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전에서 정조대왕 탄신제향 올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조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화령전 운한각에서 25일 12시부터 ‘제262주기 정조대왕 탄신제향’이 거행되었다. 운한각 안에는 순조의 하교에 의해 현릉원 재실에 모셨던 정조의 어진을 1801년에 옮겨 봉안하였다. 순조는 이 화령전을 축조한 후 매년 장중한 탄신제향을 이곳에서 거행하였는데, 조선의 임금 가운데 어진을 모신 전각에서 탄신일에 제향을 지낸 것은 정조대왕이 유일하다.
원래는 새벽 1시에 맞추어 제향을 올려
화령전에서 정조대왕의 탄신제향을 올리던 시간은 새벽 1시였다. 하지만 정조대왕의 탄신기념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를 바라고, 연례행사로 진행하기 위해 양력을 기준으로 삼아, 10월 네 번째 토요일에 올리기로 의견이 모아져 3년 전 복원한 탄신제향을 기본으로 현대적 요소를 가미해 지내게 되었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장용외영의 깃발을 든 장용영 무사들이 많은 유림의 인원을 대동하고 화령전 문안으로 들어섰다. 이날 제향은 행사안내를 시작으로 제관입장 - 망전례 - 초헌례 - 삼상향 - 독축 - 아헌례 - 종헌례 - 망료례 - 국궁사배례 - 예필례 - 음복례의 순으로 거행이 되었다.
이날 초헌관은 정조대왕 기념사업회 회장이 맡았으며, 아헌관은 염상덕 수원문화원장이, 종헌관은 김정수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가 맡았다. 창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이수자인 이상훈이 맡아 집례를 했다. 또한 여민락과 수제천 등의 의식음악은 수원국악예술단이 연주했다.
장중한 의식 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이다
탄신제향을 찾은 한 시민은 올해 마음먹고 제향에 참석을 했다면서
“말로만 듣던 궁중 제향을 이렇게 수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제향이라고 하면 성균관에서 열리던 문묘제향이나 종묘에서 역대 임금님들이 제를 지내는 종묘제례만 만날 수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화령전에서 정조대왕의 탄신제향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말 수원시민으로서 자긍심을 느낀다.”고 한다.
중국에서 수원 화성 관광을 왔다가 이곳에서 정조대왕 탄신제향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한 관광객은
“중국에도 많은 의식이 있지만 이렇게 국왕의 제향을 지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번에 한국에 나와 의미 있는 행사를 보게 되어 정말 기쁘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중국으로 돌아가면 지인들에게 자랑을 해야겠다,”며 웃는다.
제향이 시작되기 전에 화령전을 찾은 한 시민은 삼문 앞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다가
“안내판에 정조대왕의 ‘어진’을 ‘초상화’리고 기록해 놓았다. 초상화는 일반인들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대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어찌 어진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초상화라고 적고 있는가?”라고 뼈 있는 소리를 하기도.
어진이란 역대 왕들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말한다. 어진제작은 모두 세 종류로 도사(圖寫)와 추사(追寫) 그리고 모사(模寫)가 있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을 말한다.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이다. 모사란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을 범본(範本)으로 해 신본을 그린 것을 말한다.
왕의 모습을 지칭하는 어진은 진용(眞容), 진(眞), 진영(眞影),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어용(御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 다양하게 불렸다. 모두 왕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숙종 39년인 1713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것을 이이명(李頤命)의 건의로 ‘어진’이라 했는데, 이후 이 명칭을 따라 어진이라고 주로 일컫는다.
한편 이날 독축에서 올린 정조대왕 탄신제 축문은 다음과 같다.
‘이제 단기 4347년 서기 2014년 갑오년 10월 25일. 감히 조선국 제22대 국왕 정조 경천 명도 흥덕 영모 문성 무열 성인 장효 선황제께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장엄하고 근본 된 사당의 의절이 있으므로 화령전 운한각에서 제향을 올립니다. 얼굴색을 바로잡고 보시는 것과 같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정갈하게 베풀어 밝게 올리니 삼가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화령전 솟을삼문 앞에 흥이 넘실거려.
‘생태교통 수원2013’의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정조의 영정을 봉안한 화령전의 정문인 솟을삼문 앞에는 간이무대가 설치되고, 각 구청별로 무대를 꾸민 공연이 이어졌다. 23일에는 권선구 봉사의 날로, 오후 3시부터 무대에 오른 세류1동 주민센터에서 기타를 배운 사람들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등 4곡을 관람객들에게 들려주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이 날 권선구의 공연은 입북동이 고전무용인 ‘사랑가‘ 등을 선보였으며, 권선2동의 재즈댄스가 무대에 올라 흥을 더해주었다. 권선2동의 재즈댄스 동아리는 무대에 올라 The nest episode 등에 맞추어 춤을 추었으며, 이어서 입북동의 기타반이 ’내일은 해가 뜬다.‘ 등을 연주했다.
문화강좌로 익힌 실력 등 대단해
뒤이어 세류3동에서 나온 민요교실 팀은 사랑가와 오봉산타령, 한강수타령 등을 구성지게 불러 박수를 받았으며, 제일 끝으로 무대에 오른 곡선동의 난타 팀은 아리랑, 용천의 소리, 다이내믹 등에 맞추어 멋진 타악 연주를 해주었다. 평일이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관람인원이 점차 늘어났다.
“참 좋습니다. 이렇게 각 구청과 주민센터마다 문화강좌 등을 통해 배운 강습생들이 점차 실력이 좋아지면서 동아리까지 만들어 연주봉사도 하고, 경로당이며 불우한 이웃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권선구에서 마련한 다양한 공연 무대를 보고 있던 한 시민은 이렇게 주민센터 등을 통해 배워서 재능기부를 하는 모습들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한다. 한 낮의 더위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많은 땀을 흘리면서 공연을 마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준 조아무개(남, 45세)씨는
“이 더운 날에 저렇게 열심히 땀을 흘리며 관객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생태교통에 와서 참 많은 것을 보고 갑니다. 수원이라는 곳이 딴 지자체보다 월등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라고 한다.
왜 꼭 이곳이라야만 했을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박수를 치고 좋아한 것만은 아니다. 구경을 하던 한 어르신은 혀를 차면서
“참 화령전은 본전인 운한각에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다. 즉 이곳은 성전(聖殿)이라고 보아야 한다. 솟을삼문은 정조대왕의 혼백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데 그 앞에 무대를 설치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도 죄스러운데, 저렇게 살을 대 내 놓은 여자들이 저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춤을 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후손으로서 낯이 뜨거워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동안 화령전 앞 무대공연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어르신들의 이런 우려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화령전이라는 곳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라면, 이곳 무대에 공연을 올릴 때는 좀 더 생각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다. 생태교통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이제 일주일 남짓 남은 생태교통. 앞으로도 화령전 앞 무대에 몇 번의 공연이 남아있다. 그 앞 솟을삼문 앞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이런 점은 감안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것은 있기 때문이다.
태조의 어진을 피신시키던 위봉산성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와 그 외에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위봉산성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도로가 성벽을 끊고 있는데 건너편에 보면 성벽위로 여장, 총안을 둔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다른 성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성벽을 쌓은 돌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를 쌓아놓았다. 자연미가 풍기는 성벽은 오히려 다듬은 성벽보다 아름답다. 울퉁불퉁한 성 돌을 그대로 맞추어 쌓아놓은 성벽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이다.
위봉산성은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과 패 등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성이기도 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이 되자 태조의 어진을 옮겨 모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위봉폭포와 위봉사가 있어 늦가을 바람 따라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역사를 따라 길을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진' 모셨던 '운한각', 대를 이은 효심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성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화성 행궁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난 날. 바람이 불면서 날이 쌀쌀하다. 이런 상태라면 찾아가보아야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마음 속으로 제발 그곳을 가면 날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국 앞에 도착을 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어둡던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있다. 그저 이런 날씨마저 고마울 뿐이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운한각을 돌다가 보면 참으로 잘 꾸며진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운한각의 좌측에는 화재나 홍수 등에 대비해 어진을 대치시키는 이안청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다. 운한각의 창문이나 기둥 등을 보면 당시에 이 전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격자문이나 띠살문 등으로 꾸민 창호도 아름답지만, 벽돌 등으로 쌓은 담벼락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이안청으로 가는 곳에는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것도, 여름철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물이 좋은 제정
화령전의 운한각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담 너머에 있는 전각이 있다. 작은 일각문으로들어서면 전사청이다. 전사청은 운한각에서 정조를 위한 제향을 준비할 때, 각종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은 한편 마루가 돌출이 된 형태로 지어졌다. 전사창에서는 운한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을 내었는데, 이곳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날랐을 것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 손바닥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추운 날씨였지만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재인이 춤과 소리를 하던 풍화당
화령전 가운데 풍화당은 재실이다. 화령전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당은 화령전 가운데 운한각과 함께 원형이 보존되어 있던 건물로 사료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풍화당에서 바로 고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쳤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전각 중 한곳인 풍화당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풍화당은 양편으로 툇마루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풍화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굴뚝이 있다. 흡사 거북이 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풍화당이 정감이 들게 한다.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화성행궁 돌아보기(1) -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곁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화성 행궁은 행궁과 그 북쪽에 정조 사후에 건립한 화령전으로 구분이 되어있으며,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조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 봉안각이다. 수원 화성의 이야기에 이어 행궁과 화령전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정조의 마음을 이곳에서 읽어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날 찾아간 행궁과 화령전. 먼저 화령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고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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