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 윤민걸 가옥은, 윤민걸의 고조부인 윤양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가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에 있었을 행랑채는 유실이 되었다고 하며,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초가로 지은 광채와 뒷담을 벽으로 삼아 꾸민 사당이 있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윤양계는 <병마절제도 위 연길현감 도청부도사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고종 2년인 1865년에 이 집에 살았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지은 지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양계가 이 집에 살았다는 고종 2년에 연길현의 현감이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연일현의 오자로 보인다. 승정원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고종 3(1866)년 5월 16일. 경상 감사 이삼현(李參鉉)의 장계에서 진휼하여 구호한 각읍 가운데 베풀어 도와준 것이 뛰어난 수령들의 별단을 등문(登聞)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류치윤(柳致潤)은 오고(五考)를 기다리지 말고 군수에 승천(陞遷)시키되 별천(別薦)의 예로 시행하고, (중략)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윤석오(尹錫五)는 모두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고, 우병사(右兵使) 이주응(李周應)은 가자하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은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라.‘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윤민걸 가옥의 조성연대가 언제인지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 2년에는 윤양계는 연일현감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연일에 있었다고 해서 충주에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사랑채의 뛰어난 미적 감각

안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채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중앙의 전면1칸은 튼 마루로, 그리고 좌측의 한 칸을 툇마루로 조성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우측의 1칸은 마루를 높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랑채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곳이 많다. 우선 우측의 마루방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창호가 색다르다. 이 방은 일반적인 사분함 여닫이문이 아닌 중방 위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중앙에 툇마루는 앞을 터놓았는데, 좌측의 툇마루는 방처럼 꾸몄다는 것도 이 사랑채의 특징이다.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벽에 새인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지난해에 보수를 하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며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재미있다.



안채와 아래채의 단아함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여있다. 좌측으로부터 부엌과 두 칸의 방, 대청이 있고 안방의 꺾어진 부분에는 큰 방을 드렸다. 큰 방의 끝에는 판자로 벽을 막은 한데아궁이를 두고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안방의 뒤편에 마루로 놓은 돌출된 부분이 있다. 안채의 우측 벽면에 돌출을 시킨 이 부분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던 '안 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뒤편의 툇마루 끝에 출입문을 달아 놓은 마루방과 안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마루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안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부엌에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큰 집이라면 까치구멍이 양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윤민걸 가옥은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이 뒤편의 문 옆으로만 있다. 연기 등이 안마당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왜 바깥담을 아름답게 했을까?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3칸의 마루방을 드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초가로 지은 광채가 있다. 그런데 뒷담에 나 있는 사주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바로 바깥 담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광채와 사당채의 뒷벽이 그대로 바깥담이 되어있는 윤민걸 가옥의 특징이다. 사당과 광채가 떨어진 ㄱ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바깥담인 벽을 모두 심벽으로 처리를 했다. 왜 이렇게 바깥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일까? 이런 바깥담에 대한 꾸밈은 집의 전체가 그렇다. 솟을대문부터 바깥담을 모두 심벽처리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고민을 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고택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 집을 지을 때는 자신들이 가장 사용하기 적합하게 꾸민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을 강조한 것이 우리 고택의 멋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식의 가옥들. 그런데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어 낸 나름대로의 고집 때문이다.

여인들의 공간인 '내당'과 '내별당'

99칸 양반집의 특별함은 바로 내, 외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줄행랑과 바깥사랑채. 그리고 그 사이에 난 작은 문을 통해서 뒤편으로 나가면 만나게 되는 큰사랑채와, 담 너머에 있는 외별당까지가 바로 남자들만의 공간이다.

그와는 달리 중문을 들어서면 안행랑채와 안채인 내당, 그리고 내당 뒤에 자리한 내별당과 안초당은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2월 18일 찾아간 한국민속촌의 22호집인 99칸 양반집. 그 네 번째로 여성들만의 공간인 안채인 ‘내당’과 내당 뒤편에 초가로 마련한 ‘내별당’을 둘러본다.


여러 개의 방을 드린 내당

99칸 양반집의 내당은 한 마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택의 안채와는 차이가 난다. 일일이 돌아보기에도 꽤 시간을 필요한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높직하니 올라앉아 안행랑과 구별을 하였다. ㄱ 자로 지어진 내당은 벽면에 십장생을 조각할 정도로 공을 들인 집이다.

이 내당은 안주인은 물론, 여성들만의 생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에서 안주인은 손님들(여성)을 맞이하거나, 여가활동 등을 즐기던 곳이다. 한 마디로 여성들만의 가정사와 문화적인 면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 99칸 양반집의 내당은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으면서, 안방 뒤편에 위방을 달아낸 형태이다. 집은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큰 안방과 여러 개의 위방을 두고 있다. 서편에는 방을 두고 다음에 대청을 두었으며, 꺾인 부분에 큰 안방을 놓았다. 안방의 남쪽으로는 건넌방과 부엌을 달아냈다.



이 내당의 특징은 바로 안방 뒤편에 마련한 방들이다. 뒤편을 돌출시켜 모두 세 개의 작은 방을 꾸며 놓았다. 그리고 안사랑채에서 연결하는 통로인 회랑이 이곳 내당의 뒤편으로 연결이 되도록 하였다.



각별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안별당

안채인 내당의 뒤로 돌아가면 계단을 쌓고 조금 높게 협문을 내어 놓았다. 그 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내별당. 99칸 양반집에서 모정을 제외하고는, 이 내별당과 안초당만이 초가지붕이다. 내별당은 모두 다섯 칸으로 꾸몄으며, 두 칸씩의 방과 동편에 한 칸의 마루방이 있다.


내별당은 내당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어 은밀하다. 이 내별당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당의 뒤편으로 돌거나, 아니면 안사랑의 회랑을 통해 다시 땅을 밟아야만 한다. 이곳은 내당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곳으로, 내당 마님이나 귀한 손들을 맞이하고는 하던 곳이라고 한다.



외별당이 연희를 하거나 각별한 남자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곳이라면, 이 내별당은 안당마님의 특별한 공간으로 사용이 되었을 것이다. 담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는 외별당이, 북쪽으로는 내별당이 자리하고 있는 수원 신풍동 99칸 양반집. 이 내당과 내별당에서 그 대단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다.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고개 너머를 ‘잿말’이라고 한다. ‘잿말’이란 <고개마을>이라는 뜻이다. 잿말은 충주군 감미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음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수일, 병조참판을 지낸 정우명 등이 이 잿말 출신이다. 특히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란 점에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이 상당한 곳이기도 하다. 효자 김대환은 부친이 심부전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장기를 이식해 부친을 회생시키기도 했다.


이완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

이러한 잿말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김주태 가옥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완(1602∼167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인조 2년인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이완대장은 48세인 1649년 효종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시작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완대장은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전면 중단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며,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사대부가의 위엄이 서린 사랑채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김주태 가옥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지닌 고택이다. 김주태 가옥은 300여 년 전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이완대장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집이 현재의 김주태 가옥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사랑채는 상량문에 고종 광무 5년인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김주태 가옥의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지나 석축으로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 자로 사랑채를 앉혔다. 남향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지체 높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오르려면 계단을 올라 앞마당이 있고, 그 위에 축대를 올려 사랑채를 지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는 솟을대문의 지붕과 같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를 마주하면 좌측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앞에서는 벽으로 막혀 볼 수가 없다. 우측 끝에는 누마루를 한단 높여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전면 모두 창호로 문을 냈으며, 뒤편에는 양편으로 작은 문을 만들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하인들이 묵을 수 있는 행랑방들이 줄을 지어있다. 굳이 사랑의 어르신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지어진 집이라는 느낌이다.



 

대문채엔 난 쪽문의 비밀

김주태 가옥의 대문채에는 방이 없다. 대문의 양 편으로는 곳간을 드렸다. 그런데 이 대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대문을 마주하고 우측을 보면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쪽문이라고 하는 이 문을 열면, 천정이 낮은 곳으로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대문을 열지 않고도, 이 문으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만들었다.

이 문은 언제 사용하였을까? 혹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대문으로 드나들기가 버거운 하인들이 이문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굳이 번거롭게 대문을 열지 않고, 이문을 통해 출입을 하였을까? 그렇다고 하면 위에 처정을 두어 굳이 머리를 숙이지 않도록 했을 터인데.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생긴 질문과 답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재미를 느껴보기도 한다.



철저히 통제가 된 안채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안채는 안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가려면 좌측으로 난 문과, 우측에 사랑채와 안채와 연결이 된 담장의 일각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채를 들어갈 수가 없다. 안채의 담장에는 또 다시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 안채를 출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철저하게 통제가 되어있는 형태이다.

김주태 가옥의 안채는 T 자 형태로 지어졌다. 이런 형태는 경기지방의 사대부 가옥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 담장에 낸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형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광채가 있다. 안채는 앞마루를 높인 건넌방과 두 칸 대청, 그리고 사랑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도 방과 부엌이 달려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 위에 안채를 지었는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그대로 지켜냈다.



담장과 굴뚝의 멋스러움

김주태 가옥의 또 하나의 멋은 담장이다.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담장의 문양, 수키와를 엎어놓고, 그 사이에 황토를 넣어 문양을 만들었다. 밑에는 돌을 다듬지도 않고, 그냥 황토와 섞어 쌓았다. 김주태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담장이다. 예전부터 이런 담장을 했는지, 아니면 최근 보수룰 하면서 이런 담장을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담장 하나가 주는 재미는 상당하다.

또 하나의 멋을 찾으라 한다면 굴뚝이다. 기와와 백회를 이용해 조성한 굴뚝은 낮고 작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거의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굴뚝은 중간에 네모난 작은 창을 내고, 위는 사각형의 낮은 피라미드처럼 만들었다. 이런 작은 것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꾸민 집이다. 이러한 담장과 굴뚝이 있어,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멋스럽게 만들었다. 김주태 가옥만이 갖고 있는 공간 구성은 그래서 뛰어나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인 명재고택. 이 집은 한 마디로 우리나라 한옥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고택이다. 조선조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의 표본이 되는 집으이다. 안채는 비튼 ㄷ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튼 ㅁ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잘 정리된 앞마당에서 풍기는 멋

명재고택을 찾아가면 우선 집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바르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집 앞에는 네모나게 조성한 연못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샘이 있다. 주변 정리가 잘 된 앞마당은 너른 공지가 마련되어 있어, 주차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사랑채 옆으로는 장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색다른 운치를 더해준다. 아마도 곁에 있는 집에서 전통 장이라도 생산을 하는가 보다.



사랑채의 우측 계단 위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당 역시 장독들과 잘 어울린다. 사당은 사랑채 우측으로도 오를 수가 있지만, 안채에서도 일각문을 통해 오를 수 있도록 동선을 조성하였다. 아마 사당에 제라도 올릴 경우, 부녀자들이 손쉽게 사당을 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 같다

열린 공간으로 조성한 명재고택의 사랑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열려 있다고 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마을을 향해 언제나 개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증 선생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재고택의 주인인 윤증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자인, 호는 명재 혹은 유봉이다. 김집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송시열, 윤휴, 이유태 등 당대의 명현들과 함께 교분을 쌓았다.



윤증 선생은 등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면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증 선생은 이러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실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객을 해보아도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이런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증 선생은 마을사람들과 늘 함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정면 네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가운데 두 칸은 온돌을 놓고, 양편 두 칸은 마루방으로 조성하였다. 바라보면서 좌측은 높이 올린 누마루 방으로 조성하였는데, 사랑채 온돌방 앞에 놓인 툇마루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돌출을 시켰다. 우측의 마루는 시원하게 개방을 해놓았다.

옆을 판자문으로 마감을 한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놀랍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계단식으로 꾸민 건물에 툇마루를 통해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까지 이어진다. 사랑채를 보면서 좌측으로는 문간채로 이어지며,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누마루 방은 문을 들어 올려 완전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한옥의 미학을 대표한다는 명재고택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대청 양편에 고방을 둔 안채의 겸손함

고방이란 고택에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다양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작은 방이다.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 대신 광이라 불리는 창고를 여러 곳에 배치하였으나, 규모가 작은 집에서는 안방과 부엌 가까이에 고방을 설치하고 채광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였다. 명재고택의 색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고방을 대청 양편에 두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꽤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명재고택에는 광채가 따로 없다. 이것은 윤증 선생이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주변에 민초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채는 북쪽중앙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양편에 날개채를 달아냈다. 대청 양편 뒤쪽에는 양편에 고방을 두고, 대청의 서쪽에는 두 칸의 안방과 한 칸의 윗방을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두 칸 넓은 부엌과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다. 그리고 대청 동쪽으로는 건넌방과 윗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안채의 ㄷ자와 문간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나열이 되었다.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 앞면에는 나무를 위로 질러 시렁을 낸 것도 명재고택의 특징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그래도 조심스러운 집안 여인네들의 동선을 생각해, 이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민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휴일이 되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명재고택. 아마도 이 고택에서 느낄 수 있는 선생의 겸손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배어있는 명재고택을 쉽게 뒤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