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없이 화성을 걸었다. 10년 넘게 화성을 촬영하면서 아픔도 보았다. 바로 서장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이 된 사건이다. 지금은 번듯하게 제 모습을 하고 있는 서장대를 바라보면 늘 고마움을 느낀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조대왕은 8일간의 화성 행차 때 이곳에서 밤에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야조가 그것이다.

 

26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과 함께 서장대에 올랐다.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 누구나 이곳을 오른다. 하지만 서장대만 바라보았지, 그 뒤편 서장대의 성벽을 살펴보는 것을 차근차근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벽이 이중으로 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 총안이 있다. 그냥 성벽을 걷는 길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중의 성벽이라니.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보았다. 무심히 지나쳤던 화성 서장대의 밖의 성벽. 참 어지간히 바보라는 생각이 든다. 성벽 위 여장에 난 총안이 아니라 성벽에 총안이 있다. 총안마다 네모나게 단단히 총안 주변을 돌을 쌓았다. 그리고 이곳의 여장에는 틈이 없다. 여장을 붙여 설치를 했다. 중요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적이 왔다면 지례 기겁을 할 판

 

서장대 밖의 성벽을 보다가 또 다른 화성을 만났다. 만약에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면, 가파른 팔달산을 힘들여 올라온 적들이 숨조차 돌리기 전에 미리 기겁을 하고 죽을 판이다. 여장에서만 화살과 총알이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벽에서도 끓는 물과 화살과 총알이 날아온다고 생각을 해보라. 그 자리에서 지례 겁을 먹고 숨이 멎을 판이다.

 

정말 대단한 화성인데 한 번도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것이 아깝네.”

아마 적들이 힘들게 여기까지 기어올라 왔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음이라니

 

서장대 바깥의 성벽을 보면서 놀라움이 이어진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성을 쌓을 생각을 한 것일까? 주요시설마다 여장의 틈을 주지 않은 것도 놀라운데, 이중으로 된 성벽에 난 총안이라니. 새삼 화성의 견고함에 놀랄 수밖에.

 

 

쐐기흔적을 찾아내다.

 

서장대 바깥은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바위를 절개한 흔적으로 보니, 이곳에서도 화성을 쌓을 때 돌을 뜬 곳이다. 수십 번을 이곳을 지나치면서도 돌을 떴다는 생각만 했지, 화성을 쌓을 때 돌을 떠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흔적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중으로 쌓은 화성을 보고난 뒤, 이곳에도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이 여기저기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 있어요.”

김우영 주간이 작은 바위 하나를 가르친다. 작은 돌 하나에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은 자욱이 그렇게 남아있다. 서장대 바깥의 성벽은 멀리가지 않고 바로 밑 바위를 쪼개 쌓았다는 것이다. 하긴 이 꼭대기까지 어떻게 큰 돌을 날라다가 성벽을 쌓았을까? 그 흔적 하나가 화성의 또 다른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화성은 100바퀴를 돌아야 전부를 알 수 있다

언젠가 화성을 답사하다가 만난 어르신의 말씀이다. 그 때는 속으로 ‘100바퀴씩이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화성은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이제야 그 어르신이 정말 화성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날의 오후, 새삼스럽게 화성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전부를 알 수 없는 화성, 정말 100바퀴를 돌아보아야 할 것만 같다. 돌아보면 또 다른 무엇이 놀라게 하는 화성. 오늘 또 화성의 숨어있던 한 곳을 찾아낸다. 답사의 즐거움이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수원시 팔달구 화서 2동 산 41번지 일원에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인 숙지산 화성 채석장이 소재한다. 이 숙지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화성을 축성할 때 많은 돌을 이곳에서 채석을 했던 곳이다.

 

화서전철역 부근 구 연초제조창의 건너편 숙지산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이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성돌의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채석을 한 돌은 수레를 이용하여, 화성의 축성 장소까지 돌을 운반하였다. 숙지산에는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많은 화성의 돌을 떠낸 숙지산

 

숙지산 앞에 조성한 숙지공원에는 이곳이 화성을 축성 할 때 돌을 뜨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하나 보인다.

 

돌 뜨던 터(=浮石所)라고 적어 놓았다. 이곳에서 돌을 떠서 화성의 축성 장소까지 옮겨갔는데, 그 명칭이 재미있다. ‘채석장(採石場)’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부석소(浮石所)’라고 한 것은, 아마도 돌을 떠 옮기는 광경을 묘사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9월 21일 오후에 숙지산 채석장을 찾아가 보았다.

 

 

 

숙지공원에서 주차장 위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곳에서 산길을 타고 오르다가 좌측 능선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수원은 어딜 가나 이런 소나무 숲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아마도 정조의 소나무길을 비롯해, 이렇게 소나무가 많은 것도 다 나름의 뜻이 있엇을 것이다.

 

소나무는 양지식물로 다른 나무들이 자라기 힘든 메마른 곳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바위 틈새에서도 자라나는 소나무들을 볼 수 가 있는 것도, 이렇게 소나무의 자생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색을 변하지 않으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줄기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변하지 않는 절개를 갖는다는 뜻으로 ‘송죽지절(松竹之節)’을 상징하거나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가르치는 ‘송교지수(松喬之壽)’라고 했다.

 

 덤불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운 채석흔적

 

숙지산은 화성을 축성 할 때인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패석을 한 곳이다. 먼저 정으로 구멍을 파고, 그 구멍 안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로 쐐기를 박는다. 그런 다음 나무에 물을 부어놓으면, 나무가 부풀어지는 힘으로 돌을 갈라놓는다. 현재 화성을 돌다가 보면, 이렇게 성돌을 뜰 때 사용한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소나무 숲을 지나 동편으로 난 길을 가다가 보면, 그 좌측 아래에 돌을 뜬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유난히 바위가 많았던 곳이었나 보다. 칼로 자른 듯 암벽이 절개가 되어있는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런데 사진촬영을 하려고 하니, 도대체 앞으로 다가설 수가 없다. 덤불과 쓰러진 나무들로 인해 접근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이번 숙지산 채석장 답사도 그렇고, 지난번에 찾아갔던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도 그랬다. 도대체 주변에 잡초와 여러 가지 불필요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어. 문화재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란 그것이 국보거나 향토유적이거나 모두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이렇게 방치가 되어있는 문화유산들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도대체 이렇게 관리를 하지 않고 있는 담당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말만 하면 인력이 부족하다느니, 예산이 없다느니 하고 떠들어 댄다. 하지만 정말 우리고장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 번 찾아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말로만 떠들어대는 문화재 사랑. 그런 다중적인 마음 씀씀이로 인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오늘도 퇴락하고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성을 걷다가 보면 서문인 화서문서부터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는 유난히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평지이다 보니 그만큼 많은 대비를 해야 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이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반화수류정과 용연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꼭 밤에 달빛이 교교하게 흐르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각양각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만일 방화수류정에서 용연으로 나오고 싶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 바로 옆에, 숨겨진 문인 북암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문의 문루 위에 쌓은 아치형의 용도는?

 

암문은 대개 숨겨 놓았다. 그러나 북암문은 성벽이 양편에 돌출되었을 뿐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작은 성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양편을 검은 벽돌로 쌓은 성벽 안에 움푹 들어가 있는 북암문은 방화수류정에서 동편으로 40보의 거리에 있다. 안과 밖은 모두 검은 벽돌로 쌓았는데, 문의 위에는 둥그렇게 아치형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암문은 비상시에 군사들의 빠른 이동 등을 고려해 만든 성문이다. 더 견고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저렇게 문 위에 아치형으로 벽돌을 쌓아야만 했을까? 물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아치형으로 쌓아올린 벽돌의 쓰임새는 더 중요한데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적이 문을 공격해 오면 아치로 된 벽돌을 무너트려 성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아치형의 구조물이 이런 쓰임새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감히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화성을 겉도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원하게 터진 조망을 바라보는 즐거움

 

북암문을 지나면 갑자기 성이 용틀임을 하며 위로 오른다. 지형이 갑자기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곳은 성 돌을 잘 다듬지 않고 막쌓기를 한 구간이다. 그런 모습이 비탈을 오르는 나그네를 더욱 편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돌출 된 치성 위에 올려 진 전각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병사들이 쉴 수 있는 ‘동북포루’ 창룡문을 향해 걷다가보면 이곳은 비탈 위에 축성을 하였고, 동북포루는 그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다. ‘각건대’라고도 부르는 이 동북포루 위에 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지형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 바로 화성이다.

 

 

 

동북포루는 아래는 돌로 쌓고 그 위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3단으로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 안은 공간을 만들었으며, 총안 구멍 19개와 누혈 11개를 조성하였다. 치성 위에 잇는 병사들을 보호하고 쉬는 공간이지만, 이곳으로 몰려드는 적에게는 참으로 소름돗는 구조물이 아닐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암문, 동암문을 지나다.

 

그 성곽을 따라 걷다가 보면, 푸른 이끼가 낀 성 돌과 하얀색의 성 돌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200년 전의 역사와 현대가, 사이좋게 몸을 부딪치며 성을 이루고 있는가 보다. 그 돌 틈 사이사이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 그저 아무렇게나 성 돌에 기대어 살고 싶은 생명들이다.

 

 

 

밑으로 경사가 진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또 하나의 암문이 나타난다. 바로 동암문이다. 이 동암문 역시 북암문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치 양편에 비예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암문의 너비는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꾸며놓았다.

 

각건대부터 동암문을 지나 연무대인 동장대 밖을 걷는 성 길을 돌아본다. 마치 뱀이 기어가 듯 구불거리는 성곽의 형태가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듯한, 생명들이 자라고 있다. 마치 생명 없는 성 돌이 그 생명을 품어, 스스로 살아나려고 하는 것처럼.

 

 

 

저만치 성벽 위에 동장대의 지붕이 보인다. 그리고 동장대 밑으로 가면 비스듬한 비탈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서서 동장대를 훔쳐보고 있다. 화성의 성 밖 나무들은 왜 그리도 성을 탐한 것일까? 아마도 화성 겉돌기를 하는 내내, 그 해답은 얻어질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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