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소재한 칠장사는 국보와 보물 등을 소유한 고찰이다. 이 칠장사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이 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현재의 칠장사로 옮겨서 보관을 하고 있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하다.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원래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이 산 아래 아란야를 짓고 기도를 하던 차에, 선량치 못한 7인이 찾아와 교화가 되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고려 초기 작품

 

현재 보물 제9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현재 대웅전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눈과 코, 입은 심하게 닳아 제 모습을 판가름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비교적 식별이 가능하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어깨를 감싸 며 밑으로 흘러내린다. 옷 주름은 여러 겹의 U자형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석불의 형태는 비교적 비례가 원만한 편이며,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 손이 다소 큰 편이다. 하지만 머리와 어깨의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조각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신광으로 표현을 하였다.

 

지방의 특징을 보이는 봉업사지 석불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보면 중앙의 문화재와 지역의 문화재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앙의 기능이 뛰어난 석공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석불이나 탑 등은 그 화려함이나 섬세한 조각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지방의 석공들이 조성을 한 석불이나 탑 등은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당당한 어깨와 발달된 신체표현, 그리고 U자형의 옷주름 등과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안성지방 인군의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지방은 그 지방 나름의 기능공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조성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잘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받침돌의 표현이 두드러져

 

받침돌은 아래받침돌과 위바침돌로 구분이 되어있다. 위 받침돌은 둥글게 조성을 하고 조각을 하였는데, 심하게 마모가 되어 조각을 잘 알바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아래받침돌의 문양으로 볼 때 위받침돌에는 꽃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을 것 같다. 또 이 위받침돌이 심하게 훼손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정확지가 않다.

 

 

 

아래받침돌은 문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밑으로 된 넓은 앙련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연꽃잎에 꽃을 사긴 것은 흔히 볼 수 만날 수가 없다. 아래받침돌의 위부분은 돌출을 시켜 그 곳에도 8장의 꽃잎을 가진 꽃을 돌아가면서 조각하였다. 이 받침돌 하나만 보아도 당시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제 자리를 떠나 안성 칠장사 대웅전 옆에 서 있는 봉업사지 석불입상. 우리의 많은 문화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자리를 떠났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속으로 기원을 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제자리를 떠나는 문화재들이 없게 해달라고.


지난 18.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경내 한편에는, 눈에 발목이 묻혀있는 석불 한기가 보인다. 날이 추워서인가 박물관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한 듯하다. 이런 추운 날 밖에서 저리 서 있다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다가 괜히 웃고 만다.

석불입상을 보고 웃은 이유는 그 모습이 균형미를 잃어서가 아니다. 그 추운 날 만난 석불입상의 입가에 흘린 엷은 웃음 때문이다. 커다란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 돌에다가 어떻게 저리도 따듯한 미소를 표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웃음 하나가 세상 온갖 고통을 한꺼번에 녹여버릴 듯하다.



천왕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다

현재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0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1933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인근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이 거대석불인 점을 감안하면, 이 석불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 석불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크다. 전체적인 모습은 굴곡이 없이 일직선의 형태로 표현을 하였다. 어깨와 하체가 일직선으로 다듬어 마치 원통이 곧게 서 있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살이 올라 풍성한 느낌을 준다. 반쯤 감은 눈과 입술 등의 윤곽이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밋밋한 장식의 표현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린 법의는 아무런 무늬가 없이 발밑까지 내려져 있다. 법의는 가슴께까지 깊게 파여져 있으며, 어깨부터 팔을 따라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렇게 표현한 주름이 이 석불입상에서 가장 표현을 강하게 한 부분이다. 두 손은 가슴께로 올렸으며, 그 아래편으로 법의가 U자의 주름으로 발목까지 내려가고 있다. 

손은 투박하고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 이유도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손 때문으로 보인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트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손가락의 표현도 어디인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멋스럽지 못하다.



충청도 일원에서 보이는 고려불의 특징

이러한 모습은 충청도 일원에서 발견이 된 고려불의 특징이다. 중앙의 장인들이 아닌,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성이 된 석조여래입상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석불의 특징은 거대불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전 천왕사 인근의 작은 암자 전각 안에 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래 기단부는 눈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음이 아쉽다. 봄철 눈이 녹으면 다시 한 번 찾아가 받침돌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균형미는 떨어지는 석불입상이지만, 그 편안한 미소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런 석조여래입상의 위로 덕분에, 이 추운 날에도 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소재한 함양중학교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 바로 본관 현관 문 옆에 커다란 석불좌상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대좌를 합한 높이가 4m가 넘으면, 앉아있는 석불좌상의 높이만 해도 2.45m가 넘는 거대한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이 석불좌상이 어떻게 해서 이 학교 교정에 와 있는지. 원래 이 석조여래좌상은 청룡사 터나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2월 11일, 하루 만에 전북 남원과 경남의 거창, 함양을 돌아보았다. 정발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함양중학교 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을 시간이다.


조각난 석불좌상.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보물 제376호인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없어지고, 오른팔과 얼굴, 무릎과 대좌 등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거기다가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강건한 형태의 석불좌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손도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나가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의 경우도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사각형으로 조성된 대좌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싱대, 한 번에 두 개씩 눈모양인 안상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로 구성되어 진다.




고려시대 석불의 장중함이 그대로

많이 훼손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장중함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석조불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고 강건한 형상의 이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코와 입의 모습들을 볼 때, 함양 덕전리의 마애여래입상과 그 형상이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입가에는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표정은 전체적으로 온화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텁게 새긴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다. 석불좌상을 몇 번을 돌면서 나름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온전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그 장중함이 대단하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대좌만으로도 사람을 반하게 하다

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면서 옛 선인들의 뛰어난 작품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하나하나 조각을 하여, 작품을 만든 것일까? 대좌 하나만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맨 밑에 놓인 하대는 두텁게 조각한 연화문을 사방에 둘렀다. 일부가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상을 두 개 씩 조각한 중대는 온전한 모습이다. 상대는 밑에는 이단의 층을 만들고 위는 평평하게 다듬어 석조여래좌상을 올려놓게 하였다.

한편이 뭉텅 잘려나갔지만,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상대는, 고려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해가 지는 학교 교정에서 만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 그 웅장한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발길을 붙들기에 충분한 듯하다.



문화재답사를 하다가 보면 정말로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천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그렇게 버티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면서.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동에 가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조각을 한 솜씨도 뛰어나려니와, 아직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잘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창읍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는 곳은 예전에 노혜사 또는 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석불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이나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보물 제377호로 지정된 이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석조불상의 조형미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만나는 순간 숨이 막히다.

거창군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선 1211일은, 아침부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였다. 그래도 바쁘게 움직이다가 보면 추운 줄을 모른다. 답사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것은, 깊은 겨울이 되었을 때 눈길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길이 얼고 눈보라가 치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볼 심산에서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은 그 앞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 편하게 답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주차를 시키고 안으로 들어가니, 전체높이 3.7m, 불상 높이 2.7m 의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머리 위에 올려놓은 갓인 천개는, 근간에 올려 진 것이라고 한다. 아마 석불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함인 듯하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 숨이 막힌다. 그 조각을 한 솜씨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석불들과는 사뭇 다르다. 화강암으로 조성이 된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예술의 뛰어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섬세한 조각수법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

머리에 비해 몸은 약간 가늘어 보이지만, 늘씬한 체격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둥근 얼굴에 반듯한 이목구비. 반쯤 뜬 듯한 눈과 입가에 엷은 미소는, 살아있는 부처의 자비를 보는 것만 같다. 찬 돌을 깎아 조형을 하면서, 어찌 이렇게 섬세한 모습을 표현 할 수 있었을까?

목에는 삼도를 새겨 넣었고 넓지 않은 어깨에는 대의를 걸쳐 입었다. 대의 아래에 치마모양으로 길게 표현된 군의는 주름살 하나부터 접힌 부분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금방이라도 초겨울 찬바람에 대의 자락이 나부낄 것만 같은 형상이다.

더구나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려 대의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왼손은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법의자락을 잡고 남은 손가락은 곧게 폈는데, 그 형상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손가락 하나까지도 따듯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군의자락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듯한 발은 뭉툭한 느낌이다. 어찌 이런 모습을 그 시대에 정 하나만을 갖고 표현을 할 수가 있었을까?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려 옷깃을 살짝 잡과, 왼손은 아래로 내려 집게손가락으로 법의 자락을 자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예술작품

석조여래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둥글게 조성을 했는데, 약간은 투박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불상과는 달리 조금은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석조여래입상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있다. 위를 이층으로 둥글게 깎아 그 위에 석불을 새우고, 아래는 돌아가면서 연꽃잎을 크게 새겨 넣었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 주변을 돌면서 사진촬영을 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세상 모든 시름을 사라지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천년 넘는 세월을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남원시 주생면 낙동리 산15-6번지. 좁은 마을 길 도로변 밑에 석불 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정표 하나 서 있지를 않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찾을 수조차 없을 것만 같다. 마침 선원사 최인술 봉사단장이 이곳을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과 함께 찾아와 보았다면서 안내를 하는 바람에 만날 수 있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을, 근래에 받침부가 노출됨으로써 불상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전체 높이는 240cm이며, 입상과 광배가 조ㅘ를 이루고 있다. 언필 보면 떨어진 듯도 하지만, 광배를 다듬고 그 앞에 석불입상을 부조한 것만 같다.


낙동리 석조여래입상의 앞과 뒤

심하게 훼손이 된 안면

숲 속 길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길 가에는 이곳에 문화재가 서 있다는 안내판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호 철책을 친 안으로 서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뒤편에 세운 광배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깨어진 곳도 없다. 그러나 정작 석불의 안면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볼이 두툼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해, 상당히 세심한 조각수법을 보였던 것만 같다. 어깨선이 유려한 것이나 발 밑까지 흘러내린 법의의 옷 주름이 부드러운 U자형으로 퍼진 것 등을 볼 때 상당히 수준 높은 석조여래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외롭게 서 있엇을까?




석조여래입상의 뒤편에 세운 광배는 온전하다. 빛을 묘사한 광배에는 꽃과 불꽃 무늬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광배의 뒷면을 잘 다듬은 것이나, 광배의 조각들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이 수준작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석조여래입상을 찬찬히 훑어본다. 얼굴의 윤곽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균형이 알맞게 표현되었다. 두상의 크기와 알맞게 조형된 귀, 그리고 둥글게 형태를 지닌 얼굴.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가까이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손은 다 마멸이 되어 보이지가 않는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이고, 법의를 걸친 어깨선은 부드럽게 표현이 되었다. 법의의 주름은 넓게 퍼져 있으며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발목 부분부터는 주름을 잡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이라면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같은 수준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심하게 마멸이 되어 알아볼 수 없는 안면, 잘려나간 손 등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숲 속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남원 덕동리 석조여래입상. 아마 이 곳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벌써 천년 세월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 인근에 절터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지난날과, 분간이 안되는 모습을 보면서 괜한 한숨만 토해낸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바로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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