. 수덕여관을 한 바퀴 돌면서 찬찬히 살펴본다. 대문 앞에 꽃을 피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초가집과 딱 어울린다.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간 노화백의 시름도 모르는 체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 그리고 이곳이 수원출신 비운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다는 것을 모르고 무심하게 흐르고 있는 개울의 물. 세월은 그렇게 잊히는 것인가 보다.

 

국보로 지정이 된 대웅전.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지은 전각이라고 한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먼저 화려함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 제49호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의 그런 편견을 깨고 있다. 어디에도 칠을 한 흔적이 없이 목재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재위 시에 창건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위덕왕은 44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에, 왕흥사라는 호국사찰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관한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전사를 하자, 아들 창(위덕왕)은 승려가 되려고 하였으나, 즉위를 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의 주심포 양식인 대웅전

 

하지만 덕숭산 수덕사는 백제 후기에 숭제법사가 처음으로 절을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덕숭산 수덕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대웅전에 대한 기록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 된 묵서의 내용으로 인해 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잘 다듬은 8단의 바른 돌쌓기로 쌓은 장대석 위에 올려 세웠다. 양편으로는 난간을 놓은 계단이 있으며, 건물은 고려 때의 양식인 주심포 양식이다. 정면 3,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꾸민 대웅전은, 사각형의 자연석 주초를 이용했다.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조성했으며, 정면에는 빗살 삼분합문으로 꾸몄다.

 

 

단청을 하지 않은 고졸한 건축양식

 

국보라서 칠을 하지 않았나?”

아냐, 국보도 칠을 한 것이 있던데

그럼 왜 이렇게 그냥 놓아두었지? 이러면 오래가지 않을 텐데

 

대웅전을 구경하던 관광객들이 하는 말이다. 요즈음은 주말을 맞아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점점 문화재에 관심이 높아진 듯하다. 수덕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졸한 멋을 풍긴다.

 

9일 오전에 찾아간 수덕사 대웅전에는 수능을 볼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이 찾아들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괜히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 남들이 열심히 자녀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방해라도 될까해서이다.

 

 

조성을 한 형태가 아름다운 수덕사 대웅전, 맞배지붕 안으로 보이는 장식적인 요소가 색다르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니 3칸 벽면에 모두 문을 내었는데 양편에는 문을 장식하고 가운데만 널문을 달았다. 외부로 나타난 목재는 그대로 나무의 재질이 들어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백제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수덕사 대웅전. 건축 당시의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웅전 안을 들여다본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와 약사불을 협시불로 모셔놓았다.

 

대웅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서원을 위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기가 죄스러워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다가 뒤돌아선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만난 신라 때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는 삼층석탑에도 누군가 합장을 하고 열심히 탑돌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단풍이 짙게 든 경내에서 여기저기 모여 사진촬영을 하기에 바쁜데, 천년세월을 그렇게 버텨 온 고졸한 멋을 풍기는 대웅전은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올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아주 오래 전 송춘희라는 여가수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 제목을 가진 노래이다. 수덕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노래 때문인가? 먼저 비구니인 여승을 떠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아마도 이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주변에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된 선원인 정혜사와 비구니 강원인 견성암이 있다.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이 견성암의 비구니들 대문으로 보인다. 노래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고착시켜 버린 것이다.

 

아마 이 노래가 처음 불려 질 때인 1966년에는 수덕사가 인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이 몰려든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고, 입구에는 장사꾼들이 갖은 상품을 진열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요도 이제 가사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수덕도령의 애끓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7월 28일(일)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보면 좋다고 했던가? 딱히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집에서 세 곳을 돌아오면 좋다고 하니 길을 따라 나섰다. 그 두 번째로 찾아간 예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덕산향토지>에 보면 수덕사의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홍주마을에는 수덕이란 도령이 살고 있었다. 이 수덕이라는 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수덕도령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덕숭이라는 낭자에게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가문이 좋아도 상사병을 앓는 것인지? 수덕도령은 애를 태우다 못해 덕숭낭자에게 여러 번 청혼을 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수덕도령이 하도 끈질기게 청혼을 하자 덕숭낭자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부터 수덕도령은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절을 빨리 짓고 덕숭낭자를 품을 생각을 한 탐욕 때문에 벌을 완성하자 불이 나버렸다. 다시 절을 짓기 시작한 수덕도령은 이번에도 덕숭낭자를 그리워했기에 또 불이 나 버렸다.

 

세 번째는 오직 절을 지을 것만을 생각하고 열심을 내었다. 그 때문인지 절이 완공이 되었다. 함께 살 것을 허락한 덕숭낭자였지만,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오직 덕숭낭자만을 그리며 절을 지은 수덕도령. 그만 참을 수가 없어 덕숭낭자를 안아버렸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덕숭낭자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덕도령의 손에는 버선 한 짝만이 들려있었단다.

 

덕숭낭자를 끌어안았던 자리는 큰 바위로 변하고 그 자리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버선꽃(물단초)’이라고 부른다. 덕숭낭자는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부르고, 산 이름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했으며, 지금도 ‘덕숭산 수덕사’라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전설과 수덕사의 중창 내력을 보면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태여 짜 맞추기 식의 논리를 펼 것은 아니지만, 혼자 생각에 젖어 고뇌를 한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귀퉁이 깨진 삼층석탑, 그런데 왜 이렇게 끌리지?

 

일주문을 지나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 대웅전을 찾아가면 그 앞에 탑이 한 기 서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 삼층석탑의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양 옆에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기단에는 가운에 탱주를 새겼다.

 

높이 410cm의 이 삼층석탑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상륜부는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머리장식받침인 노반이 있고, 그 위로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인 보륜과 보개를 올려놓았다.

 

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은 1층과 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탑은 통일신라 문무왕 5년인 665년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탑의 모양을 보면 오히려 통일신라 석탑 전성기에 비해 몸돌의 가운데 기둥인 탱주가 생략된 점이나, 지붕돌의 받침이 4단인 점을 볼 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탑이다. 수덕사의 삼층석탑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남아 아름다운 석탑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이 수덕사의 깨진 석탑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일까? 아니면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때문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고나서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다. 하긴 저 깨진 채로 서 있는 삼층석탑도 참 바보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 이 탑을 조성할 때 저렇게 귀퉁이가 깨진 채로 사람들을 만날 것을 누가 알았으리요.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줄도 모르겠다. 저 탑이나 나나 다 깨어진 채로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 73 - 28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백송은 추사 일문의 상징이 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산의 백송은 수령이 약 2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그 중 두 가지는 죽어서 처리를 해놓았다.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백송이 희귀종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예산 백송은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인 1809년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가 내려 준 백송이 있다. 그래서 백송은 추사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예산의 백송은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과 거리가 멀지 않다.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어, 지나는 길에 들려볼 만하다.

 

수술자국이 마음이 아파

 

사람도 그렇지만 나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래 묵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자국이 보이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예산 백송을 찾아가니 생육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곁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들에 비해 빈약하다. 수술 흔적도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비록 생육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뿐만 아니라, 추사 선생이 필통에 씨를 넣어 갖다가 심었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예산 백송. 앞으로 보존이 잘 되어, 더 많은 씨를 퍼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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