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남원으로 내려가 오늘(12월 19일) 아침 일찍 임실군에 있는 한 부대를 찾아갔다. 남원 선원사(주지 : 운천스님) 봉사단이 부대 장병들에게 자장면을 만들어 주는 날이라는 것이다. 군 장병들에게 한 달에도 몇 번씩 자장면 공양을 하는 선원사 자원봉사단은, 이미 전라북도 내에서는 수많은 부대에 자장면을 만들어 장병들에게 급식을 해왔다.

자장면 급식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봉사단을 따라간 것은 다름이 아니다.  장병들에게 어떻게 자장면을 만들어 급식을 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장병들이 자장면을 과연 좋아할까 하는 점도 굼금해서이다. 선원사 주지인 운천스님은 "나라를 위해 젊음을 불태우는 장병들에게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고민하다가, 자장면이 가장 먹기도 좋고 만들기도 수월하다는 생각에 자장면 급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선원사 봉사단이 직접 자장면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 봉사를 하고 있다"라고 한다. 그만큼 지역의 장병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이, 선원사 봉사단의 마음들이다.

 선원사 최인술봉사단장이 자장면을 볶고 있다. 자장면 만드는 기술을 배워 직접 만들고 있다.
 
병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음식, 자장면

이른 아침 8시에 선원사에 모인 봉사단 일행은 최인술 단장을 비롯해 7~8명의 일행이 임실에 있는 군부대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이곳 군 법당에서 예불을 마친 병사들에게 자장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이다. 10시 30분부터 급식을 해야하기 때문에, 모두 손놀림이 바쁘다. 선원사에서 미리 준비해간 볶음야채에는 양파, 양배추, 호박, 당근 등에 표고버섯과 돼지고기까지 준비를 했다.



   

평소 선원사에서 자장면을 만들 때는 돼지고기 대신 콩고기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장병들에게 줄 음식이기 때문에, 돼지고기까지 넣어서 자장을 볶았다. 한편에서는 면을 빼고, 또 한편에서는 단무지를 그릇에 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동안 많은 봉사를 한 것 같다. 거의 한달에 두 세번은 자장면 봉사를 한다고 한다.



자장면을 만드는 최인술 단장의 솜씨를 보니 전문가 수준이다. 봉사를 하기 위해 자장면 집을 운영한 후배에게서 자장면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우선 기름을 붓고 끓이다가  돼지고기를 넣거 볶는다. 그 다음에 야채를 넣고 볶다가 표고버섯을 집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춘장을 넣고 계속 휘저으면 자장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오늘 금식을 할 병사들이 120명이나 되니, 몇번을 그렇게 볶아내었다.



 
선원사 자장면 맛있어요. 정말 최곱니다.

10시 30분이 되자 식당으로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배식구에서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면을 담고 자장면을 부어주고. 거기다가 간식으로 먹을 귤까지 준비를 했다. 한 그릇씩 들고가 식탁에 앉은 병사들은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정말 맛있습니다. 다음에 또 먹을 수 있습니까?"
"선원사 자장면 정말 맛있습니다. 제대해서 나가도 이렇게 맛있는 자장면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병사들이 자장면을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다. 하긴 정성이 깃든 음식이 맛으로만 따질 것인가? 그 안에는 봉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아들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듯, 정성을 다하고 있다.
 



모처럼 답사길에 만난 자장면 공양. 세상은 이렇게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름다운가 보다. 선원사는 매주 화요일 노인분들에게도 무료공양으로 자장면을 드린다. 또한 일이 있을 때는 채식뷔페와, 자장밥 봉사를 한다. 하기에 늘 선원사 봉사단들은 손길이 바쁘다. 일요일 답사보다 더 값진 모습을 담았다.    

선원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절이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창건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형이 주산인 백공산이 객산인 교룡산에 비해 지세한 허약한 것을 알고, 백공산의 지세를 높이고자 만복사와 대복사, 그리고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70~80명의 승려들이 상주하던 절로, 만복사에 버금가는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소실이 되어버렸다. 현재 선원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지방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5호인 대웅전, 그리고 동종이 전한다.


선원사 일주문과(위) 경내. 좌측 전각이 철불여래상이 모셔진 약사전이고, 우측에 대웅전이다.

남원팔경 중 제5경인 선원모종(禪院暮鐘)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 예전 남원성의 동문 밖에 자리한 선원사에서는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소리에 대한 기록은 『신증판 남원지』에 전하는 남원팔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녁예불 시간에 울리는 범종소리, 전북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이 된 그 범종은 어떻게 소리를 내었기에, 팔경 안에 들었을까? 선원사를 찾아 범종을 둘러보았다.




사진 위로부터 약사전, 약사전 뒤편에 걸린 괘불함, 대웅전과 대웅전의 용조각

문화재 안내판에는 선원사 대웅전 안에 범종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확인을 하니, 대웅전 안에 있는 범종은 최근에 제작이 된 것이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께 물으니, 범종은 약사전에 있다고 한다.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한 편에 범종이 보이는데, 그리 크지가 않다. 높이 66cm, 입 지름 47cm의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종의 모습은 작다고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여느 종이 아니다. 종의 맨 위에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용의 각 부분은 따로 제작을 해 붙여서 완성한 듯하다. 종의 몸체에는 4줄의 가로선을 긋고 맨 위에는 작은 원 11개를 나열하였다. 그 밑으로는 보살상을 4곳에 놓고, 보살상 사이에는 꽃과 덮게, 관을 나열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선원사 범종과 용뉴(아래)

종을 울려보고 싶은 마음

중앙에 배가 부른 부분은 4개의 사각형 모양의 유곽을 만들어 둘레를 파도무늬로 장식하였다. 아래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를 새기고, 위와 아래에는 글자를 남겼다. 종으로서도 작고 거친 모양이지만, 문양이 다채롭고 특이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종을 주조한 사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원 출생인 최연은 선조 36년인 160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최연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 등의 모의에 반대하다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을 당했다. 고향으로 낙향한 최연은 12년 동안이나 은거를 하였는데, 그 때 지은 시 중에 이런 가사가 전한다.

(전략)
千年石色帶方城 천년 묵은 돌 색깔은 대방성이 틀림없다.
主人有酒客忘發 주인이 권한 술에 객은 일어설 줄 모르더니
醉伴沙驅眠蓼汀 말을 몰아가던 취한 벗, 요천가에 잠이 드네.

아마 이 시에서 ‘십리 먼 곳 신라시대 종소리’란 바로 선원사가 아니었을까? 남원팔경에 들어가 있는 선원모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종소리가 맑고 청아했으면, 선원모종이라 했을까? 불현 듯 종소리가 듣고 싶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범종을 울려본다. 폐부를 흔드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 살짝 쳤는데도 그 소리의 여운이 상당하다.




그랬다. 이렇게 맑은 종소리가 저녁예불 시간에 울렸을 것이다. 남원성 동문 밖을 나서면서 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감탄을 했을 것이고, 그 소리에 취했을 것이다. 작은 종소리 하나에도 혼을 담아낸 우리의 선조들. 그저 머리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논산 관촉사에는 보물 제218호인 거대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부르는데, 이 미륵보살입상이 있는 곳에서 20m 정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배례석은, 우리나라의 석조물 중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문화재다.

배례석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배례석에서 예를 올린 것은 아니고, 이 배례석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뒤편에 석탑이 1기가 서 있고, 그 앞으로는 미륵전이 있다.


논산 관촉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인 배례석(위)와 석문(아래)

뛰어난 조각술이 엿보이는 관촉사 배례석

관촉사 미륵전 뒤편에 놓인 배려석은 장방형의 대석이다. 바닥에서 2단으로 직각고임을 해서 올려놓고, 그 위의 면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안상은 고려 때의 석조물에서 흔히 보이는 문양으로, 전면에는 3개를 새겨 넣고 단면에는 2개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는 버섯구름 모양의 문양을 돋을새김하고, 여울진 모양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배례석의 윗면에는 중앙에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가운데 연꽃이 양쪽의 것보다 약 3㎝ 정도가 크며, 연꽃잎은 모두 8잎으로 연꽃 한 잎의 중앙부가 갈라져 두개의 잎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해 놓은 배례석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이 되어있다.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한 석문(石門)

미륵전을 조금 비켜선 계단위에는 돌로 만든 석문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석조물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문이다. 석문의 한쪽 기둥에는 ‘해탈문’이라고 새겨 놓았다. 문 입구에는 넓이가 48cm 정도의 돌기둥을 양편에 세우고, 윗면 천정에는 길게 장대석으로 잘 다듬은 돌을 다섯 장 올려놓았다.

전체적인 석문의 모습은 4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터널과 같은 형태로 꾸며졌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문의 양편에는, 성문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석벽으로 둘러놓았다. 이러한 형태의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예이다. 이 석문은 석조미륵입상과 같은 연대에 제작된 것은 아니고, 그 후에 필요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둥 좌측에는 해탈문이라 적었다(맨위) 석문 안으로 은진미륵이 보인다. 그리고 문에 연결한 석벽괌(위에서 세 번째) 바위와 어우러진 석문(아래)

은진미륵이 자리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2기의 희귀한 석조물이 있어 남다른 곳이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절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관촉사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재로 찾아드는 이들을 들뜨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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