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인 경기민요는 서울과 경기도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이지만, 여기서의 경기민요는 경기긴잡가를 가리킨다. 잡가는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정가와 대비되는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속가 중에서도 긴 형식의 노래를 앉아서 부르는 것을 잡가라 한다.

 

긴잡가라 함은 경기잡가 가운데 느린 장단으로 된 12잡가를 말한다. 경기긴잡가는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 등 1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산가는 산천경치를 노래한 것이고, 소춘향가, 집장가, 십장가, 형장가는 판소리 춘향가의 내용을 따서 사설을 지은 것이다.

 

이와 같이 판소리의 한 대목을 끌어 낸 경기긴잡가 중 적벽가는 판소리 적벽가와 비슷하고, 제비가는 판소리 흥보가와 내용이 통하지만 이들 잡가가 판소리 곡조로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일부 사설을 따왔을 뿐이다. 평양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는 서민적인 인정, 사랑 등을 노래하고 있다.

 

경기긴잡가의 장단은 흔히 느린 6박 도드리장단이나, 좀 느린 3박 세마치장단으로 된 경우가 많다. 선율은 서도소리제인 수심가토리와 경기소리제인 경토리가 뒤섞인 특이한 음조로 되어 있다. 경기긴잡가의 특징은 경기도 특유의 율조로, 대개는 서정적인 긴사설로 구성되었으며 비교적 조용하고 은근하게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우리가 흔히 경기민요라 하는 것은, 긴잡가 외에 경기도 지방에서 전해지는 수많은 민요들을 총 망라하여 경기민요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경기민요를 감칠맛 나게 표현한 음반이 출시가 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기민요와 화려한 관현악의 어울림 시도

 

경기민요 소리꾼 최영자씨가 소리와 관현악이 어우러진 경기민요 음반 관현악과 함께 하는 경기소리를 신나라뮤직에서 17일 출반했다. 그동안 경기소리의 멋과 우수성을 널리 알려온 소리꾼 최영자씨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로 명창 이은주, 이춘희 선생에게 사사했다.

 

이번에 새로 출반한 음반은 특별한 재주나 기교가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소박한 경기민요를 화려한 국악 관현악 반주를 통하여 감칠맛 나는 소리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풍부한 음향을 위해 33인이 동원된 국악 관현악단과 호흡을 맞춘 특색 있는 연출은, 경기민요를 민중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대중음악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민요를 부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음반 관현악과 함께 하는 경기소리1장의 CD로 구성돼 있으며, 경기소리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금강산타령’, ‘노랫가락’, ‘청춘가’, ‘궁초댕기’, ‘뱃노래’, ‘잦은 뱃노래등 총 14곡이 수록돼 있다.

 

 

인고의 고통으로 점철 된 지나 온 세월

 

우리 소리에 내재하는 흥과 멋과 한을 충실히 표현해온 최영자씨의 목소리와, 관현악의 웅장한 음향이 최적의 조화를 이룬 경기소리라는 점에서 출반부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소리꾼 최영자씨는 이번 음반 발표를 계기로 소리꾼으로 사는 삶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지난 세월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리를 배우면서 고통을 엄청 받았어요. 소리를 늦게도 시작했지만 소리가 될 만하니까 신병이 왔어요. 20여 년 전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데,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척추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병원을 찾아가도 의사는 아무런 병도 없다고 하고, 고통만 더 심해지고요. 나중에는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설사를 3년이나 계속하고 제대로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남편에게 제발 나 좀 죽여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기도 했다는 것. 그러다가 내림은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북한산 문수사 등을 찾아가 3천배를 올리기 시작했단다. 3천배를 하면서도 제발 나를 좀 데리고 가달라고 애원을 했다고.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면서 살아왔다. 남들에게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소리를 해도 기운이 없어 제대로 성음을 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요, 무대에 올라가서 가사도 까먹고는 했어요. 그것도 큰 무대에서요. 선생님과 선배들의 나무람은 그렇다 치고라도, 후배들까지 무시를 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죠. 그렇게 고통 속에 살다가 찾아 간 곳이 김혜란 선생님이예요. 거기 가서 서울굿을 선생님께 배우면서 조금씩 소리가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죠.”

 

최영자씨는 삶의 고통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피하고 싶은 현실, 그리고 남들에게 말 못할 고통. 하지만 소리가 있어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고 토로한다.

 

 

앞으로 소리공양을 하고 살아갈 것

 

김혜란 선생님께 제가 이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음반을 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선생님께서 녹음실에 와서 소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도록 도와주시기도 하고요. 선생님께는 지금도 공부를 하러 다니고 있어요. 관현악에 맞추어 소리를 하다가 보니 민요의 굴곡진 맛을 제대로 표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가 마음속에 서원을 한 것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죠.”

 

무대에 오르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소리를 하면 굿판처럼 신명이 난단다. 그런 만큼 그녀 자신의 소리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소리꾼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밝혔다. 한 사람의 소리꾼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제 진정한 소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소리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기를 바라고 있다.

 

제 음반을 절 종무소에 갖다드리고, 그것을 팔아 기금으로 사용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서원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은 꼭 지키고 싶어요. 그동안 남들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아픈 과거를 털어놓으니 속이 다 후련하네요.”

 

무당(巫堂)’, 사회에서는 심심찮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부 종교에서는 심할 경우 마귀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당은 한 때 최고의 권력자요, 신을 대신하는 집제자이기도 했다. ‘()’란 글자를 혹자는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늘(무자의 위 획)과 땅(무자의 아래 획)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무자 안의 두 개의 사람 인). 그리고 그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l이을신자이다) 것이 바로 무당이다.

 

무당은 본인이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당은 신내림이라는 무의식을 통해 태어나거나, 지연신통(自然神通)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무당이 된다. 하기에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접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강신무(降神巫)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세부터 신병을 앓았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6에 거주하는 임영복(, 59). 굿판에서는 소리 잘하고 춤 예쁘게 추는 무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지금은 내놓고 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무당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수많은 외래종교가, 혹은 사회가 이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고통 속에서 살아왔단다.

 

어려서부터 정말 힘들게 살아왔어요.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요.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그냥 사용하려고 했데요.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나서 아버지를 따라 증평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집을 하나 구해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가 몹시 편찮으셔서 그 집과 땅을 처분하고 고모네 집으로 들어갔죠.”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환란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몸이 자주 아프고 병치레를 해 고모가 점집을 찾아갔더니, 무당이 하는 말이 그 아이를 무당 집에 양녀로 주어라. 그래야 그 아이가 살 수 있다고 하더란다. 그때만 해도 남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면, 말이 좋아 양녀지 식모나 종과 다름없이 부려먹고는 할 때였다. 할 수 없이 고모가 데리고 살다가 23세에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부터 이미 신병이 시작한 것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젊어서 결혼을 해 벌써 37년이란 세월을 살았네요.”

 

결혼 후 심해진 환각과 환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역시 하나 뿐인 딸을 찾았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시집을 오고 나니 시집에는 시부모님들과 삼촌들까지 대가족이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연탄불에 밥을 해야 하는데, 매일 5개씩의 도시락을 싸야 했단다.

 

그런데 밥을 하고 솥뚜껑을 열면 밥 솥 안에 구더기 같은 것들이 뱀처럼 바글거렸어요. 그러면 놀라서 곁에 있는 설거지통에 물을 들이붓고는 했죠. 아침마다 수도 없이 골목길을 파고 한 솥씩 밥을 갖다가 묻었어요. 이 집에서 오래 살다가는 아무래도 제 명을 못 살 것 같아 남편을 졸라 분가를 했죠.”

 

 

그렇게 나가서 생활을 한 곳이 바로 병점이라고 한다. 집에 있으면 날마다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프고 배가아파 기침을 하면 병원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피가 넘어오는데도 병원에서는 신경성 위장염이라고 했단다.

 

의사에게 욕을 하고는 했어요. 각혈을 하는데 무슨 신경성 위장병이냐고요. 남편은 그런 나를 믿지 않고 사람으로 대우도 해주지 않았어요. 그런 상태에서도 제가 계속 내림을 거부하니까 잡자기 둘째가 아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겁이 덜컥 났죠.”

 

믿어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고통도 받아

 

이미 신통이 되어있는 상태라 환청과 환각으로 참을 수가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심지어는 3개월이나 6개월씩 대소변을 받아내고는 할 정도로 심하게 몸이 망가졌다. 몸무게도 40kg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에게 사업을 그만두라고 했다. 남편이 망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남편은 무시를 하고 듣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는 것이 눈에 보여 그만두라고 했더니 네가 뭔데 그만 두라느냐고 무시를 하데요. 결국엔 말 그대로 망했지만요. 내림을 받고서도 풍파는 가시질 않았어요. 우선은 시집에 알릴 수도 없었지만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도 친구를 마음대로 집으로 한 번도 데려오질 못했으니까요. 거기다가 집에서 징소리가 나면 아이들이 제 시간에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요. 부모님들을 거역하기 일쑤였죠.”

 

 

그렇게 내림을 받고도 한참이나 고통을 받았단다. 현재 살고 있는 수원 연무동 시장 인근에서 고기 집을 시작했는데 그것도 다 날려버렸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생전 장사라고는 해보지 않았으니, 남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기자(祈子)라면 제대로 굿을 해야

 

한 번은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에 스님이 찾아 오셨데요. 그런데 남편을 보고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손금을 좀 보자고 하더니 손금 안에서 여인이 고깔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이더라고 했데요.”

 

그때는 이미 내림을 받고난 후였다. 처음에 내림을 받고난 후에는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일도 꽤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심하게 단속을 시작했고 애꿎은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굿은 보통 밤에 하기 때문에 밤새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디 가서 누구와 무슨 짓을 하고 왔느냐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참 힘든 세월이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없애고 나서 전안 문을 걸어 잠가놓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죠. 거기서 단판을 지으려고요. 참 울며불며 매달렸더니 제자야 나하고 같이 팔도유람이나 하자는 말이 들렸어요. 그리고는 벌써 10년 정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지금은 남편이 제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어요. 아이들도 이젠 다 커서 이해를 하고 있고요.”

 

 

무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누구나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영복씨는 어려서부터 신병이 와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벌써 신내림을 받은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제가 기자들에게 굿과 소리를 가르치는 것은 저라고 남들보다 잘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신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절차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떻게 신령의 이름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굿거리 제차를 무시하면서 밥을 먹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지하에 조그마한 연습실을 조성해 놓고 사람들을 일대 일로 가르치고 있어요.”

 

60년 세월 중에서 50년을 시달렸다. 그나마 이제야 겨우 좀 편안해졌다고 한다. 앞으로도 신령의 사람으로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내 운명이 그렇다면 좀 더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단다. 문을 나서는데 인사를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오랜 여운을 남긴다.

 

어차피 이렇게 고통을 받고 살 운명이라면, 차라리 아프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당을 택했어요. 남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10월 10일 오후, 서장대에 올랐다. 늘 돌아보는 화성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화성 때문에 어쩌면 수원을 잊지 못하는가 보다. 서장대에서 화서문을 돌아 돌아오는 길에, 장안동 화서문로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항상 보는 느끼는 것이지만 유난히 신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많은 골목이다.

 

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령을 모시고 남을 위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지나는 길이다. 무속에 대한 책을 십여 권을 쓰고, 방송 일을 할 때도 무속에 대한 프로그램만 만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데 딴 집과는 달리 낯선 간판이 하나 보인다. ‘칠성궁 제석당’이란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터라, 무조건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새내기 제자 칠성궁 제석당

 

문 앞에는 ‘새 신제자’란 글이 보인다. 30세쯤 됐을까? 잠깐 소개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속인들은 신을 모신 곳을 ‘전안’이라고 한다. 그 신당부터가 딴 집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울긋불긋한 무신도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갈하니 글로 써서 신령들을 모셨다. 그 앞으로는 산신, 용왕, 대신할머니의 상이 좌정하고 있다.

 

붉은 색을 띤 조명도 없다. 대신 신상 앞으로는 축원카드가 나란히 놓여있다. 아마도 축원중인 신도들인 모양이다. 한편에 놓인 점상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든지, 책상 위에 종이와 연필 등이 놓여있다. 수원시 장안구 315-2, 3층에 마련된 황인애(가명, 여, 30세)를 그렇게 만났다. 이제 겨우 전안을 차려놓은 지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단다.

 

 

 

신병으로 인해 술로 보낸 20대

 

전안에서 만난 황인애에게 내림을 하기 전에 어떤 무병(巫病)을 앓았느냐고 물었다.

 

“23세 정도 되었는데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입에도 못 대던 술을 무지하게 먹어댔죠. 그러다가 보니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그마한 가게라도 열 생각으로 열심히 모아두었던 돈을 다 탕진하고 말았어요. 이상하게 몸이 아픈데 딱히 병명도 나오지 않고요. 무릎에 물이 잡히고 십자인대가 다 망가졌다는 거예요. 수술을 해도 걸을 수는 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없다고 병원에서 이야기를 하고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생전 처음 점집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병이니 신령을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 그러나 선뜻 그런 것에 동조를 할 수가 없어 많은 고민을 했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몸에 진동이 와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소변을 보고나면 몸서리를 치잖아요.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떨림이 오기 시작하더니, 그 떨리는 시간이 멀지 않고 매초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잠을 못자 무섭기도 하고 밤새 울었죠.”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저것이 날마다 술을 먹더니 미쳤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단다. 일 년 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날마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조차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황당한 것이었다고.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저수지에 마네킹이 빠졌는데 건져놓으면 사람이 되거나, 제가 산에 배를 타고 올라가거나, 애들이 옷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오거나 하는 꿈을 꾸었어요. 또 모르는 남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놀래기도 하고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니면 밤새 여자들의 노래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이런 이야기로 미루어 황인애는 이미 자연통신이 된 상태에서, 3년 전에 내림굿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림굿을 받고 난 후,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는 다리가 아픈 것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가리를 잡고 나서 관악산을 여럿이서 갔는데, 그 꼭대기를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죠. 몇 발만 걸어도 무릎 통증이 심했거든요. 그런데 몇 발 옮겨보니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그래서 동행을 한 사람들에게 먼저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단박에 정상까지 올라갔죠. 참 지금 생각해도 신병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어요.”

 

‘타인능해’가 되고 싶다는 그녀, 무당이라 상처도 받아

 

내림을 받고 일 년 동안은 선생을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면서 허궁 기도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에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올 6월에는 채널 A라는 TV에 출연도 하면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 왔어요. 덕분에 생활이 조금 여유로워지고요. 그래서 모인 쌀을 갖고 경로당을 찾아갔는데 필요없다고 가져가래요. 아마도 제가 무당이라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상처를 받기도 했단다. 생활에 꼭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도울 생각을 했지만, 돈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돌아오고 말았다고.

 

“전남 구례 운조루에 가면 타인능해라는 쌀독이 있어요. 저는 그렇게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돈이 조금 모이면, 공부를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요. 제가 신령들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젠 그것을 없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도 해야죠.”

 

생각하는 마음이 착하다. 팔달산을 한 바퀴 돌아보겠다고 일어서는 그녀를 보면서 세상엔 참 별별 사람이 다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늘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는 그녀의 생각에 고마움을 느낀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모든 사람이 열게해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하라' 라는 뜻.

조선시대 영조때 류이주 선생은 자신의 가옥 '운조루' 안 뒤주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他人能解' 라는 글귀를 써두어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꺼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네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고 있다.


고성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큰 만신이다. 스스로를 ‘만신’이라고 자처하는 고성주는, 4대 째 경기도 굿제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고성주를 비롯한 3대가 독자적인 가계로 이어진다. 중간에 고성주에게 내림굿을 주관한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를 빼고도, 조모 - 고모 - 고성주로 이어지는 순수한 무가(巫家)의 집안이다.

 

물론 그 윗대의 만신들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굿거리의 절차는 항상 대물림을 하면서 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계의 전승은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가장 큰 자산으로 본다.

 

 

어려서부터 익힌 춤과 노래솜씨 뛰어나

 

“저는 만 18세가 되던 해 내림을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수원에서 살았는데, 몸이 아파 이천으로 다시 내려가 살았어요. 그러다가 다시 수원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일 년이면 한 두어 달만 괜찮고 나머지는 골골했죠. 그러다가 화성재인청 이동안 선생님께 가서 재인청 춤과 소리 등을 배우면서 몸이 좀 좋아졌어요. 당시는 저를 보고 초립동이라고 불렀죠.”

 

어려서부터 기구한 삶을 살았다. 몸이 마르고 며칠씩 물 한 모금 먹지 않다가도, 또 먹을 때는 엄청 먹어 치웠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해 주변에 눈총을 산 일도 허다했단다.

 

“내림을 받고나서 이천 대월면 송라리 뒷산을 대명산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탱화하고 놋쇠그릇, 관음보살, 대감항아리, 책 두 권을 가져왔어요. 예전에는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제 뿌리가 그곳인가 봐요.”

 

 

고성주는 요즈음의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내림을 받고나서 문서를 익히고 재주를 익히는데 한 10년은 실히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은 적어도 그 정도의 학습기간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처럼 몇 달 뚱땅거리다가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세월은 배워야 안택굿의 장단 가락, 징, 춤사위, 거성, 노래, 사설 등을 익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점을 신을 모시기 전부터 보아 주었어요. 괜히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고요.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 어머니 집에 와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굿을 하러 가면 사람들을 보고 얼마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한 3년 신어머니 집에서 음식 하는 법 등을 배웠는데, 당시는 머슴살이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점을 보아주고 굿을 떼고는 했죠. 그러다가 한 3년 뒤에 최씨 어머니가 전대자루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나가서 시주를 해오라고 하데요. 그래서 인계동서부터 매교동 일대까지 3개월을 다녀서, 돈 67원하고 쌀 두말 조금 넘게 걷었어요. 그래서 내림을 했죠. 굿을 처음 한 것은 내리면서 바로 굿을 했어요. 수원 큰 만신들이 굿판에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빨리 배웠죠.”

 

첫 굿판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처음 굿판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난리를 쳤단다. 당시에는 밤을 새워 굿을 했는데, 사람들이 춤 잘 추고 소리 잘하는 애기만신이 나왔다고 자리를 뜨질 않았다는 것. 경기도 안택굿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질문에 깊은 한 숨을 쉬기도 했다.

 

“경기안택굿은 굿 속에서 마음에 닿는 느낌이 있어요. 사람들을 울리고 웃고,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굿이에요. 예술적이면서도 신성이 함유된 굿이고요. 특히 굿판에서 세상사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굿이죠. 한 마디로 살아있는 굿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부 사람들은 경기도 안택굿이 서울굿과 비슷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예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양 성내에서 굿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서울에 안택굿이 있을 수가 있었겠어요. 수원을 비롯해 안산, 시흥, 화성, 용인 등지에서 큰 만신들이 많이 나왔던 것을 보아도 경기도 안택굿이 본류라고 보아야 하죠.”

 

선대의 신어머니에게서 학습을 할 때는 주로 어떤 것을 배우게 되었는냐고 묻자, 옷 개는 법, 굿의 순서대로 무복을 착용하는 법, 상 차리는 법, 상 차리는데 필요한 음식, 떡, 과일, 전, 사탕, 밤, 대추, 나물, 적 등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까지를 다 배운단다. 그리고 나면 바라, 징, 장고 치는 법 등을 익히고. 그 후에는 덕담과 사설, 소리 등을 배워야 한다는 것.

 

 

경기도 굿은 독창적인 지역의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은 사설이 많아서 어떻게 소리를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등도 배웁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해야 하는 예의범절 등까지 배우게 되죠. 그래야 전통 안택굿의 맥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학습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제자들을 배출한 것은 자신이 학습을 하고 난 뒤 10년 정도가 지나서부터 가르쳤단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학습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선대에게서 배운 학습을 복습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는 것. 요즈음 많은 무속인들이 남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애가 타기도 한단다.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배워야하는데, 요즈음은 그저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굿을 배운 제자들이 한 120명 장도는 될 거예요. 현재는 18명 정도가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배우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아파요. 어렵기는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배우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만큼 경기전통 안택굿은 배우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은 가르쳐 주어야죠.”

 

굿판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굿을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집에 굿을 하러 가면 큰 만신들이 안당제석을 하라고 한 후, 굿을 마치고나면 느낌이 없다고 굿을 다시 하라고 한다는 것. 그럴 때면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속으로는 울면서 굿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 때 선생님들은 신복 접는 법을 한번 알려주고, 그걸 따라하라고 해요. 못하면 바로 지청구를 받게 되죠. 정말 힘들게 굿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굿이기에 지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워낙 험하게 다루셨으니 까요. 자존심도 버리고 살아 온 세월이죠.”

 

 

 

8세에 내림굿을 받은 고성주의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는, 고성주의 친고모인 제주 고씨의 신딸이다. 또한 제주 고씨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남양 홍씨를 신어머니로 모셨다. 남양 홍씨는 고성주의 증조모이자, 제주 고씨의 친정어머니이다. 하기에 고성주의 신의 계보는 남양 홍씨 - 제주 고씨 - 경주 최씨 - 고성주로 이어진다. 이들 굿의 세계는 근 100년 이상을 경기도굿을 본바탕으로 이어오고 있는 무가(巫家)의 내력이다.

지난 7일 KBS 2TV '여유만만‘에서 자신이 인기가수 김아무개의 전처였고, 1980년대 고등학생 때 CF 모델 및 영화 주연배우까지 섭렵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밝힌 박미령. ’여유만만‘에 나온 박미령의 이야기로, 오늘 하루 종일 온통 인터넷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인기를 뒤로 하고, 21살 어린나이에 결혼했지만 신병을 앓으며 남편과 아이 가족들을 떠나보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날 방송에서 박미령은 자신이 신병을 앓으면서, 아버지마저 "우리집안에 무당은 없다"는 말로 자신을 내쳐 죽음을 기도했기도 했지만, 차가 폐차가 될 정도로 큰 사고에도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아 자신의 운명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KBS 2TV '여유만만' 화면 갈무리


'신병'의 실체는 무엇인가?

‘무병(巫病)’ 혹은 ‘신병(神病)’ 이라고 부르는 병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먼저 궁금해 할 것 같아 해답을 밝힌다. 신병을 앓기 시작하면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대답은 ‘없다’이다. 신병에 깊숙이 전이가 되면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만 그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신내림’ 뿐이다.

신내림이란 내림굿을 거치고 바로 ‘무당(巫堂)’, 혹은 ‘기자(祈子)’의 길로 들어서는 것뿐이다, 아무리 아픈 사람도 그 길로 들어서면 씻은 듯이 병이 낫는다. 이것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결국 신을 모시는 제자가 되어야만, 그 다음부터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병은 누가 앓게 되는 것일까? 누구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신병을 앓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신병을 앓게 되면 여러 가지 증상이 오게 된다. 그 증상을 미리 알았다고 하면, 그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병(神病)’의 증상 어떤 것이 있나?

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증상을 거치게 된다. 그 첫째는 ‘물질의 병’이다. 이유도 없이 몸이 아프거나 하여 병원을 찾아도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를 않는다. 결국 돈을 들여 이리저리 병원을 찾게 된다. 이 물질의 병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갑자기 아프다거나 사고 등으로 물질이 축나는 것이다. 결국 가진 것을 다 잃고 난 다음에 신내림을 받게 된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신병’이다. 이 상태는 대개 ‘환시(幻視)’, 혹은 ‘환청(幻聽)’을 거치게 된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신병을 앓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지만, 정신이상은 아니다. 이 병을 앓게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런 상태가 되면 무병이 상당히 깊이 전이가 된 상태이다.

‘인다리(=人橋)’ 까지 거치기도

그렇다면 신병을 앓는 사람들이 죽을 수 있나? 답은 역시 ‘없다’이다. 신병을 앓는다는 것을 알고 손목을 칼로 긋는 사람도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다. 목을 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하다. 아무도 죽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목숨이 자신의 것이 아닌, 신령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병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인다리’이다. 인다리란 말 그대로 사람으로 다리를 놓는 다는 말이다. 이 인다리는 신병에 걸린 사람이 계속 신내림을 받지 않을 경우,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사람씩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서 신내림을 받은 사람도 있다. 가족 5명이 모두 사고가 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고란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병을 앓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박미령. 물론 방송에서 그런 것을 일일이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병이다. 박미령은 어머니가 먼저 알고 내림을 받으라고 종용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받아야 할 내림굿을 거부하자, 그 신병이 박미령에게로 전이가 되었다고. 그래서 자신도 자식에게 전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신내림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무속에서는 이런 경우를 ‘부리’가 있다고 한다. 부리란 바로 ‘뿌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선대가 무속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면 그 자손들이 바로 무속신과 접하게 되고,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가 결국엔 내림을 받아야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받았다고 하면, 박미령은 그 신병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

한창 잘 나가던 박미령. 지금은 그저 방송에 나와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느라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인지. 무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 고통의 세월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저 글로 간단히 성명할 만한 그런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방송에 나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박미령. 앞으로 올곧은 신제자로써, 정말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주) 정말 쓰기  싫었던 글 하나 씁니다. 20여 년이 넘게 무속을 연구한다고 전국을 다니면서, 그들의 아픔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요. '신병'이란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그 고통을 모릅니다. 지금 담담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박미령을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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