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있는 효종대왕릉은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효종대왕릉을 가끔 찾아가는 것은, 이 능의 재실 안에 자라는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 때문이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회양목은, 효종대왕릉과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회양목으로는 유일하게 높이 4m 정도의 큰 노거수

 

효종대왕릉의 사적지 안에 있는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다. 꽃은 4∼5월경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달리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회양목이란 나무는 조경수로 많이 심으며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다. 그러나 이 재실 내에서 자라고 있는 회양목은 그 크기가 약 4m정도는 되어 보인다. 옆으로 퍼져나간 가지도 3m 정도로 넓게 퍼졌다. 이 나무는 1673년 구리에 있던 효종대왕릉을 옮겨오면서 재실 안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회양목은 딴 곳에서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가치가 더 크다고도 하지만, 아마 효종대왕의 릉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듯하다. 또한 그 나무를 심어 300년이 넘는 세월을, 탈 없이 이렇게 자랐다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

 

힘들 때마다 찾아간 나무, 인연이 깊어

 

살면서 힘이 들 때면 나름대로 찾아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효종대왕과 인선황후를 모신 영릉이다. 그렇다고 능침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바로 능 입구에 있는 재실을 향한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담장보다 훨씬 큰 회양목이 반겨주기 때문이다. 대문채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일각문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회양목.

 

내가 이 나무를 처음으로 찾아본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한참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거듭하는 바람에 힘이 들 때, 처음으로 이 회양목을 보았다. 아마 그 처음 볼 때도 눈이 내리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만난 회양목 한 그루가 나에게는 큰 의미를 남겨주었다. 우선 이 능이 효종대왕릉이라는 것이 그랬다.

 

 

 

조선조 17대 왕인 효종대왕은 북벌을 꾀했던 왕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쪽으로 남진을 하자, 청은 우리에게 원군을 청했다. 효종대왕은 우리 군대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원군을 보내, 송화강과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런 계기가 아마 북벌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벌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한 효종대왕. 북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이 회양목에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 나무가 대왕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거목에는 기운이 있는 것일까?

 

겨울철에 찾아가도 그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던 회양목이다. 크기도 하지만, 300년이 넘는 시간을 이렇게 당당하니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당시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는 정말 큰 힘을 주었다. 그래서 그 이후 힘이 들 때면 이곳을 찾아, 한참이나 이 회양목을 바라보고는 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회양목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아마 효종대왕의 그 북벌의 기운이 이 나무에 전해진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언제보아도 당당한 회양목. 비록 한 그루가 이렇게 서 있지만, 그 회양목으로 인해 효종대왕의 능이 더욱 돋보인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얼마를 더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천년이고 그 이상이고 이렇게 푸르게 살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나무는 많지만 이 나무가 나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 겨울마다 찾아보는 회양목이다.

이천보 고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추운 날씨 탓인가 문은 모두 비닐로 막았고, 마당은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 이천보가 살았던 집이니, 그 이전부터 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천보는 숙종 24년인 1698년에 태어나, 영조 37년인 17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천보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이곳은 300년 이상 된 고가일 것이다. 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 온 이천보 고가.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번지에 소재하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이다.

 

 

안채는 사라지고 사랑채가 안채로 쓰여

 

이천보 고가에는 안채가 없다. 6·25 동란을 거치면서 안채가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안채가 있었다고 하면 더 멋진 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은 사랑채와 행랑채다. 행랑채 맞은편 건물은 최근에 지은 듯하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각문이 원래 대문의 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ㄱ(기억)자형으로 사이를 벌려 자리한다. 사랑채의 정면 담에 일각문을 내어, 현재는 그 일각문이 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로 사용하는 사랑채는 고종 4년인 18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ㅡ(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지어졌다. 동향인 사랑채는 잘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높이 45cm 정도의 사다리꼴 주추를 사용했다. 사랑채를 마주하고 좌측에 보이는 목조건물인 누마루 방은 고종 때 사랑채를 중건할 때 붙여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마루의 끝과 맞춘 누마루 한 칸과 방, 마루방인 대청과 두 개의 방이 연이어 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붙인 누마루는 3면을 창호로 둘렀으며, 여름이면 문을 모두 열어 바람을 맞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누정과 같은 누마루는 밖으로 돌출이 되는데 비해, 이천보 고가의 누마루 방은 건물 밖으로 돌출이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집 주인의 나아가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있다. 사랑채에는 상고당(常古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항상 옛것을 기억하라는 뜻인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수령 300년의 향나무가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이천보 고가 누마루방 뒤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향나무 한 그루로 인해 이천보 고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고가가 6·25 동란 시에 화를 입었음에도 이 향나무는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인가 이 향나무의 모습이 더욱 신비롭기만 하다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는 이 향나무는 가슴높이의 둘레가 84cm에 높이가 15m나 된다. 이 향나무는 이천보의 선조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수령이 이천보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있다. 이천보는 1698에 태어나 1761년까지 생존했다.

 

이 나무를 이천보의 조상이 심은 것이라고 하면, 결국 이천보 고가는 300년이 훨씬 지났으며, 이 향나무의 수령도 300년 이상이어야 한다. 각종 공해에 잘 견디어낸다는 이천보 고가의 향나무. 아마 이 집안의 끈질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돌담 벽으로 멋을 낸 행랑채

 

행랑채는 안마당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방이 두 칸이 있고 부엌이 있다. 부엌 좌측에는 헛간과 곳간이 있다. 이 행랑채 곳간 쪽의 벽은 돌로 만들었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은, 사랑채에서 볼 때 집안의 전체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또한 무료하게 맨 벽을 바라보기 보다는, 돌담 벽으로 꾸며 나름대로의 멋을 부렸다.

 

 

6·25 동란 때 불이 나서 안채 등이 소실이 된 이천보 고가. 전체적으로는 집 구조가 어떻게 꾸며졌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사랑채와 행랑채의 위치로 보아, 안채의 경우 행랑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가 소실이 되는 바람에 고택으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하여 지방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한 때 이 고가의 모습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을 것 같다.

 

 

 

아픔의 세월이 느껴져

 

300년이 더 지난 이 이천보 고가의 사랑채 뒤에 있는 향나무나 행랑채의 담 벽, 이층으로 쌓은 장대석의 기단 등을 보아도 이 집이 얼마나 운치가 있었던 집이었나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일각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저 어느 시골의 토호쯤이 살았을 그런 집으로 알았을 것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실록에는 이천보가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장헌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느껴 음독자살했다고도 전한다. 강직한 이천보의 성격상 그런 책임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 집이 퇴락해 버린 것도, 그런 주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었음은 아닌지. 긴 세월 사랑채 뒤에서 온갖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 지켜 본 향나무는 알고 있으려나?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산1-5번지에는, 보물 제198호로 지정된 석조관음보살 입상 한 기가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증평 시내에서 보강천을 건너 서북쪽으로 2km 쯤 떨어진 미암1리 미륵댕이 마을에 있는, 이 관음보살입상은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륵사라는 전통사찰 입구에 서 있는 관음보살입상은 1940년경에 송산리에 거주하는 서정옥씨가 불상 옆에 암자를 짓고 기거를 하였으나, 1950년에 암자는 없어졌다. 그 후 1957년에는 마을의 주민들이 보호각을 짓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하여 정성을 드리고 있다.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이 관음보살입상이 서 있는 보호각 앞으로는 수령 320년 정도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증평군 보호수인 이 느티나무는 높이가 17m에, 둘레는 4.8m 정도이다. 보호각 안에 서 있는 미암리 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높이가 2.6m 정도가 된다. 보호각은 주춧돌을 높이 놓고, 살창으로 주위를 둘렀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서 있는 앞으로는 갚게 연못처럼 돌을 쌓아 축조를 했으며, 보호각 앞으로 샘이 솟는다. 아마 이 샘물은 후에 새롭게 조성을 한 듯하다. 느티나무는 뿌리를 들어내고 있을 정도로 고풍스러운데, 관음보살입상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 중기에 제작된 석불

보호각 안에 모셔진 석불입상은 눈썹 사이에 백호가 뚜렷하다. 얼굴은 넓적하고 긴 편이며 눈, 코, 입술 등이 가지런하다. 머리 위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고 몸체는 살찐 느낌을 준다. 목 부분의 뒤로는 훼손이 있었는지 시멘트로 보완을 하였다. 법의는 얇은 비단 통견으로 표현을 해, 어깨에 걸쳐 옆으로 내려졌고 왼손은 복부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연경 한 가지를 들고 있는데, 꽃봉오리가 돋을새김으로 돋아져 나와 흡사 어깨에 혹이 하나 달린 듯하다. 보관의 중앙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고, 보개의 표현이나 의문과 상호 등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불상이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법의의 밑에는 주름을 잡아 통치마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발은 법의 안에 가려져 표현을 생략했다.




고려 중기의 석불 연구에 소중한 자료

증평 미암리 사지 석보관음보살입상은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불상들과는 색다른 형태로 조성이 되어 있다. 이 지역의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석불입상을 보면 높이가 4m 이상이나 되는 거대석불이 많고, 눈, 코, 입 등의 조각수법이 조악한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얼굴의 형태도 토속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비해, 미암리 사지 석불입상은 얼굴의 짜임새가 뛰어나다. 이런 지역의 거대석불과 미암리 사지 석조 관음보살입상과 비교해 볼 때 좋은 연구 자료가 된다.


고목이 된 느티나무와 보호각 안에 보셔진 석조 관음보실입상. 그리고 앞으로 조성이 된 우물 등. 여름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잎을 달고 있을 때, 꼭 한 번 다시 찾아보고 싶다. 올 봄 꽃피는 계절이면 저 석불입상의 어깨 위에 꽃봉오리도 꽃을 피우려나?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253-1 만동마을 안에는,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의 높이는 8m에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가 되는 나무이다. 그동안 답사를 하지 못해, 오랜만에 잠시 짬을 내어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라도 찾아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남원시 덕과면 만동마을 앞을 지나는데, 무엇인가 마을 안에 정자와 같은 것이 보인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안에 정자가 있는데, 문 앞에 석비가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안내판이다. 그러나 멋진 소나무와 함께 자리를 한 정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을 보니, 문화재 지정이 안 된 듯하다.


600년 전에 자리 잡은 만동마을

만동마을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경에 진주 소씨의 ‘소석지’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에 소씨가 터를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 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는 것. 지금은 도로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는 마을은 1,700년 경에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아마 이 소나무 한 그루의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요즈음 시골의 형편이다. 이 소나무나 정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몇 분을 뵈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수많은 시판이 걸려

소나무는 한 옆으로 약간 구부러져 자라고 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정자 ‘문유정(門柳亭)’. 버드나무 문이란 뜻을 가진 이 정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다. 처마 끝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한 가운데는 마루방을 드렸다.




정자 안은 온통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여개가 넘는 게판들이 줄지어 달려있다. 이렇게 많은 게판이 걸려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말한다. 지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문유정’. 특별한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있을 법한 정자이다.

정자 중앙에는 한 칸의 마루방을 놓았다. 사방을 약간 높게 턱지게 만들고, 문은 모두 위로 올려 달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와. 펼쳐진 정경이 시원하다. 마을 끝에 조금 높게 자리를 잡은 정자. 그 모습만으로도 절로 흥이 넘쳐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멋진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자에 설명을 하는 문구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 이정표가 없는 남원, 답사 길에 어려움이 뒤따라

문화재답사를 가장 하기 힘든 곳이 남원이라고 한다. 오직 광한루와 만인의총 정도가 도로 안내판에 표기가 되어있을 뿐이다. 문화재는 큰길가서부터 안내판을 붙여 유도를 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남원 어디를 돌아다녀 보아도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는 보물이나 천연기념물이 있어도 안내판 하나가 없다.

문화재 코 앞에 가야 서 있는 작은 안내판은, 글이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적지 않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남원의 문화재들은 그래서 서럽다. 사람들이 지나치다가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런 혜택마저 누리지 못하는 남원의 문화재들이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지나는 길에 만난 이 아름다운 정자와 소나무의 내력을, 다시 한 번 찾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천연기념물은 봄부터 가을까지 주로 찾아간다. 그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멋스러움을 겨울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모습을 소개한다는 것은, 그 오랜 풍상을 견디며 꿋꿋하게 버텨온 나무에게 누를 입히는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단 하나 소나무만은 예외이다. 사시사철 푸르게 그 멋진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11일, 아침부터 날도 잔뜩 흐리고 바람도 분다. 8시에 숙소를 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바로 답사 길에 나섰다.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천연기념물 제358호인 목현리 ‘구송’이 있다는 것이다. 휴천면에 들어가 구송을 찾아야하는데, 정작 길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 휴천면소재지를 한참이나 지나 함양읍 쪽으로 나온 듯하다. 이럴 때는 그저 당황스럽다. 정확한 주소를 모르고, ‘리(里)’만 알고 들어갔다가 당하는 낭패이다.

천연기념물 제358호 목현리 구송

달랑 안내판 하나, 아쉽다 

고갯마루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다행히 정확하게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신다. 다시 길을 되돌아 면소재지로 들어갔으나, 천연기념물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없다.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냇가에 심상치 않아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송은 가지가 어느 정도 위로 오르다가, 옆으로 퍼져나간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개울 길을 따라 들어 가보니 철책을 둘러놓았다. 목현리 구송이다. 그러나 이 천연기념물인 구송을 알리는 이정표 하나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문화재가 있는 곳은 큰 길에서부터 안내판을 걸어놓는다. 그리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는 또 안내판을 놓아,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이 길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함양군내의 많은 문화재는 바로 코앞에 가야 달랑 안내판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목현리 구송은 밑동에서 가지가 아홉갈래로 갈라져 붙인 명칭이다.

수령 300년의 목현리 구송

천연기념물 제358호로 지정된 함양 목현리 구송은, 면소재지 중심으로 난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냇가에 서있다.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854번지에 소재한다. 반송으로 알려진 이 구송은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본다. 반송은 밑동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 나무를 말한다. 대개의 반송은 나무가 자라면서 옆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목현리 반송은 여러 가지가 나왔지만, 옆으로 자라지 않고 위로 자랐다. 나무의 높이는 13.1m 정도에, 가슴 높이의 둘레는 4,5m 정도이다. 이 나무를 ‘구송(九松)’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가지가 9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목현리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 온 진양 정씨 학산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구송은, 현재는 두 가지는 죽고, 일곱 가지가 남아 있다.




죽 곧은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 같아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죽 곧은 나무는 마치 몸매가 좋은 여인 같기만 하다. 자라는 모습이나 귀한 반송이라는 점을 감안해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했겠지만, 멀리서 보고도 그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나뭇가지는 위로 올라가면서도 조금의 굽힘도 없다. 그런 모습이 굳은 절개를 지닌 듯하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아 절개가 굳은 사람에 곧잘 비유를 한다. 목현리 반송이야말로 그런 느낌을 받기에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는다. 그저 나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나무인 것만 같다. 나무를 돌아보다가 갑자기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팔을 벌려 나무의 둘레를 재는 듯 안아 본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뿌듯함이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람에게 주는 기쁨을 남들은 무엇이라고 표현을 할까?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마을 한편 길가에 목현리 구송의 안내판 하나가 달랑 보인다. 오히려 그 잘 보이지 않는 안내판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런 귀한 나무를 어렵게 찾았다는 기쁨을 맛 볼수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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