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부석사(浮石寺). 우리는 흔히 부석사라고 하면 경상북도 영주시에 소재한 부석사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서산 부석사도 영주 부석사와 같이 한자로도 사찰명이 일치한다. 서산 부석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 한 절로 전해진다.

 

부석시 일원은 도비산의 강무지로 알려져 있다. 강무지란 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군사훈련을 한 곳임을 말한다. 조선조 제3대 태종이 14162163남인 충령대군(후 세종)과 함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하였다. 임금이 직접 참여한 이러한 군사훈련을 강무(講武)’라 칭한다.

 

훈련이 끝난 후 태종과 충령은 해미현에서 숙박을 한다. 원래 이 강무일정은 28일에 서산에 도착하였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210일까지 서산에서 머물고, 11일에 태안 순성에 이르러 15일까지 굴포의 개착상황과 여러 곳을 거쳐 도비산에서 강무를 연 것이다. 태종이 이곳을 강무지로 택한 곳은 도비산 일원이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큰 돌이 허공에 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부석(浮石)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4년인 650년에 복흥사라는 절에 의상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은 큰 뜻을 품고 당으로 가서 지엄법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의상이 있던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낭자가 의상스님에게 반하고 만 것. 그래서 문무왕 1년인 661년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하자, 선묘낭자는 자신의 마음을 의상에게 밝혔다. 하지만 의상은 스님이기 때문에 허락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나려하자 선묘낭자는 스님의 복색을 하고 의상을 따라가 평생 시종을 들 것이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도 물리치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뒤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해동 조선으로 나왔다고 한다. 의상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묘낭자를 위해, 절을 세워주기로 하고 절터를 찾던 중 서산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것도 무릅쓰고 절을 계속 짓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 때 큰 바위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오더니 공중에서 큰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이 큰 바위로 너희들의 머리를 다 부수어놓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허공에서 소리를 친 것은 바로 선묘낭자의 화신인 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절 이름은 도비산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부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이다. 결국 이 부석사는 큰 바위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시민기자들이 찾아간 부석사

 

23일 일정으로 떠난 e수원뉴스 시민기자 워크숍. 그 첫날인 828일 서산 해미읍성을 거쳐 간월암의 풍광을 만난 후 찾아간 부석사. 지난 해 11월 이곳을 들려간 후 10개월 만에 다시 찾은 부석사이다. 이곳은 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픈 곳이다. 이 부석사에 봉안이 되어있던 700년 전인 고려 충숙왕 때 부석사에 봉안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전문 절도단에 의해 일본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반입이 되었다.

 

이 절도단은 자신들이 도적이 아닌 애국자이기 때문에 범법자로 재판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국민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한 아픔이 있는 절 부석사를 찾은 시민기자들. 경내를 다니면서 사진촬영을 하고 꼼꼼히 기록을 하기도 했지만, 과연 이 부석사에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고는 있는 것일까?

 

 

선묘낭자의 모습을 담아 모셔놓은 선묘각에 들려 삼배를 올린 후 다시 새롭게 조성한 마애불상 앞으로 다가선다. 저 밑에 보이는 마을길을 달리는 차들이 조그마한 장난감만 같다. 마애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여정의 무사함을 기원한다. 그리고 의상스님을 사모해 애틋한 사연만 남기고 용이 되었다는 선묘낭자가 다시는 그런 아픔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전해본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10월 수원화성문화제가 끝난 다음에 실행하던 워크숍이 올해는 8월 말에 실행에 들어갔다. 애초 30명 정도가 워크숍에 참가 할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인원이 선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에 갈 수가 없다고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8일 오전 830분에 시청 인근에 모인 시민기자들은, 9시경에 출발을 하여 제일 먼저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순방지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것은 해미읍성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부터 세종 3년인 1421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해미읍성 순교의 아픔은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수령 3백년 경의 회화나무 한 그루이다. 이 나무는 현재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790년부터 1880년에 이르기까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난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을 한 현장이다.

 

 

오래 전 해미읍성을 찾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옥사.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옥사는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작업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35년에 간행 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내옥과 외옥이 있었으며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 옥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자리개란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짚으로 만든 굵은 줄인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이다. 즉 곡식 단을 굵게 묵어서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쳐 단에 묶인 곡식들을 기구에 내리쳐 낱알을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해미읍성 서문밖에 이런 자리개돌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개돌은 자리개질로 사람들을 죽이던 순교의 형장이다.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이 돌다리위에서 자리개질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지에 보관중이던 것을, 생매장 순교 성지인 여숫골로 옮겨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볼 수 았는 자리개 돌은 모조품이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 첫발로 내딛은 해미읍성. 교황의 방문지이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순교지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들. 옥사 안을 돌아보던 한 관람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이곳이 교황님이 다녀가신 곳이란다. 옛날에 이 성 안에서 많은 분들이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거든. 저 옥사에 칼을 쓰고 있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것이지. 그런 많은 분들의 순교가 있어 우리가 편하게 종교의 자유를 갖는 것이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23일의 워크숍 일정 중 가장 먼저 만난 해미읍성과 순교지. 그 안엔 '왜 교황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을까'라는 해답이 있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앞으로 화석연료가 고갈될 것을 대비해, 무동력 이동수단으로 이용해서 생활을 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기록은 기록을 맡은 사람들의 몫이다. 시민기자들은 생태교통 현장인 행궁동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일’들을 기사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태교통 수원2013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기자들이 할 일이란 단순히 기사만을 올려, 사람들에게 홍보만 하면 되는 것일까? 생태교통이 시작한지가 벌써 22일 째이다. 오늘까지 합해 앞으로 폐막일인 10월 1일까지 꼭 10일이 남았다. 그 10일 동안에 많은 행사가 준비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행사는 바로 제50주년을 맞이하는 수원 화성문화제이다.

 

 

화성문화재와 맞물린 생태교통

 

화성문화제는 올 해로 반백년을 맞이했다. 참 길고도 긴 세월을 화성문화제는 세상에 수원과 수원사람, 그리고 화성과 문화 등을 알렸다. 그 화성문화제가 생태교통의 끝자락과 맞물려 있어, 그 기간 동안에는 수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생태교통을 찾아 온 사람들이 60~70만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추세라면 처음에 65만 명 정도가 다녀 갈 것이라고 했던 생태교통 관람자수가 100만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생태교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생태교통은 단순히 기록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생태교통은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그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자들의 기록이 중요한 이유

 

물론 생태교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동력 전기 차나 자전거 등을 이용하는 모습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이동수단을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 기록 또한 중요한 일이다. 많은 이동수단들을 어떻게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생태교통 안에는 그런 것 이외에도 많은 기사거리들이 있다. 행궁동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변화, 행궁동을 찾아 온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야기들이 날마다 생태교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로 22일 째 생태교통 현장에 나와 있다. 물론 개막 이전부터 나온 것을 따진다고 하면 벌써 한 달이 넘게 생태교통 현장인 행궁동을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생태교통에서 촬영한 사진만도 천여 장에 이른다. 그 모든 것이 생태교통의 자료들이다. 기자란 다만 그것을 보고 기사를 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소소한 이야기들도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기사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태교통의 재미와 중요성을 알려주어야만 한다.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이 생태교통에 대한 많은 기사를 올린다. 그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기록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생태교통이라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의 일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00여명이 넘는 시민기자들이 생태교통 현장을 누비면서 기록을 했다고 치면, 그 얼마나 대단한 자료가 될까?

 

앞으로 남은 10일. 더 많은 시민기자들을 생태교통 현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현장을 뛰며 쓴 기사들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생태교통을 만나러 행궁동으로 모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중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시민기자들의 발품으로 인해 기록이 되어, 생태교통의 자료로 남는다고 하면 얼마나 뿌듯할까? 남은 10일 동안 최선을 다해 생태교통을 기록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 낮의 뙤약볕 아래서 취재를 하다가 보면, 솔직히 이런 분수대에 뛰어 들고도 싶었다 


 

누가 시킨다고 할 일인가? 아니면 더 많은 돈을 지불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곳에 떡이라도 숨겨 놓았을까? 모두 다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이, 스스로 그 땡볕으로 나가게 한 것이다. 벌써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매일 30도를 훨씬 웃도는 땡볕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쏟은 땀만 해도 엄청날 듯하다.

 

사람의 체력은 한계가 있다. 누구나 강철 같은 체력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이 된 사람이라도 올 여름 같은 때는 대책이 없다. 거기다가 시원한 그늘에서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니는 곳마다 지열이 후끈거리고 올라온다. 얼음물을 준비하지만, 그도 얼마 버티지 못한다.

 

 

생태교통 수원2013’을 말하다.

 

시민기자. 그저 편안하게 글을 써도 된다. 아주 편안하게 취재를 하고, 그것을 글로 쓰면 되는 전문적이지 않은 기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기자의 개념이다. 사실 모든 시민기자들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기사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도 없다. 그리고 기사를 꼭 써야한다는 의무도 없다.

 

그런 시민기자의 편안함을 버린 지 오래이다. 생태교통 수원2013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난 늘 그 현장에 있었다. 누가 등을 떠밀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 땡볕 아래서 골목을 누비면서, 생태교통 시범지역을 마치 안방처럼 돌아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생태교통이 밥 먹여주남?‘이라고. 생태교통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생태교통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는 해준다. 알고 보면 이 무더위도 그동안 화석연료와, 무분별하게 사용한 화학물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누가 사용을 했을까?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 자손들에게 무엇을 알려주어야 할까?

 

그것이 바로 내가 생태교통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생태교통의 책임자도 아니다. 나 하나 없다고 생태교통이 잘못 되어지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 뙤약볕 아래서 돌아다니며 자질구레한 기사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나에게 무엇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생태교통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난 솔직히 우리의 후손들에게 미안함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구는 후손들에게 빌려온 것이다. 이런 철학적 용어는 나에게는 맞지 않는 문구이다. 그런 복잡한 문구로 생태교통이나 이 지구의 온난화 현상, 그리고 자꾸만 불편해져만 가는 우리 주변의 이상기후들. 그런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 것이다. 생태교통에 관한 어떠한 작은 기사라도, 현장을 다니면서 충실히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겠다고. 그것이 곧 한 사람이라도 이 현장으로 물러 들일 수만 있다면, 난 내 일을 다 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난 그래도 행궁동으로 간다.

 

더위를 먹는다.’라는 것이 이런 것이야. 낮에 점심을 먹고 다시 생태교통 지역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영 속이 불편하다. 매슥거리면서 금방이라고 토할 것만 같다. 점심을 잘 못 먹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갑자기 속이 부글거린다. 급한 김에 근처에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탈이 났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래도 대행인 것은 근처에 약국들이 많다는 것이다. 땀을 어지간히 흘리며 증상을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더니, “더위 드셨네요.“란다. 더위는 먹었는데 왜 이렇게 매슥거리며 토사가 나느냐고 하니, 너무 햇볕 아래 오래 있어 체력이 고갈된 듯하다는 것이다.

 

그 숱하게 산을 오르며 땀을 흘렸어도 괜찮았는데. 하기야 생각을 해보니 40여일 가깝게 쏟아진 비에 이어, 연일 33도를 웃도는 뙤약볕 아래 있었다. 탈이 날 만도 하다. 약을 먹고 조금 시원하게 있다가 보니 정신이 돌아온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일거든 다니라는 시민기자의 말이 생각난다. 서늘해 질 시간이 되었나? 난 행궁동으로 가련다.

3. 5 생태교통관련 기자회견 중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를 한다. ‘무슨 기사를 그렇게 많이 쓰세요?’라고. 글쎄다. 이런 질문이 나에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을 한다. ’기자가 기사 안 쓰면 무엇을 하나요?‘라고. 참 바보 같은 질문에 바보 같은 대답이란 생각이다. 기자는 당연히 기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기자의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기자가 아닌, ‘시민기자’라는 것이다. ‘시민기자’, 한 마디로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일까? 난 늘 ‘시민기자도 기자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취재를 하고, 당당하게 기사를 쓴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서 쓰는 기사가 아니라, 현장을 뛰면서 나름 노력을 하고 쓰는 기사이다.

 

일년동안 300개가 넘는 기사를 섰다. 시민기자는 한 달에 10개의 기사만 고료를 준다 

 

나에게 물었다. “미안하지 않으세요?”

 

언제인가 잘 아는 시민기자 한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 대답은 단호하다. “기자가 기사 쓰는데 왜 미안해야 하며, 미안할 일이라면 기자 그만 두어야죠.”라는 대답이다. 기자가 현장을 누비며 취재를 하고 그것을 기사화하여 올리는데,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긴 이런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기자들은 한 달에 기사가 10개로 제한이 되어있다. 그런데 한 달에 40개 가까운 기사를 쓰다가 보니, 온통 한 사람의 기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같은 기사를 계속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때마다 다른 기사를 올리고 있으니.

 

2, 25 특별공로기자로 염태영 수원시장으로 부터 위촉장을 받고 있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 자긍심을 가져야

 

사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라고 하면, 명함을 받아 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한 마디로 일간지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시간으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리게 되는, ‘빠른 알리기’라는 e수원뉴스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SNS시대이다. ‘누가 가장 현장에서 소식을 빨리 전하는가?’. 이것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e수원뉴스야 말로 수원을 가장 빨리 홍보할 수 있는 보도매체이다. 더구나 180명이나 되는 시민기자들이 수원의 곳곳을 다닌다.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일이, 기사화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것을 가장 빠르게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민기자들이다. 사실 이런 시민기자들이야 말로 두려운 존재일 수가 있다.

 

남들이 가지 못할 곳을 다닐 수가 있고, 남들한테는 ‘이것이 무슨 기사가 되지’하는 것들이 기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릴라식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양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민가자들이다. 어찌 두려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시민기자 1년, ‘나는 전업시민기자이다’

 

2012년 8월 13일, 처음으로 e수원뉴스에 기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만 1년이 된다. 그동안 수원 곳곳을 참 많이도 헤집고 다녔다. 1년 동안 300개가 넘는 기사를 썼다. 물론 그 중에는 사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사는 이야기조차 난 현장에서 기사를 썼다. 그것이 생리에 맡기 때문이다.

 

시민기자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이 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 하지만 나는 ‘전업시민기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 내 일이다. “날도 더운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라는 바보 같은 질문도 받는다. 기자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데,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어떻게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동안 열심을 낸 덕분일까? 이제는 수원이라는 곳 어딜 가도 알아보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이기보다는, 그냥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로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나는 나와의 처절한 싸움을 해야만 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날이 춥거나 찌는 듯한 더위이거나. 나는 현장에 있었다.

 

지난 일년동안 참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앞으로도 ‘시민기자’로서의 본분 다할 터

 

사실 나이라는 것은 속일 수가 없다. 요즈음 후텁지근한 일기로 한 두 시간만 돌아다녀도 땀으로 흠뻑 젖는다. 아침에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가 저녁이 되면 몸에서 쉰내가 난다. 그렇게 매일 돌아다니다가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천성이 집안에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현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리는 행궁동 일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곳을 가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제는 행궁동을 가면 지니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내가 생각해도 ‘징한 인간이다’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원의 자긍심을 세울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어찌 집안에서 편히 기사를 쓸 것인가? 당연히 현장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해야 옳다.

 

얼마나 더 열심을 낼 수 있을까? 사람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난 이것 하나만은 꼭 지키고 싶다. 내가 e수원뉴스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는 한은, 어벌쩡한 기사는 쓰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최고가 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기자가 되자!.' 이것이 내가 시민기자로서 할 수 있는 나와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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