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소재한 성주사지. 이곳 금당 터로 추측되는 뒤편에 자리한 3기의 석탑 중 중앙에 위치한 보물 제20호인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인 몸돌을 올리고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사세를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단아한 형태로 서 있는 3층 석탑

 

중앙 3층 석탑의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양 우주와 중앙 탱주를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 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 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이 문짝 모양 안에는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조각을 하고,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다. 나머지 공간을 못의 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훼손은 되었어도 기품은 그대로

 

1층 탑 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10월 초에 성주사지를 다녀왔으니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렇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급할 것이 없는 것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긋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10월 초라고는 해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쌀쌀한 날씨에 찾아간 상주사지.

 

신라는 3국을 통일하고 난 뒤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기 위해, 통일신라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이층 기단을 가진 3층 석탑을 세웠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로 가면서 3층 석탑의 규모는 점차로 작아지는 느낌이다. 이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은 규모는 좀 작아지기는 했어도, 이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탑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기품이 엿보이는 탑이다. 한 마디로 신라의 강력한 국권을 상징하려는 듯, 짜임새가 돋보이는 탑이다. 반려암으로 조성한 3층 석탑은 높이는 410cm이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갈 때마다 한숨만 내 쉬는 성주사지

 

몸돌의 위에 올려진 지붕돌은 끝이 날카롭게 표현을 하였다. 3층 석탑은 부도탑으로도 추정이 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 하나로 적혀졌다. 이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은 이곳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고,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성주사지, 국보와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찰 터. 성주사지를 찾으면 늘 마음이 아프다. 한 때는 백제의 사찰로써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오합사가, 백제가 신라에 망하고 난 뒤 통일신라의 강력한 국권을 상징하기 위한 절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벌써 성주사지를 5회 이상을 찾아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이곳은 사람들의 인적이 없었다. 그것은 대천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보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 성주사지를 찾아오는 발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극히 저조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을 갈 때마다 깊은 한숨만 나온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에 소재한 보물 제19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성주사지 중문지를 지나 석등과 오층석탑, 금당지가 일렬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는 성주사를 지난 106일에 찾아보았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빗방울도 뿌리는 날 찾아간 성주사는, 인적도 없이 고요함뿐이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이 절의 금당 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다. 금당 터 뒤로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양 우주를 새겼으며, 가운데는 탱주를 새겨넣었다.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평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도 기둥 모양인 양 우주를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가서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우아한 모습의 오층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목개석, 몸돌 등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져,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균형미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 두었으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다.

 

대개 신라의 석탑은 기단부 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곳이 옛 백제의 지역이므로 신라와 백제의 석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 시기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이므로, 새로운 양식의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형태로도 보인다. 현재는 상륜부가 사라진 오층석탑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문화재 보호는 개인이 할 수 없어

 

전국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은 어느 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문화재 보호란 해당관청은 물론이려니와,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 개인 등 모든 분야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언론이나 그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것을 종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는 포털 사이트 등은 아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재보호, 참으로 소중하고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늘 문화재보호 운운하는 그런 속보이는 짓거리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정한 문화재보호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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